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반도체 속도전이 부른 균형발전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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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서두르려는 정부의 구상이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전력 공급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다른 지역 변전소에 배정된 변압기를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자, 해당 지역에서 기존 사업 지연 우려와 반발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사진은 민형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과 홍지선 국토교통부장관이 지난 15일 오후 전남광주 서구 군공항 탄약고 이전 예정지를 둘러보며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 현황을 점검하는 모습. / 뉴시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서두르려는 정부의 구상이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전력 공급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다른 지역 변전소에 배정된 변압기를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자, 해당 지역에서 기존 사업 지연 우려와 반발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사진은 민형배 전남광주통합특별시장과 홍지선 국토교통부장관이 지난 15일 오후 전남광주 서구 군공항 탄약고 이전 예정지를 둘러보며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사업 현황을 점검하는 모습. / 뉴시스

시사위크=김윤혁 기자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서두르려는 정부의 구상이 또다시 난관에 봉착했다. 전력 공급 시기를 앞당기기 위해 다른 지역 변전소에 배정된 변압기를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자, 해당 지역에서 기존 사업 지연 우려와 반발이 불거졌기 때문이다. 한국전력공사는 다른 지역의 전력 공급에 차질이 없도록 하겠다고 해명했지만, 균형발전의 성과를 위해 다른 지방이 비용을 떠안는 것이 적절하냐는 역차별 논란으로 번지고 있다.

◇ 호남 전력 조기 공급 위해 타 지역 변압기 활용 검토 

지난 26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호남 반도체 산단의 조기 전력 공급 방안이 도마에 올랐다. 윤재옥 국민의힘 의원이 기후에너지환경부가 제출한 공사기간 단축 방안에 다른 지역 변전소용 변압기를 전용하는 계획이 포함됐다고 지적하면서다. 윤 의원이 기후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전용 대상으로 제시된 곳은 신달성(대구), 사등(경남 거제), 중흥(전남광주 여수), 신항(부산), 부산항(부산) 등 5개 변전소다.

정부가 호남 반도체 산단 조성을 서두르는 배경에는 군공항 부지를 조기에 활용하겠다는 구상이 있다.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8월 메가프로젝트 점검회의에서 국방부에 2028년 중순까지 광주기지 기능을 다른 군공항으로 임시 배치하도록 지시했다. 이에 1단계 전력 공급 목표도 2029년 말에서 2028년 말로 1년 앞당겨졌고, 단축된 일정에 맞춰 설비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사업의 변압기를 활용하는 방안이 검토된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해당 지역에서 강한 반발이 일었다. 이들 변전소는 대구국가산단과 거제 서부권 개발지역, 여수국가산단 등 각 지역 핵심 개발사업에 전력을 공급할 시설이기 때문이다. 만약 변압기 전용으로 준공이 늦어지면 기업의 공장 신·증설과 신규 투자 일정 등에 차질이 생겨 지역 경제에 부담이 될 수 있다. 이에 지역에서는 호남 반도체 산단의 조기 조성을 위해 자신들이 피해를 떠안아야 하느냐는 불만이 나온다.

호남 산단 조기 조성을 위해 다른 사업의 설비를 활용하는 것 자체를 부적절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해당 지역의 사업에 차질이 없다는 구체적인 설명이 뒷받침돼야 정부와 지역 간 신뢰가 유지될 수 있다. / 뉴시스
호남 산단 조기 조성을 위해 다른 사업의 설비를 활용하는 것 자체를 부적절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해당 지역의 사업에 차질이 없다는 구체적인 설명이 뒷받침돼야 정부와 지역 간 신뢰가 유지될 수 있다. / 뉴시스

불만은 지자체와 시민사회의 공식 대응으로 이어졌다. 추경호 대구시장은 지난 27일 한전 대구본부장을 만나 신달성변전소용 변압기 전용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달했다. 경상남도는 29일 한전 측에 거제 사등·진해 신항변전소 변압기 전용 반대 의사를 밝혔다. 대구경북녹색연합 역시 같은 날 성명을 내고 전용 검토 중단과 함께 대체 변압기 확보 시점, 기존 준공 목표 유지 여부 등을 구체적으로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국민의힘은 이를 균형발전의 허울을 쓴 역차별이라고 비판했다. 부산시당 곽규택 수석대변인은 28일 논평에서 “호남의 시계를 앞당기려 다른 지역의 시계를 늦추는 것이 이재명 정부의 국토균형발전이냐”고 따져 물었다. 대구시당은 TK(대구·경북) 행정통합과 신공항, 3대 메가프로젝트 등을 거론하며 “각종 현안에서 지속적이고 노골적인 TK 홀대도 모자라, 이제는 이미 계획된 전력 인프라의 핵심 자재까지 가져가겠다는 것이냐”고 지적했다.

논란이 커지자 한전은 설비 배정 조정과 전력 공급 지연은 별개라며 해명에 나섰다. 한전은 30일 보도자료를 통해 호남 산단에 전력을 공급하기 위해 다른 지역 변전소의 변압기 설치 시기를 늦추는 것은 아니라며 특정 지역의 전력 공급에 지연이 없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또 변압기는 특정 변전소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장비가 아닌 범용 설비로, 지역별 전력수요와 여건을 고려해 공급 일정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호남 산단 조기 조성을 위해 다른 사업의 설비를 활용하는 것 자체를 부적절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해당 지역의 사업에 차질이 없다는 구체적인 설명이 뒷받침돼야 정부와 지역 간 신뢰가 유지될 수 있다. 전용 검토 대상에는 여수국가산단용 시설도 포함돼 있어 단순한 영호남 대립으로 국한할 문제도 아니다. 결국 정부가 전력 공급에 지연이 없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균형발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지역의 소외감을 키우지 않는 것도 관건이다. 이 대통령은 민선 9기 출범 후 처음 열린 중앙지방협력회의에서 균형발전을 강조하며 “현재 대한민국이 안고 있는 모든 큰 문제들의 출발점은 극심한 국토 불균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한 지역의 성과가 다른 지역의 희생으로 받아들여진다면 균형은 명분만 남고 지역 간 갈등만 깊어질 수 있다. 균형과 소외 사이, 정부의 조율 능력이 정책의 신뢰를 가를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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