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차세대 인공지능(AI) 메모리 HBM4의 주도권을 놓고 서로 다른 승부수를 띄웠다. 삼성전자는 최신 공정을 적용해 데이터 전송 속도를 끌어올린 반면 SK하이닉스는 적층 수를 높여 용량을 확대했다. AI 시장의 중심이 학습과 추론 중 어디로 기울지에 따라 양사의 성패도 갈릴 전망이다.
15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전날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국내 최대 반도체 전시회 ‘SEDEX 2026’에서 각사의 HBM4 제품과 차세대 AI 메모리 전략을 공개했다.
HBM4는 여러 장의 D램을 수직으로 쌓고 실리콘관통전극으로 연결한 고대역폭메모리다. 데이터 이동 통로인 인터페이스가 2048비트로 전 세대보다 2배 넓어져 AI 가속기가 대규모 데이터를 빠르게 처리하도록 돕는다.
양사가 동일하게 HBM4 시장에 초점을 맞췄지만 제품 설계 방식은 확연히 달랐다. 삼성전자는 최첨단 공정과 수직계열화를, SK하이닉스는 검증된 공정과 고용량 적층을 무기로 선택했다.
삼성전자는 6세대 10나노급인 ‘1c’ D램을 기반으로 12단 HBM4를 개발했다. 경쟁사보다 한 세대 앞선 미세공정을 적용해 데이터 전송 속도와 전력 효율을 높이는 데 주안점을 뒀다.
제품 속도는 핀당 11.7Gbps이며 고객 요구에 따라 최대 13Gbps까지 높일 수 있다. 12단 제품 기준 총대역폭은 최대 초당 2.8TB, 용량은 36GB다.
HBM 최하단에서 D램과 AI 가속기 사이의 데이터 흐름을 제어하는 베이스다이에는 삼성 파운드리의 4나노 공정을 적용했다. 메모리와 시스템반도체, 파운드리, 첨단 패키징을 모두 보유한 종합반도체 기업의 강점을 HBM4에 집약한 것이다.
이 같은 삼성전자의 전략은 막대한 데이터를 동시에 이동해야 하는 AI 학습 시장에서 강점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된다. 초거대 AI 모델을 훈련하는 과정에서는 가속기와 메모리 사이에서 모델 가중치를 끊임없이 주고받아야 해 높은 대역폭이 핵심 경쟁력으로 꼽힌다.
반면 SK하이닉스는 최신 1c보다 생산 안정성이 검증된 5세대 10나노급 ‘1b’ 공정을 채택했다. 대신 D램 적층 수를 삼성전자보다 4개 많은 16단까지 높여 제품당 용량을 48GB로 확대했다.
공정 세대보다 높은 수율과 대용량 구현을 우선한 전략이다. 적층 수가 늘어날수록 웨이퍼와 접합 과정에서 발생하는 불량 가능성도 커지는 만큼 검증된 D램 공정을 활용해 제조 위험을 낮췄다는 분석이다.
SK하이닉스는 AI 추론 서비스가 확대될수록 대역폭 못지않게 메모리 용량이 중요해질 것으로 보고 있다. 챗봇이나 AI 에이전트가 긴 대화와 복잡한 작업을 처리하려면 앞서 입력된 정보를 ‘KV캐시’ 형태로 저장해야 하는데 이용자와 대화 길이가 늘어날수록 필요한 메모리도 급증한다.
HBM 용량을 넘어서면 일부 데이터를 상대적으로 느린 저장장치로 옮겨야 해 AI 서비스의 응답 속도가 떨어진다. SK하이닉스가 16단·48GB 제품을 앞세운 이유다.
안현 SK하이닉스 사장이 SEDEX 기조연설에서 2030년까지 AI 인프라 성능이 현재보다 약 20배 확대돼야 한다고 전망하며 KV캐시 증가를 AI 추론의 주요 병목으로 지목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SK하이닉스는 HBM의 용량 한계를 보완할 ‘고대역폭 플래시(HBF)’도 제시했다. 낸드플래시를 HBM과 유사한 형태로 구성해 HBM4보다 대역폭은 낮지만 패키지당 용량을 10배 이상 높이고 비용을 낮추는 방식이다. 내년 1월까지 관련 기술 표준을 구체화할 계획이다.
SEDEX 2026에서 드러난 두 아키텍처의 대결은 차세대 AI 인프라의 주도권을 결정할 HBM4 전쟁의 서막으로 평가된다.
또한 삼성전자는 개별 제품의 용량 경쟁보다 AI 시스템 전반의 통합 역량을 강조했다. HBM4뿐 아니라 메모리 내부에서 일부 연산을 수행하는 LPDDR-PIM, AI 가속기 위에 메모리를 쌓는 zHBM, 2.3D·3D 첨단 패키징 기술 등을 함께 전시했다.
메모리와 로직 반도체, 파운드리, 패키징을 한 회사 안에서 공동 최적화해 고객 맞춤형 AI 반도체를 공급하겠다는 구상이다. SK하이닉스가 HBM4 베이스다이 생산을 외부 파운드리에 맡기는 것과 대비되는 대목이다.
업계에서는 양사의 전략을 AI 시장의 무게중심에 대한 서로 다른 판단으로 보고 있다. AI 학습 투자가 계속 주도한다면 대역폭을 극대화한 삼성전자에, 대규모 추론 서비스가 빠르게 확산한다면 용량을 앞세운 SK하이닉스에 유리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업계 관계자는 "첨단공정과 초고단 적층 모두 양산 수율이 관건"이라며 "삼성전자는 최신 1c D램과 4나노 베이스다이를 안정적으로 결합해야 하고, SK하이닉스는 업계 최고 수준인 16단 적층을 제한된 제품 높이 안에서 구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향후 HBM 경쟁은 고객별 AI 가속기에 맞춘 ‘커스텀 HBM’으로도 확산할 것으로 보인다"며 "속도와 용량뿐 아니라 전력 효율과 베이스다이 설계, 패키징, 발열 관리까지 종합적인 시스템 경쟁력이 요구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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