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SG 경영컨설턴트 심준규] 최근 여수 석유화학단지를 돌아볼 기회가 있었는데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었다. 30년간 한국 산업을 떠받쳐온 뿌리산업이 말 그대로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경기 침체를 넘어 산업계 전체가 구조적 전환점에 서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석유화학 공장 가동률이 60%대로 떨어지고, 대규모 일자리 감소가 이어지는 현실은 숫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더욱 충격적인 부분은 일부 중소 제조업체는 월 매출이 기존 대비 100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은 개별 기업의 일시적 어려움이 아니라, 한국 제조업 생태계 전체가 붕괴 위기에 직면했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급격한 침체 핵심 원인은 글로벌 경쟁 구조의 근본적 변화, 특히 중국의 전략적 산업 고도화에 있다. 과거 중국 제품이 ‘싸지만 품질이 떨어진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면,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지난 10년간 중국은 막대한 국가 투자를 통해 품질 향상과 기술 고도화를 추진해 ‘메이드 인 차이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한국이 그동안 글로벌 시장에서 차별화 요소로 의존해 온 ‘중간재 기술력’과 ‘가성비’라는 경쟁우위가 급속히 무너지고 있다. 중국 제품이 한국 제품과 품질 면에서 대등하거나 오히려 앞서면서도 가격은 여전히 저렴하다는 현실이 한국 제조업체를 궁지로 몰아넣고 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변화가 이미 예측가능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적절한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근본적인 전환 전략보다는 단기적 대응에만 머물렀던 한계가 현재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이는 우리 산업정책의 고질적인 문제점인 단기주의적 접근을 그대로 드러낸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 핵심 철학이 장기적 지속가능성을 추구하는 데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제조업 정책은 여전히 분기별, 연간 성과에만 매몰돼 있는 실정이다.
현재 정부가 제시하는 주요 해법은 AI(인공지능)와 디지털 전환이지만, 현실과 괴리가 있다. 현장에서 20년, 30년간 숙련된 기술을 축적해 온 제조업 전문가를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구체적 비전이 보이지 않는다. 숙련 기술자가 플랫폼 노동자로 전락하는 현실을 AI로 해결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문제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
기술 전환의 성공을 위해 신기술 도입도 중요하지만, 기존 인력의 축적된 경험을 새로운 영역에서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달려 있다. 하지만 현재 정책은 ‘기술이 인간을 대체한다’는 관점에만 매몰되어 있고, 인간과 기술의 협업을 통한 새로운 가치 창출은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결국 제조업 핵심 자산인 숙련 인력을 단순한 비용으로만 바라보는 근시안적 시각을 드러낸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제조업 생태계의 연쇄적 붕괴다. 대기업 공장의 가동률 하락이 1차 협력업체의 매출 감소로 이어지고, 다시 2차, 3차 협력업체의 도산으로 확산되는 악순환이 가속화되고 있다. 한 지역의 제조업 클러스터가 무너지면 교육기관, 의료시설, 서비스업까지 동반 타격을 받아 지역경제 전체가 침몰한다.
연쇄 붕괴 현상은 ESG 경영에서 강조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중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기업의 진정한 지속가능성은 주주 이익 극대화에만 매몰되어서는 달성할 수 없으며, 직원, 협력업체,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관계자의 가치를 함께 고려해야만 가능하다는 교훈을 제공한다. 그러나 현재의 위기 대응은 여전히 개별 기업의 단기적 생존에만 초점을 맞춘 근시안적 접근에 머물러 있다.
그렇다면 출구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와 유사한 위기를 겪었던 네덜란드와 덴마크의 혁신적 전환 사례에서 방안을 살펴볼 수 있다. 두 국가는 기존 산업의 쇠퇴를 위기가 아닌 기회로 바라보고, 완전히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창출해냈다.
네덜란드는 1990년대 전통 화학공업이 중국과 인도의 저가 공세로 치명타를 입었을 때, 과감한 선택을 했다. 기존 화학공업 인프라와 숙련 인력을 포기하는 대신, 순환경제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토대로 활용하기로 결정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석유화학 기술자들이 바이오 플라스틱과 폐플라스틱 재활용 전문가로 화려하게 변신했다.
핵심은 기존 기술자들이 수십 년간 쌓아온 화학 공정 노하우를 그대로 살렸다는 점이다. 복잡한 화학 반응을 다뤄온 전문성이 친환경 바이오 촉매 기술로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들은 새로운 분야의 핵심 인재가 될 수 있었다.
덴마크는 더욱 극적인 변신을 보여줬다. 1970년대 석유위기로 조선업과 기계제조업이 몰락 위기에 처했을 때, '기존 역량의 창조적 재활용'이라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겼다. 대형 선박을 건조하던 조선소가 풍력 터빈을 만드는 첨단 공장으로 탈바꿈했다.
두 나라 성공 스토리가 주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중국과 소모적인 가격 경쟁에서 벗어나 완전히 새로운 가치 창출 영역을 개척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답은 바로 ESG와 탄소중립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현재 위기의 석유화학 산업을 바이오화학과 재활용 플라스틱 산업의 거점으로 변모시키는 방안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존 화학 플랜트의 인프라는 그대로 활용하되, 생산하는 제품만 친환경으로 전환하는 아이디어다. 화학반응 원리를 꿰뚫고 있는 기존 기술자들에게는 새로운 도전의 기회가 되고, 기업에게는 미래 성장 동력을 모색할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큰 그림에서 보면 탄소중립 시대의 핵심 인프라를 선점할 기회다. 석유화학 플랜트 기술자들이 수소 생산과 탄소 포집 전문가로, 정유 엔지니어들이 바이오연료 개발자로 변신하는 시나리오를 상상해보라. 단순한 구조조정이 아니라 미래 산업의 주역으로 서는 전략적 대전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모든 변화의 전제조건이 있다. 기업의 과감한 투자 결단과 현장 기술자들의 적극적인 학습 의지, 그리고 무엇보다 정부의 일관된 장기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20~30년 경력의 베테랑들이 새로운 기술 영역에서도 리더 역할을 할 수 있는 체계적인 재교육 시스템이야말로 인프라 전환의 근본이다.
가장 중요한 건 정치적 일관성이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산업정책이 방향을 바꾸게 되는 상황에서는 누구도 장기 투자를 감행하지 않는다. 제조업 구조 전환은 최소 10년은 걸리는 마라톤인데, 4년, 5년마다 결승선을 바꾸면 누가 완주할 수 있겠는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중국 저가 공세라는 외부 압력을 오히려 혁신 동력으로 전환시킨 사례만 보아도, 한국 제조업은 더욱 강력하고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제조업이 진정한 뿌리산업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지금의 위기를 새로운 성장 기반을 다지는 역사적 기회로 전환해야 할 때이다.
|심준규. 더솔루션컴퍼니비 대표. <그린북>, <실천으로 완성하는 ESG 전략> 저자. 기업의 ESG 역량 강화 프로그램 개발과 ESG경영컨설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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