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남자' 이준익 감독, 굳이 '숏폼 드라마'에 뛰어든 이유는… [MD인터뷰] (종합)

마이데일리
이준익 감독 / 레진스낵

[마이데일리 = 이승길 기자] "후배들이 '감독님은 (숏폼 드라마) 안 하시냐'고 종용하더라. 숏폼을 통한 연출 데뷔가 너무 마이너한 취급을 받으니, 이름 있는 사람이 한 번 길을 터주면 큰 힘이 될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도저히 피할 변명이 없었다. 그렇게 떠밀려서 시작했다."

'왕의 남자', '동주', '자산어보' 등을 연출하며 한국 영화계를 지탱해 온 거장 이준익 감독이 스크린이 아닌 스마트폰 세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최근 서울 성동구 키다리스튜디오 사옥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마주한 이 감독은 특유의 거침 없고, 소탈한 어투로 신작 '아버지의 집밥'을 선보이게 된 진짜 배경을 털어놓았다.

한국 영화계의 상징적 인물이 왜 굳이 2~3분 단위의 세로형 숏폼 드라마에 뛰어들었을까. 질문에 대해 돌아온 답은 명쾌하면서도 묵직했다. 영화계의 침체기 속에서 입봉 기회조차 얻지 못하고 주저앉는 후배 연출가들을 향한 책임감이었다.

"영화를 오래 하다 보니 오랜 시간 함께 일한 동료와 후배들이 참 많다. 그런데 제작되는 영화 편수가 줄어들며 갈수록 후배들이 입봉하기가 쉽지 않더라. 그런 와중에 숏폼이 상업 자본이 안정적으로 유입되는 독립된 하나의 생태계로 자리 잡는 걸 봤다. 독립영화에는 없는 상업 영화의 패러다임이었다. 이 정도면 기회가 막힌 신인 창작자들이 상업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통로가 되겠다는 생각에 과거 조감독, 연출부 친구들에게 도전을 권유하고 독려했다."

그 과정에서 후배들은 이준익 감독에게도 같은 길로의 동행을 요청했고, 이준익은 기꺼이 방패막이를 자처했다. 그는 "내 입장에서는 사실 불편하고 두려운 선택이었다. 잘 안되면 어쩌나 걱정도 됐고 작품의 질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면서도 "하지만 성공과 실패가 중요한 게 아니라 후배, 동료들과 함께 길을 여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이준익 감독 / 레진스낵

작품의 소재는 파격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더 파격적이다. 불륜, 복수, 폭력 등 극단적인 자극이 지배하는 숏폼 시장에서 그는 3대에 걸친 따뜻한 가족 드라마를 꺼내 들었다. 40년간 집밥만 찾던 가부장적인 아버지 하응(정진영)이 요리법을 잊은 아내 순애(이정은)를 대신해 부엌에 서는 이야기다.

"숏폼 작품들을 살펴보니 불륜이나 자극적인 소재가 많더라. OTT 역시 자극적인 콘텐츠를 쏟아내면서 온 가족이 함께 볼 수 있는 12세 관람가 드라마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시나리오가 없어서가 아니라 투자를 못 받아서 못 만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이런 가족 드라마가 아예 사라져야 하는가. 저비용으로 제작되는 숏폼이라면 이 이야기가 살아남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바람이 있었다. 다들 자극만 좇는 시대에 이런 무자극을 담아내는 작품이 없으니, 이렇게라도 관객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가 정의하는 '집밥'의 의미는 한 그릇의 식사 그 이상이다. "밥 한 끼는 참 흔하고 뻔하다. 그런데 그 뻔한 이야기가 얼마나 소중했으면 지난 수천 년 동안 이어질 수 있었겠나. 우리 작품은 바로 그 뻔함을 소중하게 여기자는 이야기다."

가로의 스크린에서 세로의 스마트폰으로 화면이 바뀌면서 연출 방식도 완전히 궤도를 달리했다. 시퀀스 하나가 길어야 2분 남짓, 한 회당 씬이 서너 개를 넘지 못하는 제약 속에서 호흡을 압축해야 했다. 하지만 세로 프레임은 배우들의 표정과 내면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뜻밖의 미덕을 선사했다. 변요한이 "지나가는 역할이라도 하겠다"며 자처해 합류했고, 정진영과 이정은의 깊은 내공은 물론 박지윤까지 화면 안에서 모든 인물이 주인공처럼 살아 숨 쉬었다.

'아버지의 집밥'은 숏폼으로 제작됐으나 완성도를 인정받아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초청에 이어 롯데시네마 극장 단독 개봉이라는 이례적인 성과까지 거뒀다. 오는 17일부터는 플랫폼 레진스낵을 통해 순차 공개된다.

"난 이 작품을 정진영의 나이대인 60대, 70대, 80대 시청자분들이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 가로이건 세로이건 자신들의 정서와 세대에 맞는 동시대 이야기를 마주할 때 시청자는 비로소 대접받는다는 느낌을 받으실 것 같다. 문화라는 것은 편중됨이 없어야 더 성숙해진다."

후배들의 닫힌 문을 열어주기 위해 기꺼이 낯선 판에 몸을 던진 이준익 감독. 뻔해서 더 소중한 밥 한 끼의 온기를 들고, 그가 개척한 세로 화면의 길은 한국 콘텐츠 생태계에 의미 있는 울림을 던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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