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 무너지는 ‘기억’의 경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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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기기가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디지털 치매(dementia dementia)’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
IT기기가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디지털 치매(dementia dementia)’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

Memory is the treasury and guardian of all things.

(기억은 모든 것을 담아두는 보고이자 수호자다.)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기원전 106년)

시사위크=박설민 기자  그리스 신화에서 죽은 자는 5개의 저승의 강으로 간다. 이 중 네 번째 강의 이름은 ‘레테(Lethe)’. 일명 ‘망각의 강’이다. 저승의 강들을 거치며 정화된 영혼은 레테 강의 물을 마시고 모든 과거를 잊게 된다.

이처럼 기억과 망각은 여러 신화에서 중요하게 다뤄진, 인간의 삶과 가장 밀접한 개념이었다. 하지만 최근 그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디지털 사회가 시작되면서다. 특히 ‘인공지능(AI)’ 발전의 가속화는 기억력을 약화시키는 요인으로 새롭게 떠오르고 있다.

◇ 스마트폰과 AI, ‘디지털 치매’를 유발하다

“옛날엔 지도만 보고도 장거리 운전을 했는데 요샌 내비게이션을 보고도 길을 못찾아.”

얼마 전 대전 출장을 갔을 때 탑승한 택시에서 기사가 한 말이다.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인 택기사 A씨는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 사용한 이후, 근처 가까운 곳을 이동할 때도 의존도가 너무 높아 기억력이 나빠지는 것은 아닌가 우려가 된다는 말도 했다.

IT기기가 우리 생활 깊숙이 자리 잡으면서 ‘디지털 치매(dementia dementia)’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 내비게이션 등 디지털 기기 등에 익숙해지면서 기억력, 인지 능력, 사고력 등이 떨어지는 것을 빗댄 용어다.

AI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사고력 저하가 급격히 증가, 디지털 치매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챗GPT’ 등 AI챗봇의 사용은 학습 기억력 저하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근거도 있다. / Pixabay
AI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사고력 저하가 급격히 증가, 디지털 치매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챗GPT’ 등 AI챗봇의 사용은 학습 기억력 저하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근거도 있다. / Pixabay

특히 최근 디지털 치매 관련 우려가 커지는 것은 ‘AI’ 때문이다. AI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사고력 저하가 급격히 증가, 디지털 치매 증상이 악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챗GPT’ 등 AI챗봇의 사용은 학습 기억력 저하에 영향을 미친다는 과학적 근거도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연방대(UFRJ) 연구진이 지난해 발표한 연구다. UFRJ 연구진은 120명의 실험 참가자를 챗GPT를 사용한 학습 그룹과 AI없이 학습한 그룹으로 분류했다. 그 다음 예고 없이 45일 후 시험을 실시했다. 

그 결과, AI 사용군 중 장기기억이 유지된 그룹의 정답률은 57.5%였다. 반면 AI 비사용군 참가자의 정답률은 68.5%로 큰 차이를 보였다. 연구진은 ‘장기 기억(knowledge retention)’ 측면에서 두뇌의 AI 의존 현상이 발생, 기억력이 약화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UFRJ 연구팀은 “챗GPT를 사용한 학생들은 전통적 학습 방법을 사용한 학생들에 비해 시험에서 유의미하게 낮은 점수를 받았다”며 “AI의 무분별한 사용이 장기 기억을 저해하고 지속적 기억을 뒷받침하는 인지력을 감소시킨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했다.

◇ 젊은 세대에서 주로 유발… 디지털기기·AI 접근성 높은 이유

물론 실제 치매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일반적인 치매는 뇌 세포, 신경 등 기능 손상으로 발생한 신경퇴행성 질환이다. 반면 디지털 치매는 병리학적 의미의 치매는 아니다. 생활습관 및 인지 전략 변화, 외부 장치에 의한 기억 의존이 주 원인이다. 때문에 전문가들은 디지털 치매라는 표현보다는 ‘디지털 기억상실증(Digital Amnesia)’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한다.

또 다른 차이는 발생 연령대다. 디지털 치매는 젊은 층에서 자주 발생해 ‘젊은(Young)’과 ‘알츠하이머(Alzheimer)’를 결합한 ‘영츠하이머’라고 부르기도 한다. 디지털 기기, AI활용도가 고령층보다 높기 때문이다. 

실제로 2024년 인도 크루파니디 보건대 연구팀은 청소년기, 젊은 성인의 과도한 디지털 기기 활용은 학업 성취도 저하 및 정신 건강 문제와 같은 부정적인 결과와 연관돼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다.

디지털 기억상실증은 뇌 손상과 연관이 거의 없는 만큼 디지털 기기, AI챗봇 활용에 대한 적절한 사용 습관 개선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성장기 청소년들의 경우 지나친 디지털 기기는 실제 뇌 발달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 /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
디지털 기억상실증은 뇌 손상과 연관이 거의 없는 만큼 디지털 기기, AI챗봇 활용에 대한 적절한 사용 습관 개선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성장기 청소년들의 경우 지나친 디지털 기기는 실제 뇌 발달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다. /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

◇ 실제 ‘치매’ 유발 우려도… 2060년 치매 환자 최대 6배 증가

전문가들은 디지털 기억상실증은 뇌 손상과 연관이 거의 없는 만큼 디지털 기기, AI챗봇 활용에 대한 적절한 사용 습관 개선으로 회복될 가능성이 높다고 평가한다. 다만 심각한 수준의 과사용의 경우 실제 뇌 손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캐나다 윌프리드 로리에 대학교(WLU) 연구팀이 2022년 발표한 결과다.

WLU 연구진은 인간과 동물을 대상으로 한 생물심리사회 연구결과 데이터들을 종합 분석했다. 그 결과, 만성적 감각 자극이 뇌 발달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확인했다. 이때 만성적 감각 자극은 지속적이고 무의미한 자극을 뇌에 가하는 것이다. 디지털 기기를 통한 과도한 스크린의 노출, AI챗봇 과이용 등이 여기에 속한다.

특히 우려가 큰 것은 성장기 청소년들이다. 뇌 발달 과정에서의 과도한 만성적 감각 자극은 ‘조기 치매’를 부를 수도 있다는 게 연구진의 설명이다. 그러면서 1980년 이후 출생한 밀레니얼 세대, 현재의 Z세대에서 2060년 이후 알츠하이머 등 치매 발생률이 기존 예측치의 4~6배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WLU 연구진은 “뇌 발달 시기의 과도한 감각 자극 노출이 성인기 신경퇴행 위험을 높일 수 있다”며 “2060년부터 2100년까지 알츠하이머 및 관련 치매 발병률이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2배 증가 예상치를 훨씬 웃도는 4~6배에 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CDC의 예상치는 뇌 발달 중요 시기에 모바일 디지털 기술을 접할 기회가 없었던 1950년 이전 출생자의 연령, 성별, 인종 및 민족적 요인에만 전적으로 기반한 것”이라며 “이전 세대와 비교했을 때 현재 17~19세 청소년은 스마트폰, 태블릿, 노트북 등 모바일 디지털 기기 하루 평균 약 6시간 사용하는 반면, 1950년 이전 출생자는 같은 나이에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뇌 발달과 치매 환자 증가는 미래 사회 및 경제적으로 광범위한 고통을 초래하고 선진국의 이미 과부하된 의료 시스템을 완전히 붕괴시킬 것”이라며 “공공 교육, 사회 정책, 법률 및 의료 서비스에 대한 투자와 개입을 포함한 예방 조치를 즉시 시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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