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가 있는 노래] 봄날은 간다 - 백설희 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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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경제] 봄날은 간다 - 백설희 ⑭

봄날은 간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찻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 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전쟁이 끝난 다음해인 1954년 초, 손로원(1911~1973)이 쓴 시에 박시춘이 음율을 놓아 이 가락이 만들어졌다. 이 가요시는 2004년 가장 아름다운 시노래 선정작업 결과 1등을 했다. 계간지 시인세계에서 시인 1000여명에게 설문지를 돌려 모은 결과였다.

그 다음은 킬리만자로의 표범, 북한산, 한계령 그리고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 등이다. 최근 뮤지컬 디바로 알려졌던 차지연씨가 MBN 현역가왕에 출연해 인기를 얻었는데, 그녀가 직접 쓴 83세 정애심 스토리로 봄날은 간다를 열창해 전과 달리 더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용두산 판자촌 엄니 사진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시인이자, 작사가 손로원은 누구며, 어떤 사연으로 이런 시를 썼고, 또 노래가 되었을까! 

그는 1930년대에 시인과 작사가로 활동했으나 치욕적인 일제의 시대 상황에 환멸을 느꼈다. 절필하고 술과 벗하며 방랑 생활을 거듭한 그는 어느날 어머니의 부음소식을 들었다. 

1945년 화사한 봄날, 금강산 차가운 계곡물이 흐르는 철원, 상복을 입은 그는 어머니 묘소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무성한 나무 그늘이 드리워져 있는 곳이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 부산에서 조국 광복을 맞았다. 1953년 11월27일, 부산역 대화재는 영주동 산동네 판잣집에서 시작, 겨울 강풍을 타고 영선 고개를 넘어 용두산 판자촌과 옛 부산역 일대를 태워버렸다. 손로원은 판잣집 단칸방에 고이 간직한 연분홍 치마저고리를 입고 찍은 단 한 장뿐인 어머니의 사진을 잃었다. 참담한 겨울을 보내며 불효의 회한을 매만지면서 아득한 회억의 봄을 걸어오는 어머니를 떠올리며 시 '봄날은 간다'를 완성한다.

1954년, 봄이 저무는 어느 날 손로원은 대구의 오리엔트레코드사의 박시춘에게 그 시를 전했고 백설희를 통해 노래가 되어 방방곡곡으로 울려 퍼져나갔다. 민족혼이 스며 있다는 평을 듣는 이 노래는 그후 이미자를 비롯 배호, 조용필, 나훈아, 한영애, 장사익 등이 불러 잊힐 만하면 어디선가 들려오는 불멸의 애창곡이 됐다.

손로원은 연희전문 문과를 나온 부잣집 아들로 일제 강점기가 끝나자 전국을 방랑하며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 손로원의 어머니는 남편을 여의고 고향 철원으로 가 적지 않은 농사를 지으면서 아들의 방랑벽이 수그러들기를 고대했다.

봄이 오면 시집 올 때 입고 왔던 연분홍 저고리와 치마를 고이 매만지며 아들이 장가들 때 다시 입을 것이라고 늘 유언처럼 말했다고 한다.

{작사가 정두수(1937~2016)의 증언으로 명확한 증빙이 되지 않은 기록이지만, 상당한 설득력이 있다고 칼럼리스트 이일영씨는 말한다. (예술혼을 위하여, 노래로 역사를 남긴 손로원에서)}

경상도 아가씨

그의 대표적인 곡들을 살펴보자. 부산역대화재가 일어나기 전년인 1953년 1월 30일 구정을 앞두고도 부산 국제시장에 대화재가 있었다. 1950년 5월 개장된 부산 국제시장은 6월 한국전쟁이 일어나 임시정부가 세워지면서 부산으로 피난민이 몰려 들었고, 미군이 진주하면서 군용물자와 온갖 상품이 부산항으로 들어 왔으나 국제시장의 대화재로 모든 점포가 불에 탔다. 

당시 반야월이 쓴 '울고 넘는 박달재'의 주인공 가수 박재홍(朴載弘, 1924~1989)은 전기기술자로 국제시장안에서 전기부품가게를 운영했었는데 그게 홀라당 타버렸다. 위로차 방문한 손로원은 우연히 동광동에서 중앙동을 잇는 영선 고개 사십 계단의 숫자를 헤아리며 있었다. "사십 계단 층층대에 앉아 우는 나그네"로 시작되는 '경상도 아가씨'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당시 이 노래는 전쟁 중에도 많은 음반이 팔려나가 대 히트를 기록, 이어 '물방아 도는 내력' 또한 손로원·박재홍의 작품이다.

2015년 8월14일 임시공휴일, 부산시가 해방70주년을 맞아 부산남항과 자갈치시장 그리고 광복로일대에서 해방귀국선 재현행사를 펼쳤다. 이날 구슬프게 불려진 노래 '귀국선'도 그의 나이 35세 때의 작품이다

'비내리는 호남선' 사연 

1956년 손로원이 작사, 박춘석 작곡, 손인호(孫仁鎬, 1927~2016)가 부른 '비 내리는 호남선'은 그야말로 대역작. 1955년 서울대 음대를 중퇴한 박단마그랜드쇼 단장을 맡고 있었던 작곡가 박춘석이 목포공연 때문에 호남선 기차를 타고 가다 음원을 구상했고 손로원에게 가사를 부탁, 1956년 손인호가 녹음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 사랑이란 이런가요 비나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로 시작되는 비내리는 호남선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해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유력한 야당 후보 신익희(申翼熙. 1894~1956)가 5월5일 호남지방 유세를 위하여 전주로 가던 열차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당일 오후 4시 무렵, 신익희의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하면서 구름처럼 모여든 군중들이 유해를 경무대 방향으로 가져가려 시도하면서 경찰과 충돌해 10여 명의 사상자와 함께 많은 시민이 체포됐다. 이때 시민과 청년들이 부른 '비 내리는 호남선'은 열창으로 그 열기가 실로 엄청났음을 당시의 기록들은 전하고 있다.  

시대 상황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노래 "비 내리는 호남선"은 노랫말에 담긴 감성탓에 뒷 얘기들이 꼬리를 물었다. 더구나 당시 28세였던 가수 손인호는 얼굴 없던 가수로 소문이 더욱 크게 번졌다. 결국 손인호와 작곡가 박춘석은 물론 손로원까지 당국에 불려가 심한 조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노래는 추모의 슬픔과 함께 민초의 열망을 담은 노래로 더욱 많이 불리면서 시대 상황을 반영한 가요의 역할을 절감하는 계기가 됐다.

이국적 정취의 노랫말, 모두  

부산과의 처연한 인연 속에 주옥같은 노랫말을 탄생시킨 손로원은 당시 부산 단칸방에 세계 지도를 붙여 놓고 특별한 노랫말을 연이어 만들었다. 1952년 가수 현인이 부른 인도의 향불과 1953년 샌프란시스코와 페르시아 왕자를 연이어 내놓았다. 그 다음해 홍콩 아가씨, 아메리카 차이나타운과 같은 이국적인 정취의 노랫말을 담은 가사들을 쏟아놓았다. 이는 한국전쟁 이후 외국에 대한 동경이 깊어진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는 총 3000여 곡을 만들었다. 5천여 곡을 만든 반야월과 작곡가 박시춘, 가수 이난영은 가요계 3보(三寶)로 꼽히는데 손로원 또한 그 대열에 진열을 해 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듯하다. 작사가에 대한 저작권이 있을 턱이 없던 그 당시 그는 항상 가난했다. 

용두산 판자촌에서 동네 꼬마들에게 고무신대장, 막걸리대장으로 불리던 그는 1973년 12월 부산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6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주옥과 같은 노랫말을 통해 시대의 애환과 정신을 전하고 욕심이 없는 방랑의 예술가로 살다 갔다.

짙은 사연이 감성을 울렸고 그래서 나온 시구절에, 영혼의 달램과 위로를 주기에 충분한 음률이 입혀진 시노래들. 거기에 그 시대 민초들의 마음을 대변해 줄 수 있는 주제와 단어들이 진주목걸이처럼 알알이 꿰어 있는 노래들. 노래가 된 시의 깊은 사연을 통해 안온함과 때론 애잔함을 주는 그 시절 그 노래들로 봄날 카타르시스의 길을 찾아가 보자. 

이상철 위드컨설팅 회장/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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