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이호빈 기자] 한미약품이 신약·R&D 성과로 쌓아온 ‘명가’ 이미지가 흔들리고 있다. 전문경영인 체제를 내세워 경영권 분쟁을 정리하겠다던 약속은 1년여 만에 빛이 바랐고, 대주주의 경영 개입 논란이 전면에 부상하면서 회사의 얼굴은 ‘연구’가 아니라 ‘지배구조 리스크’로 바뀌었다.
24일 제약바이오업계에 따르면 한미약품을 둘러싼 최근 논란은 사내 성추행 의혹 처리 과정에서 시작됐다. 팔탄공장 고위 임원의 성 비위 의혹이 공익 신고로 접수된 이후, 회사가 해당 임원을 징계 대신 ‘자진 퇴사’ 형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파장이 커졌다.
이후 피해자 보호 조치의 적절성과 사건 대응의 투명성을 둘러싼 문제 제기가 이어졌고, 징계 여부를 두고 대주주와 대표이사 간 입장 차이가 드러나며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박재현 한미약품 대표는 해당 임원 징계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한미사이언스 최대주주)의 압박이 있었다고 주장하며 면담 녹취를 공개했다.
녹취에는 신동국 회장이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을 두둔하는 취지의 발언을 하고, 징계 필요성에 제동을 거는 대화가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신 회장 측은 "사실관계에 잘못된 부분이 있다"며 별도의 입장을 밝히겠다는 뜻을 전한 상태다.
사태는 개인 간 갈등을 넘어 조직 전반으로 확산됐다. 일부 임원진은 성명서를 통해 대주주의 사과와 경영 간섭 중단을 요구했고, 본사 로비에서는 사퇴를 촉구하는 피켓 시위가 벌어졌다. 상장 제약사에서 임원들이 집단으로 최대주주를 공개 비판하는 이례적인 장면이 연출됐다.

동시에 박재현 대표의 대응 방식도 도마에 올랐다. 일각에서는 녹취 공개 이후 임직원을 상대로 지지 의사를 확인하는 절차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나왔다. 자발적 의사 표현이었다는 입장이지만, 조직 내부에서는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다.
이에 대해 한미약품 관계자는 “사실 무근”이라며 선을 그었다.
원료 조달 구조 변경을 둘러싼 이견도 갈등을 키웠다. 핵심 품목의 원료를 기존 공급처에서 해외 원료로 전환하는 방안을 두고 경영진과 대주주 간 의견이 엇갈렸다.
제약 산업에서 원료 변경은 단순한 비용 절감 문제가 아니다. 유전독성 불순물 관리, 장기 안정성 검증, 허가 변경 등 복합적 절차가 수반된다. 품질 신뢰는 제약사의 핵심 자산이며, 글로벌 시장을 지향하는 R&D 중심 기업일수록 품질 기준과 윤리성은 브랜드 경쟁력과 직결된다.
박 대표 측은 품질 검증과 규제 리스크를 이유로 신중론을 폈고, 신 회장 측은 원가 절감 차원의 합리적 판단이라는 입장을 유지했다. 박 대표가 거부하자 신 회장이 측근을 통해 원료의약품 교체를 밀어붙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같은 갈등 국면에서 신 회장은 지분 확대에 나섰다. 한미사이언스는 이날 공시를 통해 신 회장이 코리포항 외 5인으로부터 주식 441만32주(6.45%)를 매수했다고 밝혔다. 거래 금액은 2173억원, 주당 단가는 4만8469원이다.
이번 거래로 신 회장의 지분율은 22.88%로 높아졌다. 개인회사 한양정밀이 보유한 6.95%를 합치면 29.83%에 달한다. 이는 창업주 일가의 개별 지분을 각각 웃도는 수준이다.

한미약품은 고(故) 임성기 창업주 시절부터 ‘인간 존중’과 ‘가치 창조’를 경영 이념으로 내세워왔다. 매출 대비 높은 연구개발비 비중을 유지하며 글로벌 기술수출을 잇따라 성사시켜 온 기업이다. 국내 제약사 가운데 R&D 투자 의지와 성과 측면에서 상징적 존재로 평가받아왔다.
실제로 항암제, 희귀질환 치료제, 대사질환 신약 등 다양한 파이프라인을 확보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비만 치료제 등 차세대 성장 동력에 대한 기대도 커지고 있다.
지난해에는 ‘머크식 전문경영인 체제’를 표방하며 지배구조 안정화를 선언했다. 대주주는 장기 비전을 제시하고, 경영 집행은 전문경영인이 맡는 구조라는 설명이었다. 당시 시장은 이를 경영권 분쟁 봉합과 전문경영 체제 확립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전문가들은 대주주의 영향력 행사로 조직 내부와 시장의 신뢰는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제약업계 관계자는 “한미약품은 신약 개발 역량으로 평가받아야 할 회사인데, 지금은 연구가 아니라 권력 충돌이 뉴스가 되고 있다”며 “대주주와 전문경영인이 동시에 논란의 중심에 선 상황 자체가 거버넌스 실패로 비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재현 대표는 내부 결속 다지기에 나섰다.
그는 전날 임직원에게 보낸 글에서 “녹취 공개는 긴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라며 “50여 년간 지켜온 한미의 기업문화를 지키기 위한 선택”이라고 밝혔다. 또 “대주주의 영향력이 크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그보다 앞서 지켜야 할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한미가 한미다운 정체성을 지키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한미약품 관계자는 "관련 사안에 대해 추가로 설명할 부분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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