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26년 대한민국 4대 그룹의 시계가 하반기에 접어들었다. 이재용·최태원·정의선·구광모 회장은 상반기 인공지능과 반도체, 모빌리티, 에너지 등 미래 산업을 둘러싼 승부수를 잇달아 던지며 각자의 성장 방향을 선명히 했다. 마이데일리는 상반기 이들의 선택과 성과를 되짚고, 발표한 투자와 전략을 실제 생산·수주·실적으로 증명해야 할 하반기 승부처를 5회에 걸쳐 짚어본다.
[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반도체 명가’ 타이틀을 놓고 삼성그이 명예회복에 나섰다. 인공지능(AI) 시대 핵심 제품인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에서 한동안 주도권을 내줬던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HBM4 양산과 HBM4E 샘플 공급을 잇달아 시작하며 반격의 속도를 높였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천안 HBM 생산 기지를 직접 점검하고 상반기부터 이어진 투자 구상을 지난 7월 충남 아산에서 140조원 규모 충청권 첨단산업 투자계획으로 구체화했다.
상반기에 기술 경쟁력 회복의 실마리를 찾았다면 하반기는 이를 고객과 생산, 수익성으로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다. 메모리에서 되찾은 속도를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으로 확산하고 천안·온양 HBM 생산기지 투자를 실제 경쟁력으로 연결하는 것까지가 이재용식 반도체 명예회복의 완성이다. 하반기 들어 브로드컴과 향후 5년간 2000억달러 이상 규모의 반도체 협력을 추진하기로 한 것도 이 같은 전략이 고객 확보 단계로 넘어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 “마지막 기회”…이 회장 상반기 던진 화두 ‘경쟁력 회복’
이 회장이 연초 삼성에 던진 메시지는 낙관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지난 1월 임원들에게 “숫자가 좀 나아졌다고 자만할 때가 아니다”며 지금이 “경쟁력을 회복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강조했다. 지난해 내놨던 ‘사즉생’에 이어 올해는 단기 실적 개선보다 근본적인 기술 경쟁력 복원을 주문한 것이다. AI 중심 경영과 우수 인재 확보, 기업문화 혁신도 주요 과제로 제시했다.
당시 이 회장이 소환한 말은 고(故) 이건희 선대회장의 ‘샌드위치 위기론’이었다. 중국의 추격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기술패권 경쟁이 동시에 거세지는 상황에서 과거의 성공 방식만으로는 삼성의 지위를 지킬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재조명한 셈이다. 새해 첫 출근일인 1월2일에는 삼성전자 서초사옥에 주요 계열사 사장단을 불러 AI 전환과 반도체 사업 회복을 중심으로 새해 경영 구상을 공유하기도 했다.
이 회장의 올해 경영 출발점은 확장보다 회복에 방점이 찍혀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전선이 HBM이었다.
삼성전자는 전통적인 메모리 강자였지만 AI 시장이 급성장하는 과정에서 HBM 주도권을 SK하이닉스에 내줬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글로벌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가 57%로 1위였고 삼성전자는 22%에 그쳤다. 삼성전자가 HBM3와 HBM3E 시장 진입에서 경쟁사보다 늦어 대형 주문 확보에 불리했다는 평가도 뒤따랐다.
하지만 올해는 출발부터 달랐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세계 최초로 6세대 HBM인 HBM4 양산 출하를 시작했다. 자체 1c D램과 4나노 파운드리 공정으로 생산한 로직 베이스 다이를 결합한 제품이다. 삼성전자는 올해 HBM 매출이 전년보다 3배 이상 증가할 것으로 보고 생산능력 확대에도 나섰다.
속도는 더 빨라졌다. 당초 삼성전자는 HBM4E 샘플 출하 시기를 하반기로 제시했지만 일정을 앞당겨 5월29일 세계 최초로 HBM4E 12단 샘플을 글로벌 고객사에 공급했다. 핀당 동작속도는 최대 16Gbps로 HBM4보다 20% 이상 높였다. HBM4도 양산 약 4개월 만인 6월 누적 매출 10억달러를 돌파했다.
실적도 호응하기 시작했다. 삼성전자는 올해 1분기 연결 기준 매출 133조9000억원, 영업이익 57조2000억원으로 당시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기록했다. 2분기에는 매출 171조5000억원, 영업이익 89조5000억원으로 다시 기록을 갈아치웠다. 2분기 반도체를 담당하는 DS부문에서만 매출 127조5000억원, 영업이익 89조2000억원을 기록했다.
과거 HBM의 약점이 삼성 위기론의 근거였다면, 올해는 HBM이 반대로 ‘반도체 삼성’ 부활을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지표가 됐다는 평가다.
상반기 이 회장이 찾은 현장의 주요 키워드도 HBM이었다. 그는 지난 6월 23일 충남 천안사업장 C1·C2 라인을 찾아 생산계획과 기술개발 상황을 보고받았다. 이후 직접 방진복을 입고 HBM 패키지 생산라인을 둘러보며 생산과 품질 경쟁력을 점검했다.
천안은 삼성전자 HBM 후공정과 첨단 패키징을 담당하는 핵심 거점이다. HBM은 D램 자체의 성능뿐 아니라 여러 개의 D램을 쌓고 베이스 다이와 연결하는 패키징 기술이 성능과 전력효율을 좌우한다. 삼성은 메모리와 파운드리, 시스템LSI, 첨단 패키징을 모두 내부에 갖추고 있다는 점을 HBM4E의 경쟁력으로 내세우고 있다.
천안 방문은 이 회장의 투자 공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으로 해석됐다. AI 반도체 경쟁을 D램 단품의 싸움으로 보지 않고 ‘메모리+파운드리+첨단 패키징’ 하나의 솔루션으로 묶어 승부하겠다는 의지로 읽혔다.
이 회장의 상반기 행보는 국내 생산현장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지난 1월 이재명 대통령의 중국 국빈방문 경제사절단에 참여했고, 3월에는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발전고위급포럼(CDF)에 2년 연속 참석했다. 당시 행사에는 팀 쿡 애플 CEO를 비롯해 글로벌 주요 기업 경영자 80여명이 참석했다.
삼성 입장에서는 미국 중심으로 재편되는 첨단 반도체 공급망에 대응하면서도 거대한 생산·판매 시장인 중국과의 연결고리를 관리해야 한다. 실제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 테일러에 첨단 파운드리 생산기지를 구축하는 동시에 중국에서도 메모리 생산시설과 판매망을 운영하고 있다. 이 회장이 기술 패권 경쟁 속에서도 직접 글로벌 네트워크 관리에 나서는 배경이다.

◇ ‘아산 결단’…충청권 140조 투자해 AI 핵심부품 벨트로
상반기 기술 경쟁력 회복에 집중한 이 회장의 구상은 지난달 2일 충남 아산에서 대규모 투자계획으로 이어졌다. 삼성은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사업장에서 열린 ‘충청권 첨단산업 발전비전 국민보고회’에서 충청권에 약 14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투자 대상은 HBM과 차세대 디스플레이, 배터리, AI 서버용 패키지 기판 등 AI 시대 핵심 소재·부품이다.
단연 가장 많은 관심이 쏠린 곳은 반도체다. 삼성전자는 천안·온양에 56조원을 들여 최첨단 HBM 생산기반을 구축한다. 온양에는 HBM 팹 5개 라인을 투자하고 천안은 HBM 대응 설비 증설과 현대화에 나선다. 삼성디스플레이는 아산에 67조원을 투자해 스마트폰·IT뿐 아니라 XR·자동차·휴머노이드용 고부가가치 OLED 생산기지를 확대한다. 삼성SDI는 천안에 차세대 배터리 마더라인을 구축하고 삼성전기는 세종에서 AI 서버용 패키지 기판 설비와 R&D 투자를 늘린다.
아산 결단은 2655조원 규모 국내 투자 청사진 가운데 충청권 계획을 구체화한 것이다. 삼성은 평택과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등에 2030조원, 호남·충청·영남의 AI 반도체와 로봇·배터리·IT 소재부품에 625조원을 투자한다는 장기 구상을 세웠다. 이 가운데 충청을 HBM을 중심으로 한 AI 핵심부품 벨트로 만들겠다는 역할이 이 회장의 아산 행보를 통해 보다 선명해졌다.
이 회장은 당시 “AI 시대의 미래 성패는 AI를 구동하는 소재와 부품에 달려 있기 때문에 삼성의 미래와도 직결돼 있다”는 취지로 충청권 투자 의미를 설명했다. 수십년 전 논밭이었던 지역에 디스플레이와 반도체 기지를 세웠던 것처럼, 선제 투자로 다시 한 번 미래 산업의 생산기반을 먼저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하반기 들어 상반기 전략이 실제 고객 확보로 이어지는 장면도 나왔다. 삼성전자는 지난달 24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브로드컴과 차세대 AI 인프라 구축을 위한 전략적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양사는 2030년까지 5년간 메모리와 파운드리 분야에서 2000억달러 이상 규모의 협력을 추진한다.
중요한 건 협력 범위다. 삼성은 브로드컴의 AI 가속기에 HBM 등 첨단 메모리를 공급하고, 파운드리에서는 2나노 이하 첨단공정을 브로드컴의 차세대 통신용 반도체 등에 적용하기로 했다. 첨단 패키징까지 협력 대상에 들어갔다. 삼성전자가 강조해온 ‘메모리+파운드리+패키징’ 전략이 대형 고객과의 실제 사업으로 연결된 사례다.
이는 이재용식 투자 공식의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 메모리만 잘해서는 AI 반도체 시장 전체를 가져갈 수 없고, 파운드리만으로도 TSMC를 따라잡기 쉽지 않다. 대신 삼성만이 동시에 가진 메모리와 로직 생산, 패키징 역량을 한 고객에게 묶어 제공하는 ‘통합 반도체’가 차별화 카드가 되는 셈이다.

◇ HBM만으론 부족…파운드리가 명예회복 완성할 마지막 퍼즐
그럼에도 삼성전자가 ‘반도체 명가’의 타이틀을 다시 거머쥐었다고 선언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가장 큰 숙제인 파운드리가 남았다. 삼성전자는 2분기 HBM 베이스 다이와 미주 고객 수요 증가로 파운드리 실적이 개선됐다고 밝혔지만, 글로벌 시장에서 TSMC와의 격차를 좁혀야 하는 구조적인 과제는 여전하다.
미국 테일러 공장 역시 하반기 이후 이 회장의 성적표를 가를 핵심 변수다. 삼성은 올해 테일러 첫 번째 팹 가동에 들어가고 2027년 본격 양산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해 테슬라와 165억달러 규모 AI6 칩 생산 계약을 확보한 데 이어 추가 첨단공정 고객 확보를 추진하고 있다. 2나노 고객 논의가 확대될 경우 테일러 제2공장 건설 가능성도 검토 중이다.
완제품 사업의 수익성도 풀어야 한다. 삼성전자 DX부문은 2분기 매출 48조원을 기록했지만 부품 원가 상승 등의 영향으로 8000억원의 영업손실을 냈다. 반도체가 사상 최대 이익을 내는 동안 스마트폰과 가전 등 완제품의 수익성이 악화됐다는 점은 이 회장이 삼성 전체의 체질을 함께 끌어올려야 하는 이유다.
재계 관계자는 "이 회장이 말한 경쟁력 회복의 기준은 단기 실적이 아니"라며 "HBM에서 시작된 반격을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까지 이어가고, 아산에서 내놓은 투자 결단을 새로운 생산능력과 고객, 시장점유율로 바꾸는 것이 이 회장이 증명해야 할 ‘반도체 명가 삼성’의 명예회복의 조건"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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