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빠르게 경제 성장을 이뤘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바쁘게 달려온 끝에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 다만 초고속성장은 우리 사회에 과실만을 안겨주지 않았다. 과도한 수도권 집중과 지역 간 불균형을 초래해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한 원인이 됐다. 전국 지역 곳곳이 저마다의 문제로 시름하고 있는 현재, 우리는 어디서부터 해법을 찾아가야 할까. [편집자주]
시사위크=이미정 기자 도서관은 지역사회의 중요한 플랫폼으로 진화하고 있다. 단순히 책 열람실을 넘어, 사람들이 모이고 소통하는 중심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일각에선 도서관이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지역사회 주요 이슈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주민 토의를 지원하는 ‘공론장’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해외 선진국을 중심으로 이러한 논의와 실행 사례가 확대돼왔지만, 국내에선 걸음마 단계에 머물고 있다. 다만 국내에서도 눈여겨 볼만한 ‘도서관 공론장’ 사례가 존재한다.
◇ 성북구립도서관 ‘마을in수다’… 10년째 주민 참여형 공론장 열어
성북구립도서관은 올해로 10년째 주민 참여형 도서관 공론장인 ‘마을in수다’라는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마을in수다’는 일상적 공론의 장을 마련해 지역 주민이 관심사나 지역에 관한 의제를 발굴해 주민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대안을 찾아보고자 하는 취지로 시작됐다.
서울 성북구립도서관이 위치한 성북구는 서울시 25개 자치구 중 하나로 약 42만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9월 기준 성북구 지역엔 17곳의 구립도서관이 자리한다. 성북구는 17개 구립도서관을 ‘성북구립도서관’이라는 하나의 통합 브랜드로 연결하고 있다. 성북구립도서관은 성북문화재단에서 수탁 운영하고 있다.
성북구는 주민자치역량으로 지역의 문제를 해결하는 마을공동체 복원에 대한 관심이 높은 기초지자체 중 한 곳이다. 이러한 정책 기조 아래, 도서관 공론장 프로그램도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성북구립도서관은 10년간 관별로 돌아가면서 주민을 위한 ‘공론장’을 만들어왔다. 성북구립도서관이 ‘시사위크’에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2016년 첫 시행된 이후 올해 8월까지 총 89개의 공론장이 만들어졌다. 참여 주민수는 2,946명에 달한다. 아울러 공론장과 연계된 프로그램 참가자 수는 6,252명으로 집계됐다.
◇ 의제 설정부터 주민 참여… 10년간 89개 공론장 만들어
시행 첫해엔 8개 구립도서관(성북정보도서관·아리랑도서관·해오름도서관·종암동새날도서관·석관동미리내도서관·달빛마루도서관·정릉도서관·청수도서관)과 기관 2곳(작은도서관네트워크, 청소년진로직업체험지원센터)이 참여해 10개의 공론장이 만들어졌다. △인간관계의 갈등 △도시 속 생태 △혁신교육 △나이 듦 △배려 △미세먼지 △꿈 △교육 다이어트 △불안 △자녀독서 등이 의제로 설정됐다. 첫해엔 총 601명의 주민들이 공론장에 참여했다.
성북구립도서관은 공론장을 통해 여러 의제를 발굴하며 공론장 모델을 체계화했다. 의제 주제는 청년, 노년과 삶, 행복 등의 일상의 고민부터 마을쓰레기, 도시재생, 반려동물, 청소년 공간, 안전 등 지역의 현안을 포괄했다. 세대 소통, 기후 위기, 사회적 고립 등 사회적 공통의 이슈로 의제로 선정됐다.
올해 도서관 공론장 ‘마을in수다’는 성북정보도서관·아리랑도서관·종암동새날도서관·석관동미리내도서관·보문숲길도서관 도서관 5곳에서 열렸다. 공론 의제는 △잠시 멈춘, 쉬었음 청년들에 대해(성북정보도서관)△정년연장, 당신은 괜찮은가요?(아리랑도서관)△아동·청소년 SNS 규제, 어디까지 해야 할까?(종암동새날도서관)△앞으로의 삶, 무엇을 준비해야 할까?- 건강, 대인관계, 여가, 재정에 대해서(석관동미리내도서관)△나는 AI를 얼마나 신뢰하는가?(보문숲길도서관)등으로 선정됐다.
의제 선정 방식은 도서관별로 조금씩 다르지만, 주민 참여 중심의 단계별 과정을 거쳐 이뤄지는 것이 주요 특징이다.
올해 아리랑도서관의 마을in수다 최종 의제 선정 절차를 살펴보면 먼저 ‘네:온 우리랑’ 회의를 통해 의제 발굴을 1차 논의한다. ‘네:온 우리랑’는 도서관을 중심으로 기관 및 단체, 주민이 참여하는 모임으로 지역의 고민과 현안을 공유하며 협력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해당 모임의 회의를 통해 △청년, 쉬었음 △돌봄의 공백 △장애인과의 공존 △나이듦과 일 △인구감소와 마을 등의 주제가 선정이 됐다.
이후 주민 대상 온·오프라인 투표를 통해 의제를 선정한다. 아리랑도서관은 도서관을 오가면서 주민들이 자유롭게 투표를 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 주민투표 결과, ‘나이 듦과 일’ 관련된 주제가 가장 많은 득표를 얻었다. 이후 사서 회의를 거쳐 의제 선정을 구체화하는 절차가 진행됐다. 회의에서 사서들은 “일과 노후는 지역 주민의 삶과도 밀접하니 다뤄볼만한 주제다” “청년부터 중장년까지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주제인 것 같다” “최근 논의가 활발한 정년연장으로 논의를 구체해봤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최종 의제로 ‘정년연장, 당신은 괜찮은가요’로 선정됐다. 이후 도서관은 관련 의제와 관련된 자료와 도서 정보를 적극 서비스하고, 홍보 활동, 연계 프로그램 등도 추진한다. 아리랑도서관은 공론장이 열리기 일주일 전인, 지난 7월 22일 ‘왜 지금 정년연장을 말하는가’라는 주제로 특강을 열어 시민의 이해를 높였다. 이후 7월 29일엔 정년연장을 주제로 한 공론장을 개최했다.
강영아 아리랑도서관 관장은 본지와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도서관별로 공론장 운영 방식은 의제 선정 방식은 차이는 있다”며 “주민에게 완전히 열어놓고 키워드를 수집한 뒤, 이를 분류한 다음에 1차 선정을 해서 주민투표로 정하는 도서관도 있고, 도서관이 자료 조사나 현안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갈래를 잡고 주민투표로 정하는 경우도 있다. 이 외에도 도서관이 다방면에 의견을 물어 의제를 구체화시키는 방식도 있다”고 말했다.
◇ 일상적 고민부터 마을 문제까지… 자유로운 토론의 장
토론은 어떤 방식으로 이뤄질까. 강영아 아리랑도서관관장은 “주민들과 전문가가 의견을 자유롭게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된다”며 “주민들이 일상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하는 비중이 큰 것 같다. 각자 다른 생각과 경험을 나누면서 이해의 폭을 넓히는 방식”이라고 설명했다. 주민들이 공론장 경험 후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대해선 “새롭게 알게 된 정보가 많았고, 다른 관점에 대한 이해가 높아졌다는 평가가 많았다”며 “특히 몰랐던 정책적 변화를 알게 된 점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고 전했다.
참여 세대층에 대해선 “기본적으론 중장년층의 참여도가 높지만 청년층이나 학생들과 맞닿아 있는 주제엔 젊은 층과 청소년들도 참가했다”며 “각자의 입장과 상황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갔는데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많았다”고 전했다.
아리랑도서관이 올해 7월 열린 공론장에 참여한 대상자 중 1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이번 공론장 가장 좋았던 점’을 묻는 질문(최대 2개 선택)에 △이웃의 다양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나와 다른 의견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어서 △평소에 생각하지 않은 사회 문제(이슈)에 대해 새롭게 알게 되어서 등의 순으로 높은 답변율을 보였다. 아울러 응답자 중 78.5%는 다음 공론장에도 재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도서관 공론장을 계기로 자발적인 시민 실천모임이 생긴 사례도 있다. 성북구 석관동 일부 주민들은 쓰레기 문제를 의제로 열린 공론장을 계기로 주민 참여형 모임인 ‘쓰담쓰담’을 만들어 10년째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쓰담쓰담’은 석관동의 환경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나가는 주민 실천모임이다.
이 외에도 꾸준히 ‘도서관 공론장’ 실험을 이어가고 있는 곳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사립 공공도서관인 ‘느티나무도서관’이다. 느티나무도서관은 2015년부터 지역 주민들이 함께 하는 공론장인 ‘마을포럼’을 열고 있다.
마을 포럼은 지역 주민들이 한자리에 모여 일상 속 다양한 이슈나 사회적 주제에 대해 고민을 나누고, 질문하며, 서로의 의견에 듣는 자리다. 토론은 일정한 주제를 놓고 패널과 참가자의 질문과 대화 중심으로 진행된다. 2015년 ‘역사교과서’ 주제로 첫 마을포럼을 연 것을 시작으로, 일상, 돌봄, 인공지능, 마을 민주주의, 저널리즘 등 다양한 주제로 주민 공론장을 열었다.
◇ 용인 ‘느티나무도서관’ 마을포럼… 주민 ‘공론장’의 보여준 힘
김경현 느티나무도서관 사서는 “마을포럼 참여 인원 매년 추이가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작년 기준으로 말씀드리자면, 평균 50명 정도의 인원이 함께했다”며 “매회마다 마을포럼을 진행하기 전엔 도서관 한복판에 ‘질문게시판’을 만들어둔다. 마을포럼이 진행되기 전, 주제를 먼저 사람들에게 알리고 평소에 그 주제에 관해 궁금했던 내용이나 레퍼런스 패널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 자신만의 생각 등을 자유롭게 남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 질문들을 가지고 포럼 때 대화의 물꼬를 트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주제에 관해 한 가지의 답을 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두의 이야기를 다양하게 들어보고, 함께 고민하기 위한 자리로 준비하고 있다”며 “마을포럼 주제와 연결해 책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의 자료를 한 데 엮는 컬렉션을 만드는 작업도 마을포럼 준비 과정에 함께 진행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느티나무도서관은 올해 하반기 반려동물을 주제로 마을포럼을 기획 중이라고 한다. 김 사서는 “느티나무도서관은 마을포럼뿐 아니라, 주민들과 참여하는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며 “요즘 자원순환이나 기후위기에 관심을 가지는 분들이 많은데, 이와 관련된 활동 모임을 도서관안에서 하기도 한다. 사서들은 해당 활동에 참고가 될만한 자료나 도서, 관련 정책 조례 등을 한 눈에 찾아볼 수 있도록 컬렉션을 만들어서 제공하고 있다. 컬렉션과 관련된 회의도 정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지역 주민들이 도서관을 거점 플랫폼으로 자원순환 활동에 참여하면서 쌓은 경험과 역량을 바탕으로 지역 조례 개정에도 참여한 사례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도서관이 ‘일상 공론장’으로 기능할 수 있다고 봤다. 김 사서는 “도서관은 마을마다 하나씩 있고, 누구나 일상적으로 찾을 수 있는 곳이다. 무언가 활동을 해볼 수 있는 공간도 마련돼 있고, 참고할 수 있는 자료도 있다. 그리고 관심이 있는 주제를 연결해줄 수 있는 사서도 있다. 도서관이 일상의 공론장 역할을 있도록 보다 세부적인 방안을 검토해볼 수 있다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지역 살리기 정책은 관주도에서 주민 주도로 패러다임이 전환되고 있다. 주민이 지역 문제를 발굴하고 협의를 통해 해결 방안을 찾아가는 구조를 만들기 위해선 주민자치 역량의 성장이 필요하다. 도서관이 주민자치 성장의 거점이 될 수 있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국내에선 공론장 운영 사례는 많지 않는 실정이다. 공론장 운영 모델이 확산되기 위해선 도서관 정책 단위에선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할 전망이다. 더불어 공론장을 통해 모아진 주민 의견이 실제 주민 자치 정책에 반영될 수 있는 선순환 구조에 대한 고민도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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