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란 12.3’ 이명세 감독, 감각으로 남긴 ‘빛의 전사들’

시사위크
이명세 감독이 영화 ‘란 12.3’으로 돌아왔다. / 프로덕션 에므
이명세 감독이 영화 ‘란 12.3’으로 돌아왔다. / 프로덕션 에므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기존 다큐멘터리의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인터뷰도, 내레이션도 없다. 대신 이미지와 리듬, 사운드로 감각을 밀어붙인다. 이명세 감독의 ‘란 12.3’은 기록이 아닌 ‘체험’으로 설계된 영화다. 

출발은 하나의 이미지였다. 뉴스 화면 속 군인의 모습. 그 한 장면에서 비롯된 감각은 무성영화적 형식과 결합하며 영화의 구조로 확장됐다. 감독은 ‘새롭지 않다면 왜 하는가, 다르지 않다면 왜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다시 물었다. 

그 결과 ‘란 12.3’은 그날의 공기와 감정, 혼란과 긴장을 관객이 직접 겪게 만든다. 정치적 해석을 앞세우기보다 ‘그날’ 자체를 남기려는 태도 역시 분명하다. 최근 시사위크와 만난 이명세 감독은 그날,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낸 이들을 ‘빛의 전사들’이라 불렀다.

-기존 다큐멘터리 형식과는 완전히 다른 영화였다. 어떤 고민을 했나.

“영화를 만들기 전에 늘 항상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새롭지 않다면 왜 하지? 다르지 않다면 왜 하지?’ 흔히 말하는 흔히 말하는 썸띵 뉴(something new), 썸띵 디퍼런트( something different). 항상 그걸 스스로에게 묻는다. 젊은 후배들에게도 남들 다 하는 걸 왜 하냐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이명세는 이명세 영화를 만든다’는 평이 지금까지 내가 들은 평가 중 제일 기분이 좋은 말이다. 영화를 만들 때 늘 그 생각을 한다.”

-이 소재로 다큐멘터리 연출을 결심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를 감독한다는 것,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내 경우 이미지 하나가 확실히 잡혀야 한다. 그 이미지가 뉴스 화면 속 군인이었다. 공포스러웠다. 직감적으로 만약 내가 이 영화를 만든다면 저 한 장면만으로도 예고편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예술이라는 것은 시대의 어떤 연대기적인 기록이라기보다는, 모든 인간이 겪어야 하는, 꼭 한국 사람만이 아니라 희로애락의 감정만을 찍는 거라고 생각했다. 나 역시 엄혹한 시기를 살아왔기 때문에 그때마다 영화가 과연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자괴감도 들었다. 그 자괴감을 절실히 느꼈던 몇 년 전이 있었다. 분노가 있었고, 뭔가를 찍고 싶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킬러스’ 무성영화 편이다. 그나마 그걸로라도 표현하고 싶었던 거다. 어떤 면에서 ‘란 12.3’은 그 영화의 바이브라고 할 수 있다. 무성영화의 기법을 차용한 것도 그 연장이다.” 

-인터뷰와 내레이션을 배제한 이유는 무엇인가.

“첫 이미지는 군인의 모습이었고, 영화를 만들면서 그때그때 떠올랐던 것들이 있었다. 누아르는 무겁다. 그래서 ‘펑키 누아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영화를 만들기 전에 늘 하나씩 걸어놓는 것이 있다. ‘M’을 만들 때는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공포영화를 하겠다고 했다. 이번 다큐라면 내레이션과 인터뷰 없는 것을 하겠다고 정했다. 그냥 숙제처럼 던져놓는 거다. 그렇다면 그걸 대신 할 수 있는 게 뭘까.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 속에서 무성영화가 영화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미지로 사유하는 것이다. 또한 무성영화의 자막은 단순한 설명의 자막이 아니라 이미지다. 해외영화를 보면 알겠지만, 똑같은 영화인데 말로 듣는 것보다 읽을 때 감정이 온다. 그 읽는 감정의 느낌을 전달하고자 했다. 잘 보면 무성영화 기법들이 있다. 글씨가 커지거나 글씨를 움직이게 했다. 거기에 음악도 맞춰서, 이야기하듯 커지고 작아지게 만들었다. 조성우 음악감독에게 ‘음악이 감정이고, 음악이 대사’라고 이야기했다. ‘뭐요? 뭐라고요?’ 이런 식의 반응이 있었다.(웃음) 그렇게 음악을 조절했다.”

이명세 감독이 연출 계기를 밝혔다. / NEW
이명세 감독이 연출 계기를 밝혔다. / NEW

-어떤 어려움과 고민이 있었나.

“소재가 소재인 만큼 많은 아티스트가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려서 읽은 글 중에 잉그마르 베리히만 감독이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한 것이 있는데, 하나의 상징적인 사탑이 재해로 무너졌을 때 어디서 온지 모르는 광대, 어떤 사람들, 목수, 예술가, 시인들이 나타나서 그 사탑을 다시 짓고 사라졌다고 하더라. 그것이 예술이고, 거기에 참여하는 것이 예술가의 일이라는 걸 감동적으로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 많은 아티스트를 참여시키고 싶었다. 글자 하나든 무엇의 역할이든, 내가 해오던 팀들과 음악은 당연히 조성우가 하는 것이고, 나머지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작진이 현실적으로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돈을 주고 일을 시켜야 한다고 하더라. 그래서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됐다. 기꺼이 참여해 준 작가나 애니메이터 팀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결국 우리가 직접 만들어야 했다. 편집팀이 대부분을 만들어서 끝까지 갔고, 수정도 계속 이어졌다. 꼼꼼히 봤다고 생각했는데도 놓친 부분들이 있어서 계속 작업을 했다.”

-그날의 감각과 경험을 영화적으로 어떻게 풀어내고자 했나.

“프레임 디자인이 긴 장총 같은 이미지였다. 장총으로 둘러싸여 있는 느낌이다. 어떤 때는 액자 속에 가두듯 했고, 어떤 때는 열어두고, 그런 것조차 모두 디자인한 것이다. 그날 나는 여의도에 있지 않고 집에서 TV를 지켜봤지만, 여의도에 나갈 준비는 다 해두고 있었다. 집사람이 빨리 나가라고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보면서 망설였다. 사실은 두려워서였을 수도 있다. 그 부끄러움으로 TV를 지켜봤는데, 그 시간에 100만 명이 동시접속자 수로 여러 채널을 왔다 갔다 하며 보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다. 그 많은 사람들이 그 밤을 함께 지키고 있었다.  

‘트와일라잇’ 같은 TV 프로그램의 괴상한 음악, 실험적으로 시작되는 영화의 오프닝처럼 ‘여러분은 지금 새로운 차원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꿈과 현실…’ 그런 감각을 전달하고 싶었다. 계엄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도 시사회가 끝나고 뒤풀이 가던 길, 밤 11시쯤이었다. 몇 통의 전화를 받고 계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당황, 당혹감, 이게 뭐지, 설마 하는 순간들, 꿈과 현실을 오갔던 느낌들을 지켜보며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시민들의 제보 영상과 사연을 받았을 때, 나만 이런 감정을 느낀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그 느낌을 온전히 담고 싶었다. 어떤 것은 다큐멘터리 그대로의 실사 현장 느낌으로, 어떤 것은 당혹감과 꿈과 현실이 교차하는 감각을 담았다. 두 가지를 같이 녹여낸 것이다. 한 개인의 체험이지만 모든 사람의 경험으로 확장하고자 했다.” 

-오프닝부터 웃음이 터져 나왔고 광주의 모습들에서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톤 설정에 있어 어떤 고민을 했나.

“‘트와일라잇 존’처럼 오프닝을 만들기 위해 몇 달 동안 작업했다. CG팀에도 연락했지만 비용이 너무 비쌌고, 무료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은 도움을 받았다.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꿈 같은 장면을 만들어내기 위해 몇 달 동안 편집을 반복하며 여러 방식으로 시도했다. 그러다 다큐멘터리라는 틀을 벗어나지 말자는 생각을 했다. 그날 있었던 일들, 나중에 정리하면서도 빠지지 말아야 할 것들, 결국 ‘계엄 선포’라는 하나의 사건으로 이 감정을 담아낼 수 없을까 고민했다. 본격적인 편집을 시작하기 전 한강 작가가 노벨상 수상 당시 했던 말도 떠올랐다. 광주에 가서 어떤 의식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고, 필요한 장면이 있다면 촬영까지 해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다. 그때 ‘인정사정 볼 것 없다’를 광주극장에서 상영하게 되면서 GV 참석을 겸해 광주에 가게 됐다.

광주극장은 90년 된 극장이다. 민족 자본으로 지어진 극장이고, 과거에는 김구 선생이 모여 회합을 하기도 했던 장소라고 들었다. 그렇게 역사가 깊은 공간이었다. 옛 극장들은 막이 열리고 닫히는 느낌이 좋다. 새로운 공간이 열리는 감각인데, 요즘은 그런 경험을 하기 어렵다. 종소리와 함께 막이 열리고 불이 꺼질 때의 그 감각을 영화 안으로 가져오고 싶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극장의 공간으로 가져가자는 생각을 했다. 관객이 영화를 보고 있지만, 동시에 영화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영화적 공간이 되는 것, 현실이면서도 또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느낌. 아무리 사실적인 공간이라도 그런 감각을 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여기에 옛 무성영화처럼 연주를 맞추는 오케스트라 같은 요소가 함께한다면, 몇 달 동안 실험적으로 시도했던 것들을 한 장면으로 단순하게 전달할 수 있겠다고 봤다. 그게 오프닝 장면이 됐다. 여러 요소가 얽혀 만들어진 결과다. 광주극장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막이 열리고 닫히는 이미지가 그 순간에 잘 맞았고, 그렇게 연결되면서 첫 장면이 완성됐다.”

많은 이들의 제보 영상으로 완성된 ‘란 12.3’. / NEW
많은 이들의 제보 영상으로 완성된 ‘란 12.3’. / NEW

-자료를 모으는 과정은 어땠나.

“제보 영상은 자발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보내줘서 어렵지 않았다. 유튜브 쪽에서도 많이 도와줬고, 사연을 모으는 과정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오히려 푸티지를 보고 정리하는 작업이 더 중요했다. 두 명의 편집자가 매달렸고, 한 명은 전체를 나누는 역할을 맡았다. 공장처럼 파트를 나눠서 각자 맡은 부분을 보고 묶는 방식으로 작업했다. 계엄 해제 가결안을 들고 국회를 뛰는 비서관 장면은 따로 촬영한 것이다. 사실에 기반해 구성했다.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고 불이 켜져 있는 상황, 손톱과 관련된 것도 보좌관의 사연이다. 이 중 일부는 특정 보좌관의 확실한 사연이지만, 다른 것들은 여러 사연을 하나로 묶어 만든 거다. 전철을 타고 달려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 역시 막차를 타고 이동했던 한 사람의 사연을 중심으로 여러 이야기를 녹여낸 거다. 일상의 익숙한 풍경이 갑자기 깨지는 분위기를 담고 싶었다. 현실 공간을 그대로 촬영하는 방식으로는 구현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아예 그림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실제 같은 그림과 애니메이션을 팝아트적인 방식으로 표현했다.” 

-푸티지를 영화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 어떤 연출 원칙을 세웠나.

“네 가지 편집 원칙을 세웠다. 시네마틱·이모셔널·드라마틱, 그리고 유머다. 그 원칙 안에서 푸티지들을 다뤘다. 요즘은 세로 화면으로 찍힌 영상이 많은데, 그것을 어떻게 시네마틱하게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장면에서는 실제로 시선이 올라가는 것처럼 화면을 회전시키며 바깥으로 나가는 방식도 활용했다. 영화감독으로서 영화적인 감각, 즉 관객이 ‘영화를 보고 있다’는 느낌을 유지하면서 감정을 전달하려 했다. 사운드도 중요하게 다뤘다. 녹음과 믹싱 과정에서 가슴이 울릴 정도의 진동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현장 소리는 일부러 다듬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대사가 잘 들리도록 정리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봤다.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이미지와 자막으로 보완하고, 대신 현장의 생생한 소리를 살렸다. 헬기 소리도 공포를 느낄 정도로 강하게 넣었다. 사운드가 좋은 극장에서 보면 서라운드의 느낌과 음악, 현장의 감정이 그대로 전달되도록 의도했다. 사운드 역시 그런 방향으로 설계한 것이다.”

-아날로그와 기술, 그리고 실제 기록을 사용한 방식에 대해서는 어떤 고민이 있었나.

“‘첫사랑’을 만들 때는 내가 아날로그의 전사가 되겠다고 일기장에 써놓기도 했다. 그런데 컴퓨터 그래픽이 등장하면 또 그것을 차용하게 된다. AI에 대해서도 처음에는 불편한 감정이 있었다. 그런데 가성비가 좋은 CG라면 쓰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나 싶었다. 다만 광주와 관련된 몇몇 장면들은 푸티지를 구하기가 매우 어려웠고, 비용도 높았지만 AI를 사용하진 않았다. 모두 실제 광주의 장면들이다. 그 과정에서 함께 작업했던 고(故) 유영길 촬영감독이 떠올랐다. 오랜 시간 같이 작업해 온, 내가 사랑하는 촬영감독이다. 1980년대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했지만, 그 시절에는 그분이 겪은 이야기를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 방독면을 쓰고 다니며 최루가스를 겪은 후유증으로 눈가를 자주 긁는 습관이 있었는데, 그 이유조차 당시에는 말하기 어려운 시대였다. CBS 종군기자로 참여했던 사실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시기였다. 이번 영화에서 그분의 시선과 기록을 어떻게든 담아내고 싶었다. 그분이 남긴 광주의 장면들을 작은 마음으로라도 담아내고자 했다. 결국 CBS 등과 연락해 푸티지를 구하게 됐다.”

-특정한 방향으로 읽히지 않기 위한 고민도 많았을 것 같은데.

“이 영화에는 그 역사적인 순간이 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다. 그 의미가 다른 것으로 희석되지 않았으면 했다. 절대 희화화하지 않겠다는 기준을 세웠다.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것이 내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정치권 인물이 아니라, 영화를 해온 사람으로서 어떤 것을 판단하거나 단정하기보다 있는 그대로를 가장 영화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다.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이 그날을 직접 겪지 않았더라도, 외국인의 시선에서도 직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지 계속 고민했다. 편집기사들에게도 ‘이게 직관적으로 이해되느냐’고 묻기도 했다. 그런 기준 속에서 장면들을 구성했다.”

-감독에게 ‘빛의 혁명’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나.

“촛불혁명이라고도 하지만,  ‘빛의 전사들’이라고 불렀다. 국회로 모여달라는 요청이 있었을 때, 마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속 우형사에서처럼 부르는 순간 달려가는 느낌이 있었다. 호루라기 소리에 반응하듯 사람들이 모여드는 감각이었다. 이전의 촛불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형광봉 같은 다양한 불빛들이 있었고, 울면서도 춤을 추는 듯한 느낌이 묘했다. 그 순간 ‘이건 이기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흔히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고 하지 않나. 싸운다기보다 그 자리에서 젊은 사람들이 노래하고, 엄숙한 분위기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에너지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 같은 결이 아니라 ‘다시 만난 세계’나 ‘아파트’ 같은 노래가 울려 퍼지는 분위기였고, 그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빛의 전사들’이라고 표현했다. 많은 사람들이 비슷하게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말 그대로 ‘빛의 혁명’이라고 본다. 간디가 비폭력 불복종으로 시대를 바꾼 것처럼, 이 역시 세계가 주목해야 할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이 경험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공유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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