[포인트경제] AI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반도체의 연산 속도만큼이나 안정적인 전력 공급을 지원하는 부품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특히 엔비디아, AMD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이 첨단 2~3나노 공정으로 칩을 미세화함에 따라 전력 소모와 노이즈(간섭) 문제가 핵심 난제로 부상했다.
이에 삼성전기는 기존 MLCC로는 대응이 불가능했던 첨단 반도체의 미세 영역을 커버할 차세대 '실리콘 캐패시터(Si-Cap)' 기술을 앞세워, 고성능 부품 수요가 시급한 글로벌 빅테크 시장을 파고들고 있다.
△ 아파트 옥상 물탱크가 칩 안으로…'DRAM DNA' 심은 실리콘 캐패시터
캐패시터는 전자회로 안에서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때 일정하게 공급해 주는 일종의 '물탱크' 역할을 한다. AI 서버처럼 순간적으로 엄청난 쿼리(연산 요청)가 집중될 때 전압이 급격히 떨어져 시스템이 다운되는 것을 막아주고, 멀티코어 간의 신호 간섭(노이즈)을 차단하는 핵심 수동부품이다.
그동안은 세라믹을 겹겹이 쌓아 만드는 MLCC가 시장을 지배해왔다. 하지만 AI 데이터센터와 온디바이스 AI 칩이 극도로 얇고 고성능화되면서 MLCC는 박형화(얇게 만드는 것)의 한계에 부딪혔다. MLCC는 두께가 100㎛(마이크로미터) 밑으로 내려가면 성능이 급격히 저하되기 때문이다.
삼성전기가 주목한 돌파구는 DRAM 반도체의 기술 DNA다. 김원기 삼성전기 실리콘 캐패시터 개발 그룹장은 지난 11일 열린 제품 학습회에서 "DRAM은 이미 30년 전부터 정보를 저장하기 위해 내부에 초소형 캐패시터를 만들어 쓰고 있었다"며 "여기서 트랜지스터(FET) 공정을 빼고 캐패시터 구조만 가져와 데이터센터 사양에 맞게 다시 개발한 것이 실리콘 캐패시터"라고 설명했다.
실리콘 캐패시터는 반도체 에칭(Etching) 공정으로 실리콘 웨이퍼에 미세한 구멍을 숯(다공체)처럼 촘촘히 뚫어 표면적을 극대화한다. 덕분에 전체 두께를 60~100㎛ 미만으로 대폭 줄이면서도 높은 용량 밀도를 구현해냈다.
△ MLCC 대비 '3대 치명적 약점' 극복…극한 환경서 빛나는 성능
반도체 공정으로 태어난 실리콘 캐패시터는 기존 MLCC가 가진 고질적인 약점을 완벽히 해결했다.
첫째, 'DC 바이어스(전압 변화에 따른 용량 감소)' 현상이 전혀 없다. MLCC는 재료 특성상 전압이 올라가면 에너지를 모으는 효율이 떨어지지만, 실리콘 캐패시터는 전압이 2배, 3배 늘어나면 용량도 정확히 비례해서 늘어난다. 전압을 수시로 제어해야 하는 고성능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설계자들에게 최고의 편의성을 제공하는 셈이다.
둘째, 온도 안정성이 탁월하다. 영하의 극저온부터 수백 도의 고온까지 유효 용량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태양열과 지구 그늘을 오가며 극심한 온도 차를 겪는 '저궤도 위성' 등 우주항공 분야와 고온·충격을 견뎌야 하는 '피지컬 AI(로봇·전장)' 업계가 실리콘 캐패시터로 눈을 돌리는 이유다.
셋째, 기생 성분(ESL)을 최소화했다. 관이 여러 갈래로 나뉘었다 합쳐지는 MLCC 구조와 달리, 단일 관 구조에 수십 개의 멀티 터미널(범프)을 배치해 전류의 흐름을 방해하는 인덕턴스를 대폭 줄였다. 초고속으로 켜고 꺼지는 AI 서버용 칩에 최적화된 특성이다.
일각에서 제기된 '기존 MLCC 시장 잠식(카니발라이제이션)' 우려에 대해 김 그룹장은 "MLCC로 도저히 스펙을 맞출 수 없어 시스템 설계를 포기해야 하는 극한 영역에 실리콘 캐패시터가 대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며 "두 소자가 상호 보완하며 캐패시터 시장 전체 파이를 키우고 있다"고 진단했다.
△ 전 세계 유일 '기판+MLCC+Si-Cap' 번들 경쟁력…빅테크 수주 봇물
현재 실리콘 캐패시터 시장은 기술 진입장벽이 높아 소수의 부품사 및 일부 반도체 파운드리 기업이 혼재돼 경쟁하고 있다. 이 가운데 삼성전기가 단기간에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던 비결은 '토탈 솔루션' 역량에 있다.
삼성전기는 고성능 반도체 패키지 기판(FC-BGA)과 기성 MLCC, 그리고 차세대 실리콘 캐패시터 기술을 모두 보유한 유일한 기업이다. 최근 AI 서버 시장에서는 칩의 공간 효율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판 내부에 부품을 심는 '임베디드(Embedded)' 공정이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이때 칩 제조사 입장에서는 부품을 각각 다른 회사에서 조달했다가 불량이 발생하면 책임 소지가 모호해지는 리스크를 안게 된다. 반면 삼성전기는 기판 설계 단계부터 실리콘 캐패시터의 최적 배치를 통합 제안하는 '번들(Bundle) 영업'이 가능하다. 개발 기간을 획기적으로 단축하고 품질 책임까지 일원화할 수 있는 만큼, 글로벌 테크 기업들 사이에서 긍정적인 평가가 잇따르고 있다.
삼성전기는 과거 통신 모듈 및 5G 안테나 사업을 영위하며 쌓아온 반도체 공정 노하우와 초고주파(60~100GHz) 회로 설계 능력을 Si-Cap 커스터마이징(고객 맞춤형 제조)에 고스란히 이식했다.
현재 삼성전기의 실리콘 캐패시터는 모바일 AP 분야를 넘어 AI 데이터센터용 기판 내장 형태로 본격적인 매출 램프업(Ramp-up·양산 확대) 단계에 진입했다. 전 세계적으로 실리콘 캐패시터 공급 능력을 갖춘 부품사가 극소수에 불과한 만큼, 하이엔드 칩을 설계하는 북미 등 주요 빅테크 기업 대부분이 삼성전기와 긴밀한 소통 체계를 구축하고 칩 적용을 고심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삼성전기는 이번 실리콘 캐패시터 양산을 발판 삼아 MLCC 단일 품목에 치우쳤던 컴포넌트 사업 구조를 하이엔드 신소자 영역으로 확장하는 한편, 다가올 AI 서버 및 전장 시장의 초격차 부품 리더십을 한층 공고히 한다는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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