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4.0리터 V8 바이터보 엔진 △최고출력 585마력 △제로백 3.6초. 메르세데스-AMG SL 63 4MATIC+(이하 SL63)의 성격을 단번에 보여주는 숫자들이다. 그런데 직접 타보고 가장 놀라웠던 숫자는 따로 있었다. 10㎞/ℓ.
연비를 의식하며 얌전히 달린 것도 아니다. 국내 고속도로에서 가속 성능을 여러 차례 확인했고, 주행 모드를 바꿔가며 V8 엔진의 힘도 적극적으로 끌어냈다. 일반도로와 정체 구간까지 섞인 주행이었다. 그럼에도 공인 복합연비(6.5㎞/ℓ)를 훌쩍 뛰어넘는 수치가 확인됐다.
585마력짜리 V8 로드스터를 마음껏 즐기고도 두 자릿수 연비를 볼 수 있다니. SL 63의 가장 강렬한 반전은 어쩌면 315km/h의 최고속도가 아니라 예상 밖의 효율에 있었다는 평가다.



마이데일리는 최근 SL 63을 시승했다.
SL은 메르세데스-벤츠에서도 특별한 이름이다. 약 70년간 럭셔리 스포츠카의 계보를 이어왔고, 현행 7세대는 그 역사에서 처음으로 메르세데스-AMG가 독자 개발한 SL이다.
단순히 벤츠의 우아한 로드스터에 AMG 배지를 붙인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AMG가 생각하는 퍼포먼스와 SL의 헤리티지를 한 차 안에 담아낸 모델이다.
실물의 존재감은 압도적이다. 특히 전면부가 시선을 강탈한다. 유려한 곡선 위로 AMG 전용 라디에이터 그릴의 14개 수직 슬랫이 이빨처럼 늘어서 있고, 길고 평평한 보닛에는 두 개의 파워 벌지가 솟아 있다. 상어 한 마리가 이빨을 드러낸 채 수면 바로 아래에서 다가오는 듯한 모습이다.
그렇다고 디자인이 난잡하지는 않다. 오히려 선은 매끈하고 절제돼 있다. 전면에서 후면으로 이어지는 곡선은 공격적이면서도 우아하다. 강한데 부담스럽지 않고, 화려한데 과하지 않다. ‘럭셔리 로드스터’라는 SL의 정체성과 AMG의 퍼포먼스 이미지가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섞였다.
무엇보다 긴 보닛과 짧은 오버행, 뒤쪽으로 밀려난 캐빈이 만드는 전형적인 로드스터 비례 위에 AMG 특유의 공격적인 그래픽이 인상적이다. 이런 비례는 차체를 실제보다 더 낮고 넓게 보이게 만든다. 실제 차체는 △길이 4705㎜ △너비 1915㎜ △높이 1365㎜로 낮고 넓다.
21인치 AMG 멀티 스포크 경량 알로이 휠과 노란색 AMG 브레이크 캘리퍼는 이런 성격에 마침표를 찍는다. 측면의 ‘V8 BITURBO’ 레터링 역시 굳이 큰소리를 내지 않고도 이 차가 무엇을 품고 있는지 알려준다.
실내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섞은 이른바 ‘하이퍼아날로그’ 콘셉트다. 12.3인치 운전석 계기반과 11.9인치 세로형 센트럴 디스플레이 같은 디지털 장비 사이에 제트기 터빈을 연상시키는 송풍구와 AMG 특유의 물리적인 요소들이 자리한다.
시트에 몸을 넣으면 더욱 스포츠카답다. 헤드레스트와 등받이가 통합된 AMG 스포츠 시트는 몸을 단단히 잡아주면서도 장거리 이동을 포기할 정도로 딱딱하지는 않다.

압도적인 존재감은 디자인뿐 아니라 주행 성능에서도 확인된다. 가속 페달을 밟았을 때 굼뜬 구간이 거의 없다. 운전자가 가속을 생각하고 오른발에 힘을 싣는 순간 차가 거의 동시에 몸을 앞으로 던진다. 터보가 본격적으로 힘을 쓰기까지 기다렸다가 폭발하는 타입이라기보다, 처음부터 두꺼운 힘을 깔고 있다가 페달을 깊게 밟을수록 더욱 거칠게 몰아친다.
SL 63에는 M177형 3982cc V8 바이터보 가솔린 엔진이 들어간다. 최고출력 585마력, 최대토크 81.6kg·m를 발휘하며 AMG 스피드시프트 MCT 9단 변속기와 AMG 퍼포먼스 4MATIC+ 사륜구동 시스템이 맞물린다. 정지 상태에서 시속 100km까지 걸리는 시간은 단 3.6초. 수치만 놓고 보면 슈퍼카 영역이다.
하지만 실제 감각은 단순히 ‘빠르다’로 끝나지 않는다. 특히 조향이 인상적이다. 운전자가 다음에 무엇을 할지 미리 읽고 기다리는 것처럼 움직인다. 방향을 정하고 스티어링 휠을 꺾으면 차가 한 박자 늦게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준비하고 있던 차체가 그대로 방향을 틀어주는 느낌이다.
SL 최초로 적용된 리어 액슬 스티어링도 이 감각에 힘을 보탠다. 뒷바퀴가 최대 2.5도까지 조향하고, AMG 액티브 라이드 컨트롤 서스펜션은 유압식 시스템으로 차체 움직임을 다듬는다. AMG 퍼포먼스 4MATIC+ 역시 상황에 따라 앞뒤 차축에 구동력을 가변적으로 배분한다.
그래서 묘한 감각이 난다. 바닥에 납작하게 붙어 레일 위를 달리는 스포츠카와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초고성능 보트를 타고 물살을 가르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앞부분은 긴데 몸놀림은 둔하지 않다. 큰 힘으로 수면을 밀어내듯 앞으로 솟구치고, 방향을 틀면 긴 차체가 예상보다 가볍게 따라온다.
SL 63의 주행 모드를 SPORT로 바꿨다. 가속 페달을 깊게 밟자 V8이 기다렸다는 듯 깨어났다. AMG 스피드시프트 MCT 9단 변속기는 엔진회전을 힘이 가장 잘 나오는 영역에 붙들어놓고 빠르게 단수를 바꿨다. 최고출력 585마력, 최대토크 81.6kg·m의 힘이 본격적으로 쏟아지자 이 거대한 로드스터가 체급을 잊은 듯 앞으로 튀어나갔다.
속도가 붙을수록 힘에 부쳐진다는 느낌보다, 아직 꺼내지 않은 힘이 더 남아 있다는 감각이 강했다.
실제 SL 63은 직선에서만 빠른 차도 아니다. AMG 다이내믹 플러스 패키지에는 ‘레이스’ 주행 모드와 전자 제어식 리미티드 슬립 리어 디퍼렌셜, 다이내믹 AMG 엔진 마운트 등이 포함된다. 가속과 변속, 조향과 차체 제어가 따로 노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목표를 향해 동시에 움직인다.

이번 시승에서 가장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연비다. 차량의 성능을 확인하기 위해 주행 스타일을 계속 바꿨다. 일반적인 흐름에 맞춰 달리기도 했지만 페달을 깊게 밟아 가속 성능을 확인했고, 스포츠 주행도 여러 차례 섞었다.
국내 고속도로 특성상 정속 주행만 이어진 것도 아니었다. 속도를 줄였다 다시 높이고, 교통 흐름에 맞춰 가감속을 반복했다.
그런데 트립 컴퓨터에서 최고 10㎞/ℓ 수준의 연비를 확인했다. SL 63의 국내 공인 복합연비는 6.5㎞/ℓ다.

물론 시승 중 트립 컴퓨터에 나타난 숫자와 공인연비를 단순 비교할 수는 없다. 주행거리와 평균속도, 교통 상황, 도로 환경 등에 따라 트립 연비는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점을 감안해도 놀랍기는 마찬가지다. 과장하면 585마력을 써가며 달렸는데 연비계에 두 자릿수가 찍히는 장면 자체가 비현실적이다.
4.0리터 V8이라는 고전적인 고성능 엔진의 매력을 품고 있으면서도 일상에서 연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은 SL 63의 성능을 더욱 매력적으로 만든다. 가속 페달을 밟을 때마다 떨어지는 연료 게이지부터 걱정해야 한다면 결국 오른발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데 상황에 따라 10㎞/ℓ의 연비를 보여줄 수 있다는 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성능을 즐기는 데 있어 죄책감이 조금은 덜어진다.

SL 63의 매력을 높이는 요소는 또 있다. 소프트톱을 열면 차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지붕이 사라지면서 V8 배기음이 훨씬 직접적으로 들어오고, 주변 풍경과 공기까지 운전 경험의 일부가 된다.
흥미로운 건 중앙 디스플레이다. SL의 11.9인치 센트럴 디스플레이는 전동식으로 12도에서 32도까지 각도를 조절할 수 있다. 처음에는 굳이 화면까지 움직이게 만들 필요가 있을까 싶었는데, 지붕을 열고 달려보니 이유를 바로 알았다. 햇빛 때문이다.
컨버터블은 지붕이 열리는 순간 실내가 사실상 외부 환경에 그대로 노출된다. 태양의 위치에 따라 화면 반사가 달라지는데, 디스플레이 각도를 세워 반사를 줄이면 시인성이 확실히 좋아진다.
엄청난 기술은 아니지만,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고민의 흔적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작은 세심함들이 쌓여 AMG 브랜드의 가치를 만든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이다.
운전자와 동승자의 머리와 목 주변으로 따뜻한 공기를 보내는 에어스카프 역시 같은 맥락이다. 로드스터를 날씨 좋은 봄날에만 타는 장난감으로 두지 않고 실제 사용할 수 있는 기간을 최대한 넓혀주는 장비다.


다만 2열에 대한 아쉬움은 남는다.
7세대 SL은 2+2 구조를 채택했다. 이전보다 활용성을 높였다는 의미는 분명하지만 ‘4인승’이라는 표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조수석을 최대한 앞으로 당겨도 성인이 장시간 앉기에는 공간이 빠듯하다. 오히려 가방이나 작은 짐을 올려놓는 공간으로 활용할 때 훨씬 만족스럽다.
특히 오픈 주행 시 실내로 들이치는 바람을 줄이는 망사 형태의 윈드 디플렉터를 설치하면 사실상 2열 승객 공간은 더욱 제한된다. 후방 공간 위를 장비가 차지하면서 머리 공간 활용도 어려워진다.


그렇다고 단점으로만 볼 필요도 없다. 로드스터에서 가방 몇 개를 실내에 던져놓을 공간이 있다는 것 자체가 꽤 유용하다. SL을 슈퍼카처럼 모셔두지 않고 실제 일상에서도 끌고 다니려면 이런 공간은 생각보다 중요하다.
가격 2억5000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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