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김두완 기자 “비상식적인 법 해석”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노동자 23명이 숨진 아리셀 참사 판결을 향해서다. 법원은 막을 수 있었던 참사라고 인정하면서도 대표의 형량을 징역 15년에서 4년으로 낮췄다. 비상구 설치 의무는 좁히고 유족 합의는 감형에 반영한 판단을 대법원이 확정하면서 중대재해처벌법의 예방 취지를 훼손했다는 반발이 거세다.
◇ 막을 수 있었다면서 감형, 대법원이 확정한 징역 4년
대법원 1부(주심 천대엽 대법관)는 20일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등 혐의로 기소된 박순관 아리셀 대표에게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1심보다 11년 줄어든 형량이다. 안전관리 실패와 사망 사이의 책임은 인정하면서도 일부 혐의를 무죄로 판단하고 합의 등을 참작한 항소심의 결론이 유지됐다.
항소심 판결문에 기록된 참사 원인은 분명하다. 사고 직전 폭발이라는 '중요한 전조증상'이 있었지만 구체적인 조치 없이 후속공정을 계속했다. 재판부는 공정을 중단하고 화재·폭발 대응 매뉴얼을 마련해 준수했다면 막을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불가피한 사고가 아니라 필요한 조치를 하지 않아 발생한 참사라는 뜻이다.
그러나 형을 정하는 대목에서는 기존에 일부 안전조치를 했고 안전을 완전히 방치하지는 않았다는 평가가 등장한다. 박 대표가 중대재해처벌법 준수 컨설팅을 받고 있었다는 사정도 참작했다. 참사를 막을 핵심 조치가 빠졌다는 질책 뒤에 다른 조치를 일부 했다는 감형 논리가 붙은 것이다. 기본소득당 노서영 대변인은 항소심 재판부가 “막을 수 있었던 참사로 책임이 매우 중하다”고 인정하면서도 “처벌은 한없이 가벼웠다”고 비판했다.
유족 합의를 다룬 판단도 논란이다. 항소심은 사망자 23명의 유족 및 부상자들과 합의했다는 점을 유리하게 반영했다. 일부 유족이 합의 후에도 처벌을 요구했지만 이를 이유로 합의의 감경 효과를 제한하면 피고인의 피해 회복 노력을 위축시킬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합의 이후에도 남은 유족의 처벌 요구보다 배상을 유도할 필요성에 무게를 둔 판단이다.
이용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돈으로 때우면 감형된다”는 선례를 남겼다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비용을 들여 안전에 투자하지 말고 사고가 나면 합의금으로 해결하라”는 신호를 기업에 던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피해 회복을 위한 배상이 사고 예방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까지 크게 낮추는 근거가 돼야 하느냐는 지적이다.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유죄는 유지됐다. 그러나 책임을 인정하는 것과 그 책임에 상응하는 처벌로 재발을 막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전조를 무시한 채 작업을 이어가 23명이 숨졌는데도 일부 안전조치와 사후 합의가 대폭 감형의 근거가 됐다. 중대재해처벌법을 무력화했다는 비판은 이 간극을 겨냥한다.
◇ ‘각 층’ 명시 없다는 비상구 판단, 규칙 개정 과제
대법원이 유지한 비상구 판단은 안전 의무의 범위를 좁힌 사례다. 항소심은 화재가 발생한 공장 3동 2층에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17조에 따른 비상구 설치 의무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위험물질을 직접 취급하는 작업장이 없는 층까지 의무를 확대할 수 없다는 해석이다.
제17조는 위험물질 제조·취급 작업장과 그 작업장이 있는 건축물에 주출입구 외 비상구를 설치하도록 규정한다. 1심은 리튬을 취급하는 작업장이 1층에 있는 만큼 같은 건물 2층도 비상구 설치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고 봤다. 반면 항소심은 ‘건축물’을 하나의 단위로 보고 건물 자체를 출입하는 1층에 비상구를 설치하도록 한 규정으로 해석했다.
항소심이 내세운 근거는 죄형법정주의다. 형벌법규를 피고인에게 불리하게 확장하거나 유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각 층에 비상구를 설치하도록 하려 했다면 ‘건축물의 각 층’이라고 규정했어야 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 해석에 따라 정작 참사가 발생한 2층의 별도 비상구 설치 의무는 인정되지 않았다.
비상구의 실제 이용 가능성에 대한 판단도 갈렸다. 1심은 보안문과 가벽, 전지 적치 등으로 노동자들이 반대편 비상구까지 쉽게 대피하기 어려웠다고 봤다. 반면 항소심은 우회 경로가 있고 보안문도 화재 당시 자동으로 열렸다는 점 등을 들어 유지·이용 의무 위반을 인정하지 않았다. 대피 경로를 몰랐거나 교육받지 못한 문제도 비상구 유지 의무와 구분했다.
이 의원은 이를 “비상식적 궤변”이라고 비판했다. “공장에 불이 나면 노동자가 대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상식조차 묵살했다는 주장이다. 비판의 핵심은 명확하다. 위험물질로 인한 화재가 같은 건물의 다른 층으로 번질 수 있는데도 직접 취급하는 작업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별도 탈출구를 요구하지 못한다면 노동자의 피난 안전은 누가 보장하느냐는 것이다.
판결이 드러낸 해석의 공백은 규칙 개정 과제로 이어진다. 현재 확인되는 제17조에도 ‘각 층’이라는 표현은 없다. 고용노동부령인 해당 규칙의 설치 대상을 구체화하고 위험이 확산할 수 있는 층과 작업공간의 피난 경로를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 주출입구가 불길에 막혀도 다른 경로로 탈출할 수 있는지 비상구를 실제 이용할 수 있는지도 기준에 담아야 한다.
23명이 숨진 현장에서 비상구 의무를 인정하지 못한 판단은 대법원 확정판결로 남았다. 같은 해석이 반복되지 않도록 규정을 보완하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법원이 ‘각 층’이라는 문구가 없다고 책임을 좁혔다면 정부는 그 문구의 부재가 다음 참사에서도 책임을 덜어내는 근거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막을 수 있었던 죽음 앞에서 법원은 책임을 줄일 근거를 찾았다. 법을 엄격히 해석했다는 설명만으로 그 해석이 끝내 누구를 보호했는지에 대한 물음까지 피할 수는 없다. 23명의 죽음과 유가족의 절규 앞에서 법관의 역할이 무엇인지 되묻게 된다. 이용우 의원은 이번 판결을 “비상식적 법 해석”이라고 규탄하며 유족 합의가 책임 회피와 감형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엄격한 중대재해처벌법 양형기준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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