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한국의 PTSD(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문제는 없었던 것이 아니다. 늦게 보였고, 더 늦게 인정됐다. 전투와 군 복무 과정에서 발생한 외상 경험은 개인의 삶에 장기적인 영향을 남겼다. 하지만 이를 사건 직후부터 기록하고 추적하며 치료와 보상, 사회 복귀로 연결하는 체계는 충분히 앞서가지 못했다.
국내 사례는 이 공백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제2연평해전과 천안함 피격, 연평도 포격 등을 겪은 생존 장병들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국가유공자 심사와 보상 체계 안으로 들어왔다. 지연성 PTSD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제도는 정신적 후유증을 뒤늦게 발견했고, 당사자는 자신의 고통을 다시 설명해야 했다.
해외 주요국 사례가 한국에 던지는 질문도 여기에 있다. 미국은 재향군인부(VA)를 중심으로 PTSD를 참전군인 정책의 핵심 영역으로 다뤄왔고, 영국은 전역 군인과 가족을 대상으로 전문 서비스를 구축했다. 호주는 치료 접근성을 넓히는 데 초점을 맞췄고, 이스라엘은 초기 개입과 예방 교육에 무게를 둔다. 제도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방향은 하나로 모인다. PTSD를 개인의 문제로만 두지 않고, 국가가 기록하고 관리해야 할 전쟁 이후의 시간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제 한국이 답해야 할 차례다. 필요한 것은 보상 확대만이 아니다. PTSD가 발생한 뒤 뒤늦게 인정하는 구조에서 벗어나, 외상 경험을 발견하고 기록하며 치료와 복귀로 연결하는 체계를 만드는 일이다. 군인 PTSD를 정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법 조항 하나를 손보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전투 이후의 시간을 국가가 어디까지 책임질 것인지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일이다.
◆정책의 출발점은 '기록'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기록이다. PTSD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신체 부상처럼 사건 직후 상처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을 수 있고, 시간이 흐른 뒤 불안·우울·공황·회피 반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런 특성 때문에 사건 당시의 기록은 더욱 중요하다.
그동안 한국의 군 PTSD 대응은 충분히 기록 중심으로 작동하지 못했다. 전투나 피격, 포격처럼 명확한 사건이 있어도 당시 장병이 어떤 외상 경험을 했는지, 이후 어떤 심리적 변화를 겪었는지, 상담이나 치료가 어떻게 이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체계적으로 축적되지 못했다.
기록이 없으면 당사자는 시간이 흐른 뒤 다시 자신의 피해를 증명해야 한다. 제도는 진단서와 치료 이력, 공무상 인과관계를 요구하지만, 정작 외상 경험이 발생한 시점에는 충분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늦게 나타나는 PTSD일수록 제도 안으로 들어가기 어려워지는 이유다.
안종민 국가보훈행정사무소 대표 행정사는 이 문제를 '개인입증주의'의 한계로 짚었다. 그는 군인 PTSD 인정 과정에서 "의료 입증은 되는데 직무 입증이 안 되는 경우가 있고, 직무 입증은 되는데 의료 입증이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어 "민간인이 이 두 가지를 찾아서 입증하기는 어렵고, 그동안 살아있는 동료가 있으면 증명서를 하나라도 받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덧붙였다.

이 말은 행정 절차의 어려움만을 뜻하지 않는다. 국가가 갖고 있어야 할 기록을 개인이 뒤늦게 찾아 헤매는 구조를 보여준다. 전투와 작전, 훈련사고, 사망·부상 목격, 장기간의 고위험 임무 등 정신적 외상을 유발할 수 있는 경험은 군 조직 안에서 발생한다. 그렇다면 그 경험을 기록하고 보존하는 책임 역시 국가가 먼저 져야 한다.
기록은 행정 절차가 아니다. 국가가 어떤 사건을 군 복무의 외상 경험으로 인식하고, 그 이후를 추적하겠다는 출발점이다.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뿐 아니라 그 사건을 통과한 장병이 이후 어떤 변화를 겪는지까지 남겨야 한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제도 안으로 들여오는 첫 단계는 결국 기록이다.
◆'인정 이전'에 발견해야 할 상처
지금까지의 제도는 대체로 '인정 이후'에 작동했다. 국가유공자로 등록되거나, 공무상 질병으로 인정되거나, 보상 대상에 포함된 뒤에야 치료와 지원의 문이 본격적으로 열리는 구조였다.
그러나 PTSD는 인정 이후보다 발견 이전이 더 중요하다. 사건 직후 증상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경우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 뒤늦게 나타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당장 이상이 없어 보였다는 이유로 관리 대상에서 제외되면, 몇 년 뒤 나타난 증상은 개인의 문제처럼 취급될 가능성이 커진다.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역시 PTSD 대응의 출발점을 사후 인정이 아닌 초기 관리에서 찾아야 한다고 봤다. 그는 "트라우마를 겪은 초기에 집중해서 관리해 PTSD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군은 이 지점에서 다른 영역과 다르다. 군 조직 안에서 발생한 외상 사건은 보고되고 기록될 수 있다. 누가 어떤 사건을 겪었는지 알 수 있다면, 국가가 손을 놓고 기다릴 이유는 없다.
따라서 필요한 것은 외상 사건 직후부터 전역 직전, 전역 이후까지 이어지는 선별과 추적 관리다. 전투나 고위험 임무를 경험한 장병에게는 사건 직후의 단기 확인뿐 아니라 일정기간 이후의 재점검이 필요하다. 전역을 앞둔 시점에는 정신건강 상태를 확인하고, 위험군은 전역 이후 보훈·의료 체계로 자연스럽게 연결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낙인을 줄이는 일이다. 군 조직 안에서 정신건강 문제를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부담이다. '약하다'는 시선, 인사상 불이익에 대한 우려, 동료에게 부담이 된다는 감정은 증상을 숨기게 만든다. 발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려면 장병이 자신의 상태를 말해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신뢰가 먼저 필요하다.
PTSD 관리는 '문제가 생긴 사람'을 골라내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외상 경험을 겪은 장병이 자연스럽게 점검받고, 필요하면 치료로 이어질 수 있는 일반적 절차가 돼야 한다. 인정받기 위해 고통을 증명하는 구조에서, 국가가 먼저 위험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구조로 바뀌어야 한다.
◆흩어진 지원을 하나로 묶어야
군인 PTSD는 하나의 부처만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복무 중 외상 경험은 국방 영역에서 발생하고, 전역 이후 인정과 보상은 보훈 영역으로 넘어간다. 치료와 정신건강 지원은 의료·복지 체계와 연결된다. 당사자의 삶에서는 하나의 문제지만, 제도 안에서는 여러 영역으로 나뉘어 있다.

이 분절이 공백을 만든다. 군 안에서 발생한 외상 경험이 전역 이후 보훈 심사로 제대로 이어지지 않으면, 당사자는 다시 자료를 모아야 한다. 보훈 체계에서 인정되더라도 치료와 상담, 사회 복귀 지원이 충분히 연결되지 않으면 회복은 개인의 몫으로 남는다.
해외 사례에서 확인한 핵심은 '연결'이다. 진단, 치료, 보상, 재활, 가족 지원, 사회 복귀가 따로 움직이지 않고 하나의 흐름 안에서 맞물릴 때 공백은 줄어든다. 한국도 국방부, 국가보훈부, 보건복지부, 군 의료기관, 보훈병원, 민간 정신건강 체계가 별도로 움직이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통합 창구가 필요하다. PTSD 의심 증상이 있는 장병이나 전역 군인, 가족이 어디로 연락해야 하는지 명확해야 한다. 복무 중 기록은 전역 이후 필요한 지원으로 이어져야 하고, 보훈 심사 결과는 치료와 상담, 직업 복귀 지원으로 연결돼야 한다. 제도가 존재해도 당사자가 길을 찾지 못하면 정책은 작동하지 않는다.
백 교수는 PTSD 치료가 진료실 안에서만 완성되지 않는다고 봤다. 그는 "2차 가해를 당하면 PTSD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며 "회복하던 제대군인도 본인의 목숨을 바친 일과 전사한 동료들의 명예가 훼손됐다고 느끼면 무너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우려했다. 치료는 병원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회복은 사회 안에서 이어진다는 의미다.
가족 지원도 같은 맥락에서 중요하다. PTSD는 개인의 머릿속에서만 끝나는 문제가 아니다. 수면장애, 분노, 회피, 불안, 우울, 대인관계 단절은 가족의 일상에도 영향을 준다. 국가유공자 등록과 보상은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전투 이후의 삶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치료와 가족 지원, 사회 복귀가 함께 이어져야 한다.

군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PTSD를 겪는 장병을 업무나 훈련에서 제외하는 방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배려가 장기적으로 인사와 경력의 불이익으로 이어질 경우 장병은 자신의 증상을 숨기게 된다. 필요한 것은 배제가 아니라 조정이다. 치료와 역할 유지, 안전한 복무 환경을 함께 설계해야 한다.
한국의 문제는 지원이 전혀 없다는 데만 있지 않다. 지원이 흩어져 있고, 연결이 약하며, 당사자가 스스로 제도의 문을 찾아야 한다는 데 있다. PTSD를 정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흩어진 제도를 당사자가 실제로 닿을 수 있는 경로로 묶는 일이다.
◆늦은 인정에서 초기 관리로
한국은 이미 일정한 변화를 시작했다. PTSD 전문클리닉이 운영되고 있고, 보훈병원을 통한 치료 지원도 존재한다. 군인재해보상법 개정을 통해 지연성 PTSD를 보상 체계 안에 반영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났다. 의미 있는 진전이다.
그러나 변화의 방향은 더 앞으로 가야 한다. 지금까지의 초점이 '늦게 나타난 PTSD도 인정할 수 있는가'였다면, 앞으로의 질문은 '어떻게 처음부터 놓치지 않을 것인가'가 돼야 한다. 늦은 인정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사후 보상 중심의 구조는 언제나 뒤따라가는 방식일 수밖에 없다.
초기 관리 체계는 세 단계로 설계될 필요가 있다. 첫째, 외상 경험의 기록이다. 전투·작전·훈련사고 등 고위험 사건을 겪은 장병의 노출 경험과 초기 반응을 남겨야 한다. 둘째, 주기적 선별이다. 사건 직후뿐 아니라 일정기간 이후, 전역 전후에도 정신건강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셋째, 연결된 지원이다. 위험군이 확인되면 치료, 보훈 상담, 가족 지원, 사회 복귀 프로그램으로 이어져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은 심사자가 아니라 관리자가 돼야 한다. 당사자가 모든 자료를 모아 자신의 고통을 증명하는 방식으로는 지연성 PTSD의 특성을 따라가기 어렵다. 국가는 외상 경험을 알고 있고, 복무 기록을 갖고 있으며, 전역 이후 지원 체계도 설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먼저 연결해야 한다.
백 교수는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그리고 삶이 유지될 수 있도록 방법을 찾아가는 여정을 만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처를 없던 일로 만들 수 없다면, 그 상처를 안고도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지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미다.
안 행정사도 같은 방향을 짚었다. 그는 "특별한 희생에는 특별한 보상이 필요하다"며 "군 복무와 전투 경험에서 비롯된 상처라면 국가가 먼저 확인하고 책임지는 방식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결국 쟁점은 보상의 액수만이 아니다. 국가가 그 시간을 먼저 발견하고, 기록하고, 치료와 복귀로 연결할 것인지의 문제다.
PTSD를 정책으로 만든다는 것은 더 많은 상처를 뒤늦게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발견과 기록, 치료와 복귀를 하나의 흐름으로 묶어 제도 밖에서 방치되는 시간을 줄이는 일이다. 개인이 견디다 무너진 뒤에야 제도가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외상 이후의 시간을 국가가 함께 관리해야 한다.
전투는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누군가는 그날을 잊지 못한 채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고, 누군가는 뒤늦게 나타난 증상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그날을 꺼내야 한다. 이제 필요한 것은 늦은 인정에 머무는 제도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 상처를 처음부터 기록하고, 치료하고, 사회와 다시 연결하는 체계다. PTSD가 정책이 되려면, 국가는 전투 이후의 시간까지 제도 안에서 책임지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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