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부실채권(NPL)은 단순한 은행 건전성 지표가 아니다. 은행 장부에 쌓이는 부실은 기업과 가계, 한국 경제의 취약한 단면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마이데일리는 'NPL의 그림자' 시리즈를 통해 부실채권 증가의 이면과 그 속에 담긴 경제의 경고 신호를 짚어본다.

[마이데일리 = 최주연 기자] 국내 은행권 부실채권(NPL) 비율이 5년 만에 최고 수준으로 상승했지만 정작 부실채권 정리 속도는 둔화되고 있다. 신규 부실은 줄었는데도 장부에 쌓인 부실채권은 늘어나는 모습이다. 금융권에서는 최근 부실채권을 예전만큼 높은 가격에 팔기 어려워지면서 정리 속도도 함께 느려진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2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3월 말 기준 국내은행의 부실채권비율은 0.60%로 지난해 말보다 0.03%포인트 상승했다. 이는 2021년 3월 말(0.62%)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이다. 부실채권 규모도 지난해 말 16조6000억원에서 올해 3월 말 17조7000억원으로 1조1000억원 증가했다.
반면 부실채권 정리 규모는 감소했다. 올해 1분기 부실채권 정리 규모는 4조4000억원으로 전 분기보다 1조3000억원 줄었다. 이 가운데 상·매각은 2조9000억원, 담보처분을 통한 여신 회수는 1조원, 여신 정상화는 5000억원이었다.
겉으로만 보면 건전성이 악화되는 모습이지만 세부적으로는 조금 다른 그림이 나타난다. 신규 부실 발생 규모는 5조5000억원으로 전 분기보다 4000억원 감소했다. 기업여신 신규 부실은 4조1000억원으로 3000억원 줄었고 가계여신 신규 부실도 1조3000억원으로 1000억원 감소했다.
즉 새롭게 발생하는 부실은 줄어들고 있지만 부실채권 정리 속도가 더 크게 둔화되면서 전체 NPL 규모는 오히려 늘어난 셈이다.
◇ 신규 부실 줄었는데 NPL은 증가…무슨 일이 벌어졌나
이번 통계의 핵심은 신규 부실 확대보다 부실채권 정리 속도 둔화에 있다. 지난해 하반기까지만 해도 부실채권비율은 비교적 안정적인 흐름을 보였다. 그러나 올해 들어 부실채권 잔액 증가 속도가 정리 규모를 웃돌면서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시장에서는 NPL 거래 환경 변화도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과거에는 은행들이 부실채권을 비교적 적극적으로 매각했지만 최근에는 매각 가격이 낮아지면서 매각 유인이 약해졌다는 것이다.

실제로 회계법인 삼일PwC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은행 평균 NPL 매각가율은 2023년 87.3%에서 2024년 79.3%로 하락했다. 이후 2025년 평균은 70.7%까지 낮아졌고, 4분기에는 68.4%를 기록했다.
매각가율은 부실채권 원금 대비 실제 매각 가격의 비율을 의미한다. 수치가 낮을수록 은행은 부실채권을 더 낮은 가격에 처분해야 한다는 뜻이다.
특히 시중은행의 매각가율 하락 폭이 컸다. 삼일PwC 분석에 따르면 국민은행의 평균 매각가율은 2021년 89.8%에서 2025년 64.7%로, 신한은행은 같은 기간 98.9%에서 77.2%로 하락했다. 다른 은행들도 상황은 대동소이했다.
과거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부실채권을 넘겨야 하는 상황이 되면서 은행들의 매각 전략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는 분석이다.
◇ “싸게 팔 바엔 보유”…바뀌는 은행들의 선택
은행 입장에서는 부실채권을 매각하면 장부를 정리할 수 있지만 매각 가격이 지나치게 낮을 경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반면 충당금 적립 여력이 충분하고 자본비율 관리에도 큰 부담이 없다면 당장 헐값에 매각하기보다 자체 회수나 시장 여건 개선을 기다리는 선택도 가능하다.
실제로 최근 NPL 시장에서는 투자자들이 요구하는 기대수익률과 은행이 원하는 매각 가격 간 격차가 커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삼일PwC 역시 최근 보고서에서 주요 NPL 투자사들의 레버리지 부담 확대와 회수기간 장기화로 입찰가격 하락세가 이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한 신용평가업계 관계자는 “예전처럼 높은 가격에 부실채권을 넘길 수 없는 환경이 되면서 은행들이 매각 시점과 방식에 보다 신중해지고 있다”며 “NPL 시장의 가격 조정이 이어질 경우 이러한 흐름은 당분간 지속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만 금융당국 통계만으로 부실채권 증가의 직접적인 원인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신규 부실은 줄어들고 있는데 정리 규모는 감소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NPL 매각가율이 하락하고 있다는 점은 최근 부실채권 시장 환경 변화를 보여주는 신호로 해석된다.
결국 올해 1분기 은행권 NPL 증가는 단순한 부실 확대보다 신규 부실 감소와 부실채권 정리 둔화가 동시에 나타난 결과에 가깝다. 향후 부실채권 정리 속도와 NPL 시장 여건 변화가 은행권 건전성 흐름을 가를 주요 변수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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