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일파의 아들' 우장춘은 어떻게 다시 한국인이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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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 KBS

[마이데일리 = 이승길 기자] 식량난으로 굶주리던 해방 직후의 조국을 위해 홀로 건너와 '종자 주권'의 기틀을 마련한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치열했던 삶이 방송을 통해 재조명된다.

23일 방송되는 KBS 1TV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 34회에서는 친일파의 아들이자 세계적인 육종학자라는 두 개의 이름 사이에서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우장춘의 발자취와 그가 조국에 남긴 헌신의 의미를 되짚어본다.

1945년 해방 직후 한반도는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고, 미곡 자유시장 정책의 여파로 1년 만에 쌀값이 약 12.7배 폭등하며 민생 파탄에 직면했다. 이에 경상남도 농무국장 김종이 일본에서 활동 중이던 우장춘을 찾아가 귀국을 요청했다. 한국어조차 구사하지 못했던 우장춘은 고심 끝에 1950년 3월 8일 부산항에 첫발을 디디며 한국행을 전격 결단했다.

우장춘 / KBS

우장춘의 삶은 늘 아버지의 그림자와 마주해야 했다. 그의 부친인 우범선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가담한 친일파였으며 이후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우장춘은 다윈의 진화론을 보완한 '종의 합성 이론'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지만, 조선인이라는 굴레 탓에 차별을 면치 못했다. 그럼에도 조선인의 성씨를 고수했던 그는 일본에 가족을 남겨둔 채 홀로 조국으로 건너와 뼈를 묻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귀국 후 우장춘이 맞닥뜨린 최우선 과제는 종자 자급이었다. 한국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연구를 멈추지 않은 그는 우리 기후에 최적화된 결구배추 '원예 1호' 개발을 시작으로 감귤, 감자 등 핵심 품종을 잇달아 개량해 냈다. 그 결과 1955년 대한민국은 마침내 종자 자급 기반을 다졌고, 오늘날 1만 4천 개 이상의 신품종을 출원하는 농업 강국으로 도약하는 밑거름이 됐다.

생애 마지막 9년 남짓한 시간을 헌신하며 한국 농업의 기틀을 바꾼 우장춘의 고뇌와 선택의 전말은 23일 오후 9시 30분 '역사스페셜-시간여행자'에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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