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르노코리아가 새롭게 꺼내 든 플래그십 크로스오버 '필랑트(FILANTE)'는 단순한 신차가 아니다. 이 차는 지금 한국 자동차시장을 향해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과연 한국 소비자가 원하는 플래그십은 무엇인가?"
SUV 일변도로 흘러온 시장 흐름 속에서 필랑트는 세단과 SUV 사이의 경계를 다시 그리려 한다. 크기 경쟁도, 마력 경쟁도 아니다. 르노는 하이브리드를 단순한 연비 기술이 아닌 프리미엄 기술로 재정의하고 △정숙성 △공간 △디지털 경험을 하나의 완성도로 묶는 전략을 선택했다.
SDV(Software Defined Vehicle)로의 전환, AI 기반 인포테인먼트, 기본 사양으로 끌어올린 안전·편의 기술까지. 필랑트는 스펙보다 경험을, 숫자보다 체감을 앞세운다. 이 도전이 시장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 르노코리아의 새로운 시험대가 지금 출발선에 섰다.

르노코리아가 필랑트를 통해 가장 먼저 건드린 지점은 차급이다. 길이 4915㎜, 너비 1890㎜, 높이 1635㎜의 차체는 수치상으로는 준대형 세단급에 가깝지만, 필랑트는 어느 한쪽에도 명확히 속하지 않는다.
낮아진 전고와 쿠페형 루프라인, 공기역학을 고려한 급경사의 리어 윈도우는 전형적인 SUV의 체급 논리에서 벗어나 있다. 이는 세단의 안정감과 SUV의 활용성을 단순히 결합하는 수준을 넘어 '플래그십은 반드시 크고 높아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크로스오버라는 장르를 형식이 아닌 실질로 구현하겠다는 의지가 차체 비율 전반에 반영돼 있다.
전면부의 일루미네이티드 로장주 로고와 그릴 라이팅은 이런 전략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단순 장식이 아닌 경험 요소로 끌어올렸고, 시동 온·오프 시 연출되는 웰컴·굿바이 라이팅 애니메이션은 필랑트를 이동수단이 아닌 '사용자 경험 중심의 플래그십'으로 규정한다.
후면으로 갈수록 날렵해지는 실루엣과 플로팅 리어 스포일러 역시 존재감을 과시하기보다는, 절제된 방식으로 플래그십의 무게감을 전달한다. 필랑트의 디자인은 크기보다 완성도와 균형을 선택한 결과물에 가깝다.

필랑트 실내는 르노가 제시하는 플래그십의 해답이 보다 분명해지는 공간이다. 핵심은 '더 크다'가 아니라 '더 잘 설계됐다'는 점이다. 2820㎜의 휠베이스를 바탕으로 뒷좌석 무릎 공간 320㎜, 헤드룸 최대 886㎜를 확보했고, 트렁크 역시 기본 633ℓ에서 최대 2050ℓ까지 확장된다.
전 트림에 적용된 친환경 나파 인조 가죽과 헤드레스트 일체형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 시트는 필랑트가 추구하는 방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 액티브 노이즈 캔슬레이션(ANC)을 전 트림 기본으로 적용한 점은 의미가 크다. 정숙성을 옵션이 아닌 기본 전제로 설정하며, 플래그십의 기준을 주행 감각과 체감 품질로 옮겼다.
알카미스 사운드 시스템 기본 제공, 선택사양으로 보스(BOSE) 서라운드 시스템을 마련한 구성 역시 같은 맥락이다. 소음 억제와 음향 품질을 함께 끌어올리며 ‘테크 라운지’라는 콘셉트를 감각적으로 완성한다.
필랑트에 적용된 하이브리드 E-Tech 파워트레인은 성능 경쟁보다는 성격 규정에 가깝다. 1.5ℓ 터보 직분사 엔진과 듀얼 모터 조합으로 시스템 최고출력 250마력, 엔진 최대토크 25.5㎏·m를 확보했고, 복합연비는 15.1㎞/ℓ다.
하지만 이 수치가 말해주는 핵심은 고성능이 아니라 전동화 체감과 정숙성의 균형이다. 1.64㎾h 리튬이온 배터리를 통해 도심 주행의 최대 75%를 전기 모드로 소화하며, 하이브리드를 연비 중심 기술이 아닌 프리미엄 주행 감각의 일부로 끌어올렸다.

주파수 감응형 댐퍼(SFD)는 이런 성격을 더욱 분명히 한다. 도심에서는 부드러움을, 고속 주행에서는 안정감을 강화하며 필랑트가 스포츠보다는 고급 이동 경험에 초점을 맞췄음을 드러낸다.
르노가 강조해온 '휴먼 퍼스트(Human First)' 철학은 필랑트에서 구호가 아닌 시스템으로 구현됐다. 최대 34개의 첨단 주행 보조 기능을 전 트림 기본 적용한 점이 이를 상징한다.
긴급 조향 보조(ESA), 레이더 기반 후석 승객 알림 기능은 사고 예방을 넘어 사용자 보호의 범위를 차량 사용 이후까지 확장한다. 여기에 차체의 18%를 초고강도 핫 프레스 포밍(HPF) 구조로 구성하며,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도 플래그십의 기본기를 강화했다.
레벨 2 수준의 주행 보조 기능을 기본화한 전략은 선택사양 경쟁보다 신뢰도 중심의 상품성을 택한 결과다.
12.3인치 스크린 3개로 구성된 openR 파노라마 스크린은 필랑트가 지향하는 미래를 상징한다. AI 기반 음성 어시스턴트 에이닷 오토를 중심으로, 차량은 더 이상 버튼 중심의 기계가 아니라 대화형 디지털 플랫폼으로 진화한다.

주행 패턴 분석, 목적지 추천, 공조·차량 기능 제어까지 아우르는 구조는 필랑트를 SDV 전환 흐름 위에 올려놓는다. FOTA(Firmware Over The Air)를 통해 제어 유닛의 85%를 원격 업데이트할 수 있다는 점 역시, 필랑트가 출시 순간이 아닌 사용 기간 전체를 고려해 설계된 차량임을 보여준다.
필랑트의 국내 판매가격은 △테크노 4331만9000원 △아이코닉 4696만9000원 △에스프리 알핀 4971만9000원부터 시작한다(친환경차 세제 혜택 기준). 한정판 에스프리 알핀 1955는 5218만9000원이다.
절대적으로 저렴하다고 보긴 어렵지만, 기본 사양의 밀도와 구성 방식을 고려하면 옵션 선택 부담을 줄인 플래그십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 R:assure 프리미엄 케어 솔루션, 중고차 잔가 보장, 원격 진단 서비스까지 더하며 구매 이후의 경험까지 하나의 패키지로 묶었다.
니콜라 파리 르노코리아 사장은 "르노 필랑트는 혁신을 거듭해 온 르노의 기술적 플래그십과 휴먼 퍼스트 철학이 집약된 획기적이고도 대담한 크로스오버 차량이다"라며 "한국 소비자들의 높은 기대 수준을 충족하는 동시에 글로벌시장에서 르노 브랜드의 프리미엄 가치를 한층 강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필랑트는 르노코리아가 오랜 시간 고민해온 방향성이 한 번에 드러난 모델이다. 체급 경쟁을 벌이기보다는 차급의 정의를 바꾸고, 성능 수치를 앞세우기보다 정숙성과 디지털 경험을 상품성의 중심에 놓았다. 하이브리드 역시 연비 보조 수단이 아니라 플래그십을 완성하는 핵심 기술로 다뤘다.
이 접근은 분명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SUV 시장에서 '더 크고 더 강한 차'를 기대해온 소비자에게 필랑트는 다소 절제된 선택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기본 사양 중심의 구성, 소프트웨어 확장성을 고려한 설계, 구매 이후까지 묶은 패키지 전략은 르노코리아가 이 모델을 단기 흥행용이 아닌 브랜드의 기준점으로 설정했음을 보여준다.
필랑트의 성패는 결국 판매량보다 해석에 달려 있다. 이 차가 시장에서 비싼 크로스오버로 기억될지, 아니면 플래그십의 기준을 한 단계 옮겨놓은 사례로 남을지. 르노코리아는 지금 그 판단을 소비자에게 넘겨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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