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여인은 오후 5시 30분에 숨을 거뒀다. 며칠동안 우울함속에 한숨을 거듭 내쉬던 박목월(1915~1982)은 영혼의 시 한편을 쓴다.
◆ 박목월이 직접 밝힌 사연
청년시절 한 여인을 알았다. 그러나 십수년이 지나 그 여인을 다시 만난 건 1950년 말경, 대구에서였다. 처음에 너무 사무적으로 대한 것이 후회됐다.
그러나 다음해 봄, 우연히 다시 만났다. 여인은 하늘색 갑사 치마를 입고 있었고 작고 갸름한 얼굴에 햐얀 이가 다 보이도록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많이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으나 주소를 알길이 없었다. 그리고 세 번째 그녀를 만났다. 이번에도 우연히.
눈발이 날리고 화약냄새가 으스름 도시를 감싸는 대구시내 어느 모퉁이에서, 그녀는 전보다 더 수척해 보였다. 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으로 내게 다가왔다. "살아계셨군요, 걱정했어요. 저 지금 많이 안 좋은데, 혹여 제 병실에서 하룻밤만 같이 계셔 줄 수 있을지요?"
◆ 그녀는 결국 숨을 거뒀고, 운명이...
병실에는 개나리 꽃이 놓여 있었다. 그날 그녀는 개나리보다 더 생기가 있어 보였고 삶에 대한 열정이 불꽃처럼 타오르는 듯했다. 나는 그녀의 머리맡에서 밤을 밝혔다. 고르고 편한 그녀의 숨결을 조용히 지키며 밤을 지샌 것이다. 새벽은 찬란했다. 그리고 이 여인은 오후 5시30분에 숨을 거뒀다. 박시인은 자신의 수필집 '밤에 쓴 인생론'에 이렇게 밝혔다.
"6.25 사변 때의 극렬한 죽음의 시간 위에 아로 새긴 나의 사랑, 절망의 막다른 시간 속에 밤마다 나타난 인어 공주, 그것은 모든 것을 포기한 죽음의 시간 속에 획득한 생명의 찬란한 광채요, 장엄한 낙조다. 그러나 그것은 눈물 젖은 내 볼 위에서 승천해 버렸다. 그 이후 나는 새벽에 일어나 통곡하게 될 줄은 깨닫지 못했다" |
박 시인은 이 사건이 그의 삶을 바꿨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자기 인생에 소중한 이름 하나를 간직하지 못하는 헤프고 어리석은 자도 없을 것이다라며, 자세한 내용은 뒤로 감춘다.
◆ 제주밀월과는 2년차이
내용이 다소 추상적이긴 하나 이 여인의 죽음으로 새벽에 우는 일이 생겼다는 그는 곧바로 이별의 노래란 시를 적었다. 이 시가 1952년에 나온 것으로 보아 1955년 초봄, 제주도 여대생과의 이별이 이 시의 소재가 아니였음이 분명하다. (제주도 밀월내용은 전편에...)
이 글을 위해 수천 번을 검색한 결론은 언론인 이향숙씨가 취재한 게 맞다는 것이다. 그녀의 저서 '가곡의 고향'에 이렇게 적혀 있다.
"박 시인이 청년시절 대구금융조합에서 근무할 때 사무실에서 만나 3년여 간 연애를 했었고, 대구피난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다. 그녀가 임종한 시기는 1952년 4월말 경이였으며 이 해에 '이별의 노래'가 쓰여졌다"
또한 작곡가 김성태(1910~2012)는 이 노래를 작곡할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부산에서 대구의 박목월 시인을 만나러 갔다. 학(鶴)같은 박 시인을 보고 싶었다. 여름이었다. 박 시인은 '기다리고 있었소'하고 반가이 맞아주었다. 그리고 전할 것이 있다고 했다. 이별의 노래였다. 나는 시를 보고 무척 감동했고, 그날 밤 여관에서 작곡에 착수했다"
"분지인 대구의 더위는 살인적이었다. 모기장은 핑크빛이었고 종이가 모자라 담배를 싼 작은 은박지의 뒷면도 활용했는데 이런 것까지 기억나는 건, 이날 중요한 흔적이 내 마음속에남았다는 얘기겠지요"
◆고통을 느끼는 모든 것들과 별리
이렇게 나온 이별의 노래는 1952년말 동란 중 부산에서 대학생합창단과 군악대의 협연으로 처음 연주되었다. 서정성이 강한 '이별의 노래'는 선율이 곱고 호소력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겉으로는 사랑과 이별로 보이나 이 노래를 몇 번 되뇌이면 결코 그런 협의적 의미보다는 생과 사, 그리고 순간에 고통을 느끼는 모든 것들과의 별리라는 뜻이 담겨져 있는 듯하다.
김성태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일본에서 작곡을 공부했고,1955년 미국 인디애나 주립대 음대에서 작곡이론을 연구한 근현대사의 위인이기도 하다. 그는 서울대 음대학장과 서울교향악단 객원지휘자를 역임하기도 했다.
그의 대표적인 가곡작품으로는 △즐거운 우리집 △동심초 △못잊어 △산유화 △동요 잘자라 우리아가 등이 있다.
◆ 시대의 아픔은 가곡에
CBS사장을 역임하고 '가곡에세이'란 책을 집필한 이정식(1954~2024)선생의 얘기다. 가곡은 단지 노래가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찐한 마음이 서려있다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리운 금강산 △비목 △향수 △보리밭 같은 곡이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생, 한 시절의 현실이 깃든 이야기라는 걸 강조했다.
작곡가의 숨은 이야기, 가사에 얽힌 연인과의 이별, 무대에 가려진 가수들의 사연, 시대의 아픔이 담긴 곡의 탄생배경 등 읽다보면 가곡이 단지 옛 노래가 아니라 우리의 가정사와 감정사에 가깝게 닿아 있는 걸 느낀다.
이상철 위드컨설팅 회장/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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