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빠르게 변하는 세상, 김종관 감독이 지키려는 것… ‘낮과 밤은 서로에게’

시사위크
‘낮과 밤은 서로에게’로 돌아온 김종관 감독.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낮과 밤은 서로에게’로 돌아온 김종관 감독.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시사위크=이영실 기자  영화 ‘낮과 밤은 서로에게’는 하나의 계절이 흐르는 동안 한 카페에 머물다 간 사람들의 대화를 담은 작품이다. ‘최악의 하루’ ‘더 테이블’ ‘조제’ 등을 연출한 김종관 감독의 신작으로, 제3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돼 일찌감치 주목받았다.

전작 ‘더 테이블’과 결을 같이하는 작품이다. 한정된 공간에서 인물들의 대화만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거창한 사건이나 극적인 갈등 없이 일상의 순간과 사람 사이의 감정을 담담하게 들여다본다. 감독 특유의 잔잔한 호흡과 따스한 시선이 녹아있다.

최근 만난 김종관 감독은 ‘낮과 밤은 서로에게’에 담은 의미와 배우들과의 작업 과정은 물론,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도 자신만의 영화 세계를 지키려는 고민과 소신을 털어놨다.

-‘더 테이블’에 이어 다시 카페라는 공간을 배경으로 선택한 이유는.

“개인적으로 카페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대화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기 때문에 대화의 매력을 잘 살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다. 식사하면서 연기하는 건 너무 힘들고, 술을 마시는 공간은 또 그 분위기가 이야기 전체를 끌고 가게 되니까 다른 느낌일 것 같았다. 영화에서 카페는 하나의 연극 무대와 같다. 여러 인물이 둘씩 등장해 서로의 사연을 주고받는 구조인데, 그런 이야기를 풀어내기에 카페가 적합하겠다고 생각했다.”

-영화의 주요 배경인 카페는 어디였나.

“청량리에 있는 곳인데 카페로 운영하다가 지금은 스튜디오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촬영할 때는 기존 집기를 모두 덜어내고 미술을 새로 했다. 카페 앞 거리도 마음에 들었고 공간의 크기도 적당했다. ‘더 테이블’은 테이블 하나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라 협소해도 괜찮았지만, 이번에는 계절도 변하고 이야기마다 테이블의 배치나 모양도 바꿔야 해서 적당한 크기가 필요했다. 유동 인구가 많지 않으면서도 평일의 서촌 같은 느낌이 있었다.”

영화의 시작을 연 김민하(왼쪽)와 주종혁.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영화의 시작을 연 김민하(왼쪽)와 주종혁.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대화 중심의 형식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나.

“전에 만든 ‘폴라로이드 작동법’도 하나의 공간에서 두 사람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다. 단편적인 구성 자체가 매력적이라기보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들을 보면 하나의 순간이나 찰나를 묘사하면서도 결국 삶의 여러 가지를 은유한다. 인생의 한순간도 굉장히 소중하고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더 테이블’을 만들었다. 그 작업이 정말 재미있었다. 카페가 하나의 무대 같다고 했는데, 촬영장에 가면 어느 날은 한예리가 앉아 있고 다음 날은 임수정이 앉아 있었다. 마치 새로운 연극을 준비해 무대에 올리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그 영화를 처음 보는 관객처럼 매일 달라지는 이야기를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다. ‘더 테이블’을 만든 지 10년, 개봉한 지 9년이 지났는데 여전히 좋아해 주는 분들이 있다. 나에게도 좋은 추억이 됐지만, 당시 영화를 봤던 관객들에게도 그 시절과 맞물려 하나의 추억이 됐다는 게 재미있다. 그래서 10년 후에도 누군가의 추억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다시 만들어보고 싶었다.”

-새롭게 시도한 부분은.

“조금 더 유연하고 재미있게 작업하고 싶었다. 하나의 작가가 쓴 소설집 같은 느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소설집을 좋아한다. 그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있지만 결국 하나의 창작자가 그리고자 하는 이야기는 그 사람의 세계 안에 있지 않나. 그 세계를 느낄 수 있다는 게 매력적이다. ‘더 테이블’은 하나의 테이블에서 하루 동안 벌어지는 이야기였고, 영화 전체의 결도 맞추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의 창작자가 만든 소설집이라면 장르적으로 꼭 결을 맞추지 않아도 결국 나의 색깔이 들어가 있지 않겠나. 그래서 이번에는 새로운 것들을 많이 시도하려고 했다. 비슷한 영화 같아도 창작자들은 그 안에서 또 새로운 것들을 해보려고 한다.”

-첫 번째 에피소드 ‘한여름 밤의 꿈’ 속 두 인물은 같은 꿈을 꾼다. 어떤 의미를 담았나.

“영화 전체를 통해 서로 다르지만 본질적으로 연결돼 있는 양면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었다. 낮과 밤도 결국 같은 공간에 빛이 들어와 있느냐 아니냐의 차이지 않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도 두 인물이 낮과 밤에 각각 등장하지만 같은 꿈을 꾼다. 정말 초현상적으로 같은 꿈을 꾼 것일 수도 있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같은 강박을 가진 사람들일 수도 있다. 꿈도 결국 현실이 반영되고 왜곡돼 나타나는 것이니까.

‘이.순.불’에서 호연한 이희준(왼쪽)과 심은경.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이.순.불’에서 호연한 이희준(왼쪽)과 심은경.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이.순.불’에서 다루는 창작 역시 마찬가지다. 현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만들지만 그 안에는 오해와 상상이 섞여 있다. 상미의 이야기도 망상과 신념 사이에 맞닿아 있는 지점이 있고, 마지막 에피소드의 어린 연인들은 자신들이 경험한 현실을 바탕으로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결심한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지만 연결돼 있는 것들이다. 결국 이야기 자체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도 보여주고 싶었다.”

-‘더 테이블’에 이어 이번에도 시계가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어떤 의도를 담았나.

“재미있는 건 ‘더 테이블’에 나왔던 시계와 같은 시계라는 거다. 극 중 정은채가 선물받은 시계를 그대로 가져왔다. 시계라는 소품을 활용하는 게 재미있기도 했고, 또 다른 의미도 있다. 시계를 수리하는 현오의 입장에서 보면 시계는 굉장히 미시적인 세계인데,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나의 우주가 있다고 하지 않나. 우리 영화 역시 작고 사소한 세계이지만 삶의 단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연결점 때문에 시계라는 소품을 사용하기도 했다.”

-‘아직 나인 사람들’은 장르적인 색채가 강하다. 어떤 의도로 연출했나.

“상미라는 인물은 망상장애를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본인만의 신념이 있는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영민의 입장에서는 단순히 망상장애로만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신념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불가사의하다. 중요한 건 그런 상미에게 침범당한 이후 영민의 마음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영민의 시선이 중요했다. 단순히 망상장애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로만 보이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런 고민 속에서 장르적인 분위기를 만들었다.”

김종관 감독이 (왼쪽부터) 한선화, 장률과의 작업 과정을 떠올렸다.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김종관 감독이 (왼쪽부터) 한선화, 장률과의 작업 과정을 떠올렸다.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한선화, 장률과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

“가장 어려운 에피소드였다. 리허설을 가장 많이 했다. 보통 대화는 서로 말을 주고받는 방식인데, 이 에피소드는 거의 상미의 긴 독백과 다름없다. 한 사람은 액션으로, 다른 한 사람은 리액션으로 채워져 있다. 액션도 힘들지만 리액션도 어렵다. 듣고 반응하는 것만으로 장면을 채워야 하기 때문에 배우의 역량이 많이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는 말하는 연기보다 듣는 연기가 더 어렵다. 그러면서도 관객에게 즉각적인 재미와 호기심을 줘야 하기 때문에 영민 역의 장률과 많은 고민을 했다. 상미는 긴 독백 안에서 맹렬하게 폭주하고 질주하는 대사를 쏟아내고 감정의 기복도 심하다. 그런 부분을 정밀하게 설계해야 했다. 다른 에피소드를 촬영하는 날에도 배우들이 현장에 와서 촬영이 끝난 뒤 리허설을 하곤 했다. 그만큼 배우들이 열정적으로 임해줬다.”

-마지막 에피소드 ‘가을 이야기’는 젊은 연인들의 이별을 담고 있다. 어떤 점에 중점을 뒀나.

“예전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 같은 고전 영화에 나오는 대화 장면이나 멜로적인 구성을 가장 젊은 세대의 배우들이 연기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요즘은 도파민이 가득한 시대이고 젊은 세대의 만남과 헤어짐이 쉽다고도 이야기하지만, 분명 누군가는 그런 관계를 어렵게 생각할 거다. 그런 올드한 매력이 있는 이야기를 젊은 배우들이 연기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했다.”

-전소영은 촬영 당시 거의 경력이 없는 신인이었다. 캐스팅한 이유는. 어떤 매력을 봤나.

“사실 아직 개봉 전인 ‘흐린 창문 너머의 누군가’라는 영화에서 처음 함께 작업했다. 완전한 신인이어서 어떤 그림이 나올지 몰랐다.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한 셈이다. 그런데 함께 준비하고 촬영하면서 굉장히 빨리 캐치하고 성장하더라. 연기도 대단히 잘했다. 처음에는 기세가 매력적이었다. 목소리나 말하는 방식도 좋았다. ‘최악의 하루’ 속 한예리의 MZ 버전 같은 인물을 재미있고 귀엽게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욕을 먹을 수도 있는 캐릭터인데, 결국 관객이 사랑스럽게 느낄 수 있는 매력을 가진 배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도전했고 결과도 좋았다.

마지막 에피소드에서는 여자 배우가 신인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기성 배우는 익숙한 이미지에서 오는 재미가 있지만, 이번에는 그런 선입견 없이 인물을 바라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전소영과 다시 작업했는데 영화를 완성하고 개봉하는 사이에 워낙 열심히 활동해서 전보다 덜 신인이 됐더라.(웃음) 그게 또 반가웠다. 가능성이 큰 좋은 배우의 시작을 함께 지켜볼 수 있다는 게 재미있었다.”

젊은 연인의 이별을 담은 ‘가을 이야기’ 스틸.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젊은 연인의 이별을 담은 ‘가을 이야기’ 스틸. / 케이무비엔터테인먼트

-빠르게 흘러가는 시대에 감독의 영화는 오히려 한순간을 천천히 들여다본다. 요즘 관객들에게는 다소 느리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이러한 지점에 대한 고민은 없나.

“‘더 테이블’은 당시에도 낯선 영화였다. 누군가는 좋아했지만 누군가에게는 와닿지 않거나 지루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영화가 아직도 살아남아 있는 것 같다. 관객들 덕분이다. 영화의 멋진 점은 누군가의 추억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지금은 그때보다 세상의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릴스와 숏폼, AI 콘텐츠가 쏟아지는 물결 속에 영화가 던져지는 거다. 그 안에서 건져 올려져 누군가에게 전해지기를 바라지만, 속도의 차이가 있으니 내가 만드는 영화가 점점 호불호의 영역으로 가는구나 싶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느리게 느껴질 수 있으니까.

AI로 만든 영상도 정말 사실적이지 않나. 그런데 나는 오히려 그런 사실적인 영상에 무감해지는 부분이 있다. CG가 아무리 화려해도 그렇다. 반면 조잡하게 꾸며진 연극 무대에서 실제 배우가 연기하는 모습을 보며 감동받을 때가 있다. 지금의 속도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그런 연극조차 지루할 수 있겠지만, 나처럼 느끼는 사람도 있을 거다. 요즘은 감정적인 반응도 즉각적이다. 좋으면 10점, 싫으면 1점을 주는 식이다. 내 영화의 속도를 재미없어하는 관객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이런 영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세상 어딘가에는 내 영화와 연결될 수 있는 관객들이 있을 거다. 그 관객들과 어떻게 연결감을 만들 것인가가 숙제인 것 같다.”

-자신만의 색깔을 지키며 영화를 만들고 있다. 무엇을 잃지 않으려고 하나.

“세상에는 다양한 창작자들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처럼 인생의 한순간, 찰나를 가지고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게 누군가에게는 순진한 생각일 수도 있다. 이번 영화는 12회차로 촬영했다. 일반적인 상업영화에 비하면 훨씬 적은 회차다. 소품 같고 작고 사소한 것들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적은 수고가 드는 건 아니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완성하기까지 4~5년이 걸렸다. 나에게 작고 사소한 이야기였다면 왜 그 긴 시간을 투자했겠나. 오히려 작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함께하는 사람들의 힘도 크다. 스태프들과 배우들, 홍보팀과 배급팀까지 이 영화를 좋아하고 열심히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큰 행복이다. 물론 영화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실패가 있었고, 관객에게 가닿기까지 또 많은 어려움이 있을 거다. 하지만 누군가와 연결되고 내 영화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나에게는 또 하나의 찰나적인 도파민이다.

세상이 점점 퍽퍽해지는 것 같다. 다양한 창작 형태가 줄어들면 결국 관객이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줄어들지 않나. 어떻게 해야 더 다양한 이야기를 보고 즐길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되는데, 아직 답은 잘 모르겠다. 결국 창작자는 ‘나’라는 브랜드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프랜차이즈가 아니더라도 맛있는 동네 빵집일 수도 있고, 성심당 같은 곳일 수도 있지 않나. 자기만의 고집을 가지고 ‘나’라는 브랜드를 끊임없이 가꿔나가야 한다. 그리고 그걸 끝까지 봐주는 관객이 있어야 한다. 내 영화를 찾는 관객이 사라지면 내가 하는 일도 끝나는 거다. 결국 나와 연결될 수 있는 관객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흔들리거나 외로운 순간은 없나.

“너무 힘들다. 어릴 때는 주변에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나 혼자였다. 친구들과 잘 어울려 지냈지만 내 취향을 이야기하는 게 꼭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이후 영화를 공부하고 창작을 시작하면서 나처럼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 나와 닮은 사람들이 많아져서 좋았다. 그런데 곰곰이 보니 서로가 원하는 영화는 또 다르더라. 어느 순간 그 차이를 느끼면서 외로워지기도 했다. 그것도 삶의 다양한 흐름인 것 같다. 내가 만든 작품이 완벽하지 않으니 스스로 아쉬울 때도 있다. 나는 이게 좋고 맞다고 생각하는데, 세상은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를 비난할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도 헷갈린다. 나 역시 상미처럼 나만의 신념을 믿고 있는 건지, 아니면 나만의 허상을 쫓고 있는 건지 고민하게 된다. 어떤 면에서는 외로운 작업이지만 그래도 내가 믿는 걸 믿는 것 같다. 아직은 고집을 못 버리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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