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김두완 기자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 반도체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전기는 없어서는 안 될 기반이 됐다. 전력 공급이 끊기면 공장과 서버가 동시에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전력 부족보다 ‘전력 병목’ 문제가 더 크게 부각된다. 태양광과 풍력 설비 확대로 발전량은 늘었지만, 이를 필요한 곳으로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실제로 송전망 부족으로 발전을 멈추는 ‘출력 제한’이 이어지면서 전기가 남는 지역과 모자란 지역이 동시에 나타난다. 전기를 만들고도 쓰지 못하는 일이 쌓이면서, 전력망을 둘러싼 투자와 제도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 갈등·규제·한전 한계… 전력망 확충 막는 ‘3중 장벽’, 해결책은
23일 국회에서 열린 ‘에너지 대전환 시대 전력망 투자 어떻게 할 것인가’ 토론회에서는 전력망 문제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국가 과제로 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더불어민주당 박정 의원은 이날 토론회에서 “지금 국가의 최대 난제는 에너지, 특히 전력 문제”라며 “전기를 생산하는 것보다 이를 어떻게 보내고 확보할 것인가가 더 큰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이어 “전력 확보가 안 되면 산업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고 강조하며 전력망 확충을 국가 인프라 차원의 문제로 짚었다.
이런 문제의식은 현장의 상황과 맞닿아 있다. 현재 전력은 동해안과 호남 등 비수도권에서 생산되는 반면, 수요는 수도권과 경기 남부에 집중돼 있다. 전기를 만들어도 보내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일부 지역에서는 발전을 멈추고 다른 지역에서는 전력 부족을 우려하는 일이 동시에 벌어진다. 전력망이 병목이 되면서 ‘생산과 소비의 불균형’이 그대로 산업 리스크로 이어지는 셈이다.
그러나 ‘전력망 확충’은 단순한 설비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갈등과 제도 한계가 얽힌 복합 과제다. 대표적인 것이 주민 수용성이다. 송전선로 건설은 경관 훼손과 전자파 우려 등으로 지역 반발이 크고 한 번 갈등이 시작되면 장기간 이어진다. 실제로 밀양 송전탑 사태 이후 송전망 사업은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가가 나올 정도로 사업 기간이 길어지고 갈등 비용도 커졌다.
지자체 인허가 문제도 변수로 작용한다. 변전소나 송전망 구축 과정에서 지방자치단체가 인허가 권한을 행사하면서 사업이 장기간 지연되는 사례도 있었다. 실제로 일부 사업은 행정 갈등과 소송이 이어지며 당초 계획보다 수년 이상 늦어지기도 했다. 특정 지역의 반대가 국가 전체 전력망 계획에 영향을 미치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사업 추진의 불확실성도 커지고 있다. 여기에 군사시설 보호구역 규제까지 더해지면 접경지역 등 일부 입지는 개발 추진 자체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법적 측면에서도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접경지역에서의 에너지 인프라 구축은 ‘군사기지법’ 적용을 받아 군의 사전 협의가 필수적이며 그 기준 역시 명확히 정형화돼 있지 않다. 이로 인해 사업마다 판단이 달라지는 ‘개별 협의’ 방식이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포괄적 협약 체계나 표준화된 가이드라인, 나아가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보고 있다.
현행 ‘전기사업법’ 체계도 또 다른 한계로 꼽힌다. 송전과 판매가 사실상 한국전력에 집중된 구조에서는 민간의 유연한 참여가 어렵고, 대규모 투자를 빠르게 집행하기도 쉽지 않다. 이 때문에 분산에너지 제도를 활용해 특정 지역에서 전력의 직접 거래를 허용하거나, 산업단지와 연계한 전력 공급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제안도 나온다.
수도권 규제 역시 걸림돌이다. 파주와 연천 등 접경지역은 수도권이라는 이유로 각종 규제를 적용받고 있어 대규모 에너지 인프라 구축 시 별도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국가 차원의 전력망 사업임에도 지역 규제에 묶이는 상황이 반복되면서 제도 정비 필요성이 제기된다.
재원 문제는 더 큰 고민이다. 박정 의원에 따르면 송전망 구축에 필요한 자금은 약 116조원에 이르는 것으로 추산된다. 다만 이를 기존 방식으로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전력은 이미 재무 부담이 커진 상태로 채권 발행 확대나 전기요금 인상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많다. 실제로 한전채 발행이 늘어날수록 민간 자금이 공기업으로 쏠리면서 금융시장 왜곡이 발생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이 때문에 전력망 투자 재원을 둘러싼 해법도 크게 세 갈래로 나뉘고 있다. 우선 민간 자본을 활용하는 방식이다. 송전망 사업에 민간 투자를 허용해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자는 접근으로, 사업 속도를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공공 인프라의 성격이 강한 전력망을 민간에 맡길 경우 요금 인상이나 수익 중심 운영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함께 제기된다.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투자 모델도 대안으로 거론된다. 전력망 사업에 펀드 형태로 투자하고 수익을 공유하는 방식으로 과거 농어촌 전력망 구축 과정에서 주민 참여로 성과를 냈던 사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 방식은 재원 마련과 동시에 주민 수용성을 높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지만 투자 안정성과 수익 구조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지가 과제로 남는다.
기업과 개인의 자금을 활용하는 전기요금 선납제 역시 현실적인 방안으로 제시된다. 전기요금을 미리 납부하고 일정 수준의 혜택을 제공하는 구조로 전력 인프라 구축 자금을 선제적으로 확보하자는 취지다. 특히 기업 유보금 등 유동 자금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현 가능성이 거론되지만 현행 제도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법적 근거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전력망 문제는 이제 설비를 어디에 놓을지의 문제가 아니다. 사업을 가로막는 갈등을 어떻게 풀고, 필요한 자금을 어떻게 마련할지가 먼저다. 발전량을 늘리는 것보다 전기를 제때 보내는 일이 더 중요해진 상황에서, 민간과 국민, 기업 등 이해관계자 간 부담을 어떻게 나누고 역할을 어떻게 정할지도 핵심 쟁점으로 떠올랐다. 결국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AI와 데이터센터, 반도체 산업에 필요한 전력도 적시에 공급하기 어렵다. AI 시대, 전력망을 가진 쪽이 산업의 주도권을 쥘 수밖에 없다.
Copyright ⓒ 시사위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