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번역가 조민영] 온라인 서점 홈페이지에 접속하니, 메인 화면에 ‘책아 미안해’라는 창이 뜬다. 좋은 책인데 판매량이 적어 널리 알리지 못한 책에, 그 책을 만든 편집자가 미안한 마음을 손편지로 전한다.
정성껏 쓴 손편지를 한장 한장 읽노라니 책을 만든 이의 애틋함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내게도 그런 책이 있어서다. 장마르크 로셰트의 그래픽노블 <늑대>다.
<늑대>는 내가 번역과 편집을 함께 한 책이라 특히 마음이 간다. 그런 만큼 더 많은 독자에게 가닿지 못한 점이 늘 아쉬웠다. 그래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이 자리를 빌려 이 책에 미안함을 전하려 한다.
<늑대> 저자 장마르크 로셰트는 봉준호 감독 영화 <설국열차> 원작 만화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다. 거칠고 굵은 선으로 시선을 압도하는 로셰트 작품에서는 설원이 중요한 배경이다. <설국열차>와 더불어 국내에 소개된 <엘프와드>와 <늑대> 모두 눈 덮인 땅을 무대로 한다.
그런데 로셰트가 묘사하는 설원은 잔인하고 무자비하다. <설국열차>에서 동토로 변한 지구는 인간이 살 수 없는 죽음의 땅이다. <엘프와드>는 해발고도 3954m 눈 덮인 고산에서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한 소년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편 <늑대>에서 설원은 문명과 자연이 충돌하는 공간이며, 인간과 늑대가 생존을 위해 싸우는 전쟁터다.
<늑대>의 주인공 가스파르는 프랑스 한 국립공원의 고지대 방목지에서 여름마다 양 떼를 지킨다. 어느 날 새끼 한 마리를 데리고 다니는 암늑대가 양 떼를 습격한다. 국립공원에서 늑대를 총으로 쏘는 건 불법이지만, 가스파르는 가차 없이 이 암늑대를 죽인다.
그 후 홀로 남겨진 새끼 늑대는 줄곧 가스파르 주변을 맴돈다. 어른이 되면 복수하겠다는 듯이. 그러나 가스파르는 그런 새끼 늑대에게 사냥한 산양 고기를 나눠준다. 어미에게 진 빚을 갚겠다는 듯이. 덕분에 새끼 늑대는 혹독한 겨울을 나고 살아남는다.
하지만 가스파르가 베푼 자비는 그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간다. 어른이 된 새끼 늑대가 강인한 턱과 이빨로 가스파르의 양 떼를 공격한다. 양 300마리 중 일부는 늑대가 물어 죽였지만, 안타깝게도 나머지는 공포에 못 이겨 스스로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한 마리도 남김없이.
이 살육 현장에서, 가스파르가 유일하게 의지하던 개 막스까지 희생되자 그는 이성을 잃는다. 그러면서 자신이 겪은 모든 상실을 늑대 탓으로 돌린다. 몇해 전 말리로 파병 갔다 죽은 아들도, 아들을 잃은 슬픔에 세상을 등진 아내도, 막스의 죽음도 모두 늑대 때문이라고.
이제 가스파르에게 남은 건 복수뿐이다. 하지만 그는 본성이 무자비한 사람은 아니다. 사냥 전리품을 독수리와 나눌 줄 알고, 그저 자연 순리에 따르며 살아온 인간이다. 늑대 역시 살아남기 위해 양 떼를 공격했을 뿐, 그것을 어미에 대한 복수로 보는 건 너무도 인간적인 해석이다.
결국 상실감에 눈이 먼 가스파르는 늑대를 쫓아 설원의 심연으로 들어선다. 그는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끝에, 마침내 늑대에 총을 쏜다. 그 순간 눈사태가 그를 덮친다.
가스파르가 쏜 총에 맞아 다리를 다친 늑대. 눈사태에 휩쓸려 다리가 부러진 가스파르. 이제 설원에는 강자도 약자도 없다. 오직 생존을 갈망하는 무력한 두 존재만 있을 뿐.
이렇게 자연이 연출한 극한 상황에서 둘의 선택은 엇갈린다. 극심한 피로와 절망감에 지친 가스파르는 복수도 삶도 포기한 채 늑대의 일격을 기다린다. 반면 늑대는 어디선가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산양의 살덩이를 물고 와 가스파르에게 내민다.
“그들은 피를 나눈 형제였다.”(94쪽)
자비 따위 허락되지 않는 설원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순수한 연대가 탄생하는 장면이다.
장마르크 로셰트는 인간과 늑대가 갈등하고 화해하는 장엄한 순간을, 순백의 설원과 대조적으로 투박하지만 강렬하게 묘사한다. 백 마디 말보다 그림 한 컷이 더 큰 울림을 주는 이유다.
아무쪼록 저자가 전하는 이 공존의 메아리가 더 많은 이에게 닿기를 바란다.
|번역가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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