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의 직설] 올해도 ’한국어 교가‘를!…교토국제고, ‘고시엔 2연패’ 시동 걸었다

마이데일리

“동해 바다 건너서 야마도 땅은 거룩한 우리 조상 옛적 꿈자리...정다운 보금자리 한국의 학원.” 이 노래를 기억하는가?

지난해 8월. ‘고시엔 대회’라 불리는 전국야구대회 우승으로 일본을 뜨겁게 달구었던 교토국제고의 교가. 우승 후 선수들은 응원단과 함께 한국어로 교가를 불렀다. 이를 들으며 국민들은 재일동포들과 함께 울었다.

야구는 일본의 국민 스포츠나 마찬가지. 무려 3,441개 학교가 참가하는 오사카 ‘고시엔’은 지고 돌아서며 울지 않는 선수가 없다고 해서 “눈물”이란 별명이 붙은 대회. 모든 고교 선수들에게 그만큼 간절한 꿈의 무대며 성지다.

교토국제고는 학생 수가 138명. 참으로 작은 학교. 신입생이 한해 2명밖에 되지 않아 문을 닫을 뻔도 했던 아픈 역사를 지닌 곳. 재일동포들의 맵고 신 삶의 고달픔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학교. 제대로 된 운동장조차 없어 일본 유명 신문이 강호가 된 비밀은 “불우한 환경 속에 숨겨져 있다”고 동정했던 곳.

그런 학교가 정상에 올랐다. 기적. 지고서도 다들 우는데 온갖 어려움을 이긴 기적의 우승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우승 후유증? 지역 예선서 봄 대회까지 부진…여름 대회서 ‘잠재력’ 폭발

이제 교토국제고는 제107회 고시엔 대회에서 2연속 우승을 위해 나서고 있다. 순조로운 출발. 지난 5일부터 열린 교토 예선에서 4연승, 준결승전에 나갔다. 지역대회에서 우승해야만 ‘고시엔’ 출전권을 얻는다.

우승으로 학교는 한국과 일본 전역에 이름을 떨쳤다. 교토 ‘와카사 스타디움’에는 ‘교토국제’란 황금색 명판이 설치됐다. 야구장 2층 통로에는 교토 지역대회 역대 우승 학교의 이름이 새겨진 명판이 줄지어 있다.

그러나 금색 명판은 전국대회 우승 학교만 올릴 수 있다. 교토 대표가 전국을 제패한 것은 68년만. 교문 앞에는 “우승”이란 두 글자가, 역시 금색으로 빛나는 기념 방패가 전시되었다. 3,441개 야구부의 정점에 선 증표다.

그러나 교토국제고는 우승 후유증 탓인지 올해 봄 대회까지 1년 내내 고전했다. 여름 대회를 앞두고서 마침내 잠재력이 터졌다. 7대2, 13대0, 10회 타이브레이크 3대2, 10대3 7회 콜드. 기세가 좋다. “드디어 껍질을 깨고 진정한 강자로 돌아왔다”는 칭찬을 듣고 있다.

특히 3차전에서 지난해 전국 제패의 주역이자, U-18 일본 대표에도 뽑혔던 왼팔 에이스 니시무라 잇키(3학년)가 돋보였다. 그는 봄 교토대회 우승 학교를 상대로 삼진 13개를 빼앗았다. 여름 첫 등판 완투승. 니시무라는 지난해 우승 때 다양한 변화구가 “마구”로 불렸다.

고마키 노리츠구 감독(42)은 “선수 개개인 능력은 올라갔으나 창의력과 경기를 만드는 힘이 아직 부족하다”고 말했다. 18년째 감독인 고마키와 학교의 인연은 묘했다. 교토 세이쇼고 1년 때인 1999년 여름. 야구부가 막 만들어진 당시 ‘교토한국학원’의 첫 공식 경기에서 34대0으로 이겼다. “돈만 잡아먹는 동아리”라며 창단 반대가 심했던 학교. “안타를 치고도 3루로 달린 선수가 있었던” 야구부였다.

1990년대 후반. 학교 존속마저 위태로울 정도였다. 당시 부이사장 김안일(82) 씨는 “운동장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건 안 되겠다. 뭔가 동아리를 만들자고 얘기했었다”고 회고했다. 인근 현의 고교가 야구부를 창설해 고시엔에 출전하면서 폐교 위기를 넘겼다는 얘기가 한 줄기 희망을 주었다. 야구부 설립을 결심했다. 하지만 그 길은 순탄치 않았다. 온갖 고비를 넘기고 나선 첫 경기의 0대34 참패. 김 씨의 심정은 어땠을까?

그런 학교가 안타까웠을까? “낮은 곳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다”는 고마키 감독은 칸사이대 선수 때부터 ‘교토한국학원’ 지도를 시작했다. 대학 졸업 뒤 은행에 취직했으나 주말마다 코치로 계속 학교를 찾았다. 마침내 은행을 그만두었다. 교사 자격증을 갖고 있어 2007년 사회과 교사로 채용. 2008년 감독을 맡았다. 그에겐 운명의 길이었다.

그는 6살짜리 네쌍둥이 등 다섯 아이의 아버지. “선수들 한 명이라도 더 오래 상위 무대에서 야구를 계속하길 바란다. 야구에 몸담아, 야구에 보답해줬으면 한다.” 그동안 신성현(전 히로시마, 두산 등)과 황목차승(전 엘지) 등 한국 선수를 포함, 13명을 프로 선수로 키웠다. 괄목할 만 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안일 씨는 그런 과정을 다 함께 겪고 지켜보면서 지금까지 26년째 후원회장으로 돕고 있다. 그의 끈질긴 집념·열정이 없었다면 교토국제의 우승은 없었을지 모른다.

1947년 재일동포들이 세운 학교는 현재 일본 학생이 대부분. 누군가는 “선수 전부가 일본 아이들인데 한국이 왜 난리인가?”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인가한 한국의 학교. 재일동포들에게는 언제나 마음속 모교며 고향이다. ‘본국’ 사람들도 그들이 동포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값진 곳. 그런 의미에서 야구부는 재일동포들의 영원한 야구부다. 대한민국의 야구부이기도 하다. 야구는 두 나라의 한국인들을 이어주는 다리다.

■ “‘한국어 교가’, 일본인 자극” 논란에도 학생들은 당당…‘2연패’로 다시 들을 수 있기를!

그러기에 한국어 교가가 일본 정서를 자극한다는 논란에 휩싸여도 오히려 학생들은 당당했다. 한때 교직원들 사이에서 “교가 문제로 인한 불필요한 공격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고 학업과 동아리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야 한다. 고시엔에 나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입학한 학생들도 있다. 지금을 살아가는 학생들에게 창립 당시의 이념을 짊어지게 할 필요는 없다”는 의견도 강했다고 한다. 실제로 학교는 교가를 바꿀지 고민했다.

그러나 설문 조사 결과, “한국이 좋아서 입학했다. 왜 한국어 교가를 바꾸느냐?”는 반응이 많았다. 결국, 학교는 교가를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

지난해 우승 뒤 주장은 교가 논란에 대한 심정을 밝혔다.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존재합니다. 저 자신도 정말 괜찮은 걸까 하고 생각한 적도 솔직히 있습니다. 비판받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를 두고 이런저런 말을 들을 때도 있어서 힘들긴 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지지 않고, 지금까지 응원해준 사람들을 위해서 반드시 이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난해 적시 안타를 쳤던 어느 선수는 “기분 좋게 노래했다”고 말했다. 지난 22일 8강전을 7회 콜드게임으로 이긴 뒤 모든 선수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힘껏 교가를 불렀다. 8월의 본선 결승전에서 다시 “동해 바다 건너서...”를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자.

손태규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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