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곽명동 기자]국내에서 ‘역사 왜곡’ 논란에 휘말렸던 허진호 감독의 정치 스릴러 영화 '암살자(들)'이 제37회 싱가포르국제영화제(SGIFF)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허 감독은 표현의 자유를 지켜준 영화제 측에 감사 인사를 전했다.
21일(현지 시간) 미국 연예 매체 버라이어티에 따르면, 이날 싱가포르 마리나 베이 샌즈 샌즈 시어터에서 열린 제37회 싱가포르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암살자(들)'이 개막작으로 관객들을 만났다.
상영이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가운데 허 감독은 “예술적 자유와 영화 속 표현의 자유를 지켜준 영화제 측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며 “이번 영화제 측의 결정은 저를 비롯해 제작진과 배우 등 이 영화를 만든 모든 이들에게 큰 용기가 될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앞서 지난 6일 국민의힘은 소속 의원 109명 전원의 명의로 SGIFF의 제레미 추아 집행위원장에게 서한을 보내 개막작 선정 취소를 요구했다. 그러나 영화제 측은 상영을 강행했다. 영화제 측은 10월 7일 발표한 성명을 통해 해당 영화가 “SGIFF의 독립적인 큐레이팅 과정을 거쳐 예술적 가치와 현대 아시아 영화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아 선정되었다”고 밝혔다.
칸 영화제 초청작 '샌드캐슬'과 '어프렌티스'를 연출한 싱가포르 출신의 부준펑(Boo Junfeng) 영화제 집행위원장은 한국의 한 단체로부터 상영 취소 압박 메시지를 수없이 받았으며, 동시에 많은 지지 메시지도 함께 받았다고 전했다.
부 위원장은 “SGIFF는 제기된 다양한 의견을 신중하게 검토했다. 우리는 이 영화를 역사적 사건에 대한 예술적 해석으로 보며, 제작진의 창의적인 비전을 존중한다. 따라서 개막작 선정 결정을 그대로 유지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본국에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이곳까지 직접 찾아와 준 허진호 감독과 제작진에게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또한 부 위원장은 “우리는 ‘무삭제(no-cut)’ 원칙을 고수한다. 검열을 거친 작품은 상영하지 않는다”라며 “영화는 창작자가 의도한 그대로 관객에게 전달되어야 하며, 그 어떤 것도 창작자의 비전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창작자의 비전과 관객을 직접 연결하는 이 원칙이야말로 영화제 창립자들이 어렵게 지켜냈고, 현 운영진 역시 지속해서 수호하고자 하는 ‘유산’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압박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뜻을 지키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니지만, 편한 길을 택하는 것은 우리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고 전했다.
영화 '암살자(들)'은 1974년 8월 15일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프로, 사건을 둘러싼 의혹과 배후를 추적하는 이야기다.
개봉 이후 영화 속 역사적 사건의 재구성을 두고 정치권과 일부 관객 사이에서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반면 영화계에서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작품에 참여한 영화인들에 대한 과도한 공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오며 첨예한 논쟁이 이어졌다.
국민의힘은 서한을 통해 이 영화가 “대한민국 국민 정서에 정면으로 반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응답자의 58.2%가 역사를 왜곡한다고 답한 설문조사 결과를 인용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아들 박지만 씨 및 관련 재단 측의 반발을 언급했다.
이에 대해 제작진은 9월 28일 성명을 내고 “영화 어디에도 사건의 배후로 특정 개인을 지목하는 내용은 없으며, 영화 속 가설이나 극적 설정은 역사적 사실로 제시된 것이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논란의 여파로 국내 영화제 일정에도 차질이 빚어졌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배우 이민호가 참석할 예정이었던 ‘액터스 하우스(관객과의 대화)’ 행사가 취소됐고, 배급사 하이브미디어코프는 안전상의 이유로 출연진과 제작진의 부산국제영화제 관련 모든 일정을 취소했다.
한편 싱가포르 무대에 오른 허진호 감독은 1974년 사건 당시 자신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으며, 이 사건이 한국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기억 중 하나로 뇌리에 남아있다고 회상했다.
허 감독은 “당시 공식 발표된 내용과 나중에 밝혀진 사실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점을 추적 스릴러 형식으로 풀어내고 싶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연출 의도를 설명했다.
이날 함께 무대에 오른 제작사 하이브미디어코프의 김원국 대표는 '덕혜옹주', '천문', '보통의 가족'에 이어 '암살자(들)'까지 허 감독과 네 작품을 연속으로 함께했다.
김 대표는 “허 감독은 디테일에 엄청난 가치를 두는 연출자”라며 “인간 본성에 관한 묘사는 물론, 사건을 구성하는 세부적인 요소까지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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