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치마에 흰 저고리, 이런 모습 보기 드물고
신선이 없다면 누구와 함께 돌아가랴
몸가짐은 당당하고 모습은 고아하며
정신은 빼어나고 깃털은 매우 섬세하도다”
裳玄衣縞見來稀.
不有神仙誰與歸.
擧止䀚藏形貌古.
精神秀發羽毛微.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시고(牧隱詩藁) 권22, 詠鶴>-
시사위크|철원군=박설민·김두완 기자 ‘영물(靈物)’이라는 말이 있다. 영험한 기운과 능력을 가진 생물이라는 뜻이다. 호랑이와 소나무, 거대한 구렁이 등 여러 동물과 식물이 영물로 불린다. 그중 영물로 불리는 ‘새(鳥)’들 중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동물은 단연 ‘학(鶴)’, 일명 ‘두루미’일 것이다.
동양에서 두루미는 새들의 왕이자 가장 아름다운 새로 여겨졌다. 쭉 뻗은 긴 다리, 하얗고 넓은 날개, 검은 꼬리, 우아한 긴 목은 전설 속의 ‘봉황’처럼 보인다. 아이를 점지해 주거나 신선의 조수, 천년을 장수하는 동물 등 여러 민간 신화와 전설에서 영물로 두루미가 자주 등장하는 이유일 것이다.
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생물은 전쟁과 환경오염 등 문제로 한때 한반도를 잠시 떠났다. 하지만 과학자들과 여러 봉사자들의 노력으로 학은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다. ‘시사위크 취재팀’은 강원도 철원에서 두루미 연구·보호 현장을 직접 찾았다.
◇ 흰 도포와 붉은 관을 쓴 신선을 만나다
꽃샘추위가 찾아온 3월 5일, 강원도 철원 민간인통제구역(DMZ) 인근 황량한 갈색빛 들판. 하늘에서 커다란 새 한 마리가 날아와 내려앉았다. 기다란 목과 커다란 날개는 눈처럼 하얗게 빛났다. 이와 대조적으로 작은 머리는 붉은색이었고 풍성한 검은색 꼬리 깃은 윤기가 흘렀다.
취재팀이 만난 이 아름다운 새의 이름은 ‘두루미’다. 우리에게 학으로 잘 알려진 새다. 외관상 모습은 가냘픈 다리와 긴 목 때문에 연약해 보인다. 하지만 국내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새로 생태계 상위 포식자에 속한다. 몸길이는 1.3~1.4m, 키는 1.5m다. 날개를 피면 길이가 2.2~2.5m다. 몸 무게는 5~12kg 정도다. 이처럼 큰 몸집을 이용해 솔개, 독수리와도 맞서 싸우기도 한다. 수명은 약 30~40년 정도다.
두루미의 주 먹이는 개천 주변의 양서류, 물고기, 곤충, 지렁이, 어패류 등이다. 하지만 사냥으로만 먹이를 섭취하는 완전 육식성 조류는 아니다. 식물성 먹이도 섭취하는 잡식성이다. 주로 벼, 옥수수, 밀 등 곡식류를 먹는다. 강원도 철원 등지의 논밭에서 두루미를 쉽게 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두루미류 총 15종으로 분류된다. 국내선 대표종인 두루미와 함께 △재두루미(Antigone vipio) △흑두루미(Grus monacha) △검은목두루미(Grus grus) △캐나다두루미(Antigone canadensis) △시베리아흰두루미(Leucogeranus leucogeranus) △쇠재두루미(Anthropoides virgo) 7종이 한반도에서 겨울철새로 서식한다.
5개 두루미종 중 한국에서 가장 많이 개체수가 관찰되는 것은 두루미와 재두루미다. 두 종 모두 러시아 아무르 습지와 몽골, 중국 북동부에서 4~5월 번식한다. 2개의 알을 낳아 약 한 달 간 품는다. 태어난 새끼는 3개월간 부모의 돌봄을 받고 첫 월동까지 가족 단위로 생활한다.
두루미들은 한국에는 매년 10월부터 다음 해 3월까지 방문해 월동한다. 남한 지역에서는 강원도 철원군을 포함한 동부 지역, 경기도 파주시, 판문점 일대인 중서부 지역, 강화도와 경기도 연천군 등지 등 민통선 근처에 많은 개체수가 월동한다. 또한 인천광역시 서구 연희동과 경서동 일원에서 월동하는 개체도 있다.
◇ 민족의 역사와 함께한 고귀함의 상징
두루미라는 말 자체가 한글로 학을 뜻한다. 울음소리가 ‘뚜루뚜루’하다는 것에서 유래됐다. 실제로 철원 평야에선 두루미들이 숨어 있어 모습을 보지 못해도 전화 벨소리같은 뚜루루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과거 우리 조상들은 선학(仙鶴), 단정학(丹頂鶴), 선금(仙禽), 노금(露禽), 태금(胎禽)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이 중 ‘단정학’은 혈관이 자잘한 돌기 모양으로 돋아나 붉은 색을 띄는 머리 모양을 빗댄 것이다. 때문에 두루미는 마치 희고 검은 비단으로 만든 도포를 입고 빨간 모자를 쓴 신선의 모습처럼 보인다.
두루미의 학명은 ‘Grus japonensis’이다. 1776년 독일의 생물학자 필리프 루트비히 스타티우스 뮐러(Philipp Ludwig Statius Müller)가 명명했다. 학명에는 ‘일본에서 왔다’는 뜻인 ‘자포니시스(japonensis)’가 담겼다. 당시 뮐러가 일본에서 두루미 샘플을 채집했기 때문이다. 두루미의 최대 서식지가 한국인 것을 생각하면 아쉬운 대목이다.
실제로 두루미는 우리 문화와 연관이 굉장히 깊은 새다. 대표적으로 불로장생을 뜻하는 ‘십장생’엔 두루미가 포함된다. 매해 신년이 되면 행운을 기리는 연하장에 두루미가 그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 또한 여러 공예품에 두루미 문양을 그려 넣기도 했다. 이는 출세와 복을 상징한다.
특히 신선의 상징으로 두루미는 구름과 함께 조화한 ‘운학문(雲鶴文)’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이는 통일신라시대 공예품에서부터 등장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문화유산으로는 국보 제68호로 등록된 ‘청자 상감운학문 매병(靑磁 象嵌雲鶴文 梅甁)’이 있다. 12세기경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진 이 청자는 상감 기법을 이용, 두루미를 아름답게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유종현 국가생태관광지연합회 철원두루미운영협의체 사무국장은 “두루미는 사실 현대 사회에서도 우리 일상 속에서 굉장히 익숙한 새”라며 “500원짜리 동전의 학이 두루미라는 사실을 잘 모르는 분들이 많다”고 말했다.
◇ 토양과 생태계 균형의 수호자 ‘두루미’
두루미는 생태학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섭금류(涉禽類, Shorebird, Wader)’라 불리는 종의 특성 때문이다. 섭금류는 갯벌과 논, 얕은 하천 등에서 긴 다리와 부리로 먹이를 찾는 새들이다. 두루미와 함께 저어새, 황새, 백로 등이 섭금류에 포함된다.
이때 섭금류들이 갖는 생태학적 가치는 크게 △습지 생태계 건강을 보여주는 지표종 △우산종(Umbrella species) △습지 먹이망 균형 유지 3가지로 요약된다. 쉽게 말해 두루미가 살아가는 하천과 들판의 자연 생태계는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며 어류, 곤충, 양서류 등의 개체수를 조절하는데 도움을 준다는 의미다.
실제로 두루미의 존재 자체가 지역 내 하천과 토양의 성분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킨다는 연구도 있다. 민경진 한국과학기술원(KAIST) 인류세연구센터 교수 연구팀이 2022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두루미가 활동하는 논에서는 토양의 탄소와 질소가 각각 17%, 19% 증가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두루미의 먹이 활동과 배설이 토양 유기물과 영양분 축적에 영향을 미친 결과다.
토양에서 질소와 탄소는 식물 생장과 생태계 유지에 필수적 영양소다. 질소는 엽록소의 합성, 단백질 생산의 역할을 한다. 탄소는 토양 내 유기물을 저장하고 미생물의 에너지원 역할을 한다. 우리가 농사를 위해 사용하는 비료에 질소와 탄소가 포함된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다. 즉, 두루미의 존재 자체가 일종의 ‘천연 비료’인 셈이다.
KAIST 연구진은 “겨울철 두루미의 활동은 토양의 총 탄소와 질소 함량을 유의미하게 증가시켰고 미생물의 생물량과 호흡량이 모두 더 많았다”며 “두루미 활동이 많은 토양에서 더 다양한 미생물 군집이 발견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본 연구 결과는 두루미 이동이 자원 환경과 미생물 군집을 변화시키는 독특한 생태계를 조성할 뿐만 아니라 농지의 생지화학적 과정에 두루미의 유익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더 많은 농민, 지방 정부 및 일반 대중이 논을 대상으로 하는 두루미 보호 캠페인에 참여하도록 장려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 멸종의 문턱 앞에선 두루미, 보호를 위한 노력
안타깝게도 아름답고 문화적 가치가 높은 새일 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루미는 현재 심각한 위기에 처한 상태다. 환경오염과 산지 및 농지, 하천의 개발로 서식지가 급감하면서다. 이로 인해 전 세계적인 멸종위기종으로 분류되고 있다.
‘세계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에 따르면 두루미와 재두루미는 모두 ‘취약(Vulneable:VU)’ 등급으로 분류된다. 이는 가까운 미래에 멸종위기 가능성이 매우 높음을 의미한다. 판다, 백상아리 등 대표적인 멸종취약종들에 부여되는 등급이다.
국내서는 기후에너지환경부에서 2012년 두루미와 재두루미를 각각 멸종위기 야생생물 1,2급으로 지정해 보호 중이다. 또한 1068년엔 국가유산청에서 천연기념물로 두 종을 지정하기도 했다.
두루미의 개체수가 크게 줄어든 이유는 ‘인간 활동’에 의한 것이 대부분이다. 1950년대엔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두루미의 주 서식지인 습지와 논밭이 파괴됐다. 이후에도 인간 접근에 의한 번식과 서식지 포기, 밀렵과 혼획, 농약 등으로 인한 폐사, 서식지 내 전선, 철조망 등 인공물 증가, 경작지 개발 등으로 두루미는 위협을 받았다.
이에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동북아 국가들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전문가들은 두루미 보전을 위한 국제적 협력을 지속하고 있다. 국내선 기후에너지환경부 연구기관을 중심으로 관련 지역 생태계 정기 조사를 매년 12월과 1월 시행 중이다. 특히 두루미의 핵심 서식지인 DMZ지역은 2~3개 구역으로 나눠 매년 1개 구역 4계절 조사 수행이 이뤄진다.
글로벌 협력으로는 ‘국제두루미재단(International Crane Foundation, ICF)’으로 두루미 보호활동이 이뤄진다. 1973년 설립된 국제두루미재단은 미국 위스콘신주에 본부를 두고 5개 대륙 50개국에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전문가들의 노력으로 국내 두루미 개체 수는 점차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국립생물자원관에 따르면 2017년 국내 두루미 월동 개체군은 1,147마리에서 2,939마리로 증가했다. 재두루미 역시 같은 기간 3,319마리에서 1만3,149마리로 월동 개체군 숫자가 회복세에 접어들었다.
개체 수 회복세를 보이곤 있으나 전문가들은 여전히 우려한다. 최근 ‘기후변화’가 가속화되면서다. 철원을 방문한 두루미는 논밭에 버려진 곡식들을 주 먹이로 겨울을 난다. 그런데 최근 기후변화로 여름철 폭우가 잦아졌다. 이로 인해 곡식 낱알이 썩어버려 두루미의 먹잇감이 사라진 것이다. 또한 겨울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그나마 남은 곡식 낱알들이 싹이 자라버리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국제두루미재단은 5일부터 7일까지 국립생태원과 ‘두루미 보전 전략 계획(2027–2036) 수립 워크숍’을 개최했다. 철원군과 철원군과 기후에너지환경부, 국립생물자원관, 두루미 보전단체 등이 참가한 이번 워크숍에서는 국가 차원의 두루미 보전과 실현 가능한 보전 목표 설정, 전략 수립 등이 논의됐다.
이기섭 한국물새네트워크 상임이사(박사)는 “두루미 보호를 경제적 가치만으로 판단한다면 반드시 지켜야 할 이유를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며 “하지만 우리가 문화재를 보존하듯 두루미 역시 보호해야 할 대상”이라고 말했다. 그는 “두루미를 하나의 보물로 본다면, 가장 아름다운 보석과 같은 존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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