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빅4, 하반기 승부수③] 최태원, HBM 넘어 ‘AI 인프라 SK’로…15GW·1100조 청사진 시험대

마이데일리

[편집자주] 2026년 대한민국 4대 그룹의 시계가 하반기에 접어들었다. 이재용·최태원·정의선·구광모 회장은 상반기 인공지능과 반도체, 모빌리티, 에너지 등 미래 산업을 둘러싼 승부수를 잇달아 던지며 각자의 성장 방향을 선명히 했다. 마이데일리는 상반기 이들의 선택과 성과를 되짚고, 발표한 투자와 전략을 실제 생산·수주·실적으로 증명해야 할 하반기 승부처를 5회에 걸쳐 짚어본다.

최태원 서울상공회의소 회장이 지난 1월 7일 오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2026 서울시 신년인사회에 참석해 신년사를 하고 있다. /뉴시스

[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의 올해 승부수는 단순히 SK하이닉스 투자 확대에 그치지 않는다. 고대역폭메모리(HBM)에서 확보한 주도권을 출발점으로 데이터센터와 전력·에너지, 통신, 인공지능(AI) 서비스까지 연결해 SK 전체를 하나의 AI 인프라 그룹으로 성장시키는 것이 최 회장의 구상이다. HBM에서 벌고, 데이터센터로 수요를 만들고, 에너지와 통신으로 이를 뒷받침한 뒤 AI 서비스까지 연결하는 것이 올해 투자 공식인 셈이다.

출발점인 반도체에서는 이미 압도적인 실적이 입증됐다. SK하이닉스는 올해 1분기 창사 이래 최대 분기 실적을 기록한 데 이어 다음 2분기 다시 기록을 갈아치웠다. 사상 반기 매출이 100조원을 넘어서는 이례적인 장면도 나왔다. AI 인프라 투자가 확대되면서 HBM과 AI 서버용 D램, 기업용 SSD 등 고부가 제품 수요가 폭발한 결과다.

그러나 최 회장의 시선은 ‘HBM 다음’으로 향하고 있다. 지난 6월 전국에 15GW 규모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용인·청주·서남권을 잇는 AI 메모리 생산벨트에 중장기적으로 1100조원을 투입하는 구상을 공개했다. 지난해까지 그룹 체질을 가볍게 만드는 리밸런싱에 집중했다면, 올해부터는 그 위에 AI 인프라를 채워 넣는 ‘확장 국면’으로 넘어가는 모습이다.

◇ “승풍파랑”…연초부터 AI로 방향 못 박은 최태원

최 회장은 올해 첫날부터 그룹의 방향을 AI로 명확하게 못 박았다. 그는 신년사에서 ‘바람을 타고 파도를 헤쳐 나간다’는 의미의 사자성어 ‘승풍파랑(乘風破浪)’을 꺼내 들며 “AI라는 거대한 변화의 바람을 타고 글로벌 시장의 거친 파도를 거침없이 헤쳐 나가자”고 주문했다.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SK가 가진 기존 자산을 AI로 연결하는 일이었다. 최 회장은 “메모리, ICT, 에너지솔루션, 배터리와 이를 잇는 서비스에 이르기까지 SK가 수십 년간 걸어온 길은 결국 오늘의 AI 시대를 준비해 온 여정”이라고 평가했다. 반도체만 AI 사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에너지·통신·건설·바이오 등 계열사가 가진 역량을 묶어 ‘AI 통합 솔루션’을 만들겠다는 의미였다.

지난 2월 미국 워싱턴DC에서 열린 ‘트랜스 퍼시픽 다이얼로그(TPD) 2026’에서도 같은 문제의식을 이어갔다. 최 회장은 AI가 산업구조 전체를 바꾸면서 막대한 전력과 자본이 필요해질 것으로 전망하며 “AI 경쟁을 멈출 수 없는 상황에서 막대한 AI 인프라 비용을 감당할 자본과 자원이 있어야 AI 솔루션을 확보하고 경쟁의 선두 주자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AI 반도체만 확보해서는 안 되고 이를 가동할 데이터센터와 전력, 금융 구조까지 함께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 골자였다.

상반기 최 회장의 행보를 관통하는 지점도 여기에 있다. SK하이닉스의 HBM 경쟁력을 중심에 두되 이를 그룹 전체 사업과 연결해 새로운 수요와 수익원을 만들어내는 것. ‘AI 메모리 회사’를 가진 그룹에서 ‘AI 산업의 기반을 제공하는 그룹’으로 넘어가겠다는 구상이다.

최태원(왼쪽) SK그룹 회장과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6월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SK서린빌딩에서 SK-엔비디아 협력 관련 언론 브리핑을 마친 뒤 손을 맞잡고 있다. /뉴시스

◇ GTC 직접 찾은 최태원…젠슨 황과 ‘HBM 동맹’ 재확인

최 회장식 AI 전략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는 단연 SK하이닉스다. 최 회장은 지난 3월 처음으로 미국 새너제이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연례 개발자 행사 ‘GTC 2026’에 직접 참석했다. 현장에서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협력 관계를 재확인했고 SK하이닉스 역시 HBM3E와 HBM4, 고객 맞춤형 커스텀 HBM 등을 전면에 내세웠다.

당시 최 회장은 AI 확대로 메모리 웨이퍼 공급 부족이 오는 2030년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글로벌 시장에서 HBM 공급을 늘리고 싶어도 공장과 전력, 용수, 장비, 인력을 단기간에 확보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당시 카운터포인트 집계 기준 SK하이닉스의 HBM 시장 점유율은 57%로 세계 1위였다.

최 회장과 엔비디아의 관계는 6월 젠슨 황 CEO의 방한에서도 다시 확인됐다. 황 CEO는 최 회장이 참석한 자리에서 SK를 엔비디아의 가장 큰 메모리 파트너라고 평가하며 AI 산업 성장 과정에서 양사의 협력이 갖는 의미를 강조했다. SK하이닉스는 엔비디아의 차세대 AI 플랫폼인 베라 루빈에 들어가는 HBM4 공급 경쟁에서도 핵심 파트너로 자리 잡고 있다.

이는 2012년 최 회장이 SK하이닉스 인수를 밀어붙인 이후 14년 만에 만들어낸 결과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당시 적자 기업이었던 SK하이닉스 인수는 그룹 내부에서조차 위험한 선택이라는 우려가 있었지만, 이후 HBM이라는 당시 비주류 기술에 지속적으로 투자한 것이 AI 시대에 결정적인 자산이 됐다. 로이터는 SK하이닉스가 HBM에 장기간 투자한 결과 세계 최대 HBM 생산업체로 성장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 상반기 131.9조 매출…HBM이 만든 ‘역대급 실적’

이러한 기술 리더십은 상반기 실적으로 직결됐다. SK하이닉스의 1분기 매출은 52조5763억원, 영업이익은 37조6103억원으로 각각 분기 사상 최대였다. 2분기에는 매출 79조3187억원과 영업이익 60조5426억원을 기록하며 한 분기 만에 다시 최고치를 바꿨다. 상반기 누적으로 보면 매출 131조8950억원, 영업이익 98조1529억원에 이른다.

HBM뿐 아니라 AI 서버용 고성능 D램과 기업용 SSD 수요가 함께 늘면서 메모리 시장 전반의 가격과 수익성이 크게 개선됐다. SK하이닉스는 약 10개 주요 고객과 장기공급계약을 맺는 등 AI 수요를 단기적인 호황이 아니라 구조적인 성장으로 연결하기 위한 작업도 진행하고 있다. 2분기 말 현금성 자산은 88조원으로 늘어난 반면 총차입금은 18조6000억원으로 줄어 순현금 규모가 69조4000억원까지 확대됐다.

최 회장 입장에서 이는 단순한 계열사 한 곳의 호실적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SK가 추진해 온 리밸런싱의 목적 자체가 비핵심 자산에서 자금을 빼 AI와 반도체 등 경쟁력이 확실한 사업으로 재배치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가 막대한 현금을 만들어내기 시작하면서 ‘선택과 집중’ 전략을 그룹 전체로 확장할 수 있는 재무적 기반도 강해졌다.

◇ ‘정리할 건 정리했다’…리밸런싱도 숫자로 성과

AI 투자 확대의 이면에는 지난 2년간 진행한 강도 높은 사업 재편이 있었다. SK그룹은 2024년부터 중복 사업을 정리하고 비핵심 자산을 매각하는 포트폴리오 리밸런싱을 추진했다. 한국신용평가 집계 기준 최근 2년간 자산 효율화 규모는 약 13조원에 달했고, 2024년 219개였던 계열사 수는 지난 5월 151개까지 줄었다.

SK스페셜티 지분 85% 매각으로 2조6308억원을 확보했고 SK바이오팜 지분 일부도 1조2500억원에 처분했다. 에너지 부문에서는 SK이노베이션과 SK E&S를 합쳐 사업 간 중복을 줄이고 시너지를 높이는 작업을 진행했다.

재무지표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지주사 SK㈜의 올해 1분기 연결 매출은 36조7513억원, 영업이익은 3조6731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각각 19%, 760% 늘었다. 순차입금은 63조231억원에서 49조5543억원으로 21% 감소했고 부채비율도 172.8%에서 135.7%로 낮아졌다. 반도체 호황의 영향이 컸지만 SK는 지난 2년간의 리밸런싱 역시 수익성과 재무건전성 개선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최 회장이 연초 “더 멀리,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단단한 기초체력을 다시 회복하고 있다”고 평가한 배경도 여기에 있다. 그룹의 몸집을 무조건 키우기보다 필요한 사업은 남기고 불필요한 자산은 정리한 뒤 AI 중심으로 다시 자본을 투입할 준비를 마친 셈이다.

최태원 SK 회장(왼쪽)이 지난 6월 29일 청와대 영빈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뉴시스

◇ HBM 다음은 데이터센터…‘15GW AI 인프라’ 승부수

상반기 최 회장이 보여준 가장 큰 변화는 HBM에서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지난 6월 29일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전국에 총 15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단계적으로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내놨다.

구상은 두 단계다. 우선 전력과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지역에 5GW 규모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고 AI 수요와 투자 여건을 살펴 2035년까지 추가 10GW를 순차적으로 늘린다. 전체 프로젝트에는 전략적 파트너의 투자와 고객사 입주계약,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을 포함해 약 1000조원 규모의 투자가 이뤄질 것으로 SK는 추산했다. 즉 1000조원 전액을 SK가 자체 자금으로 집행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미 첫 퍼즐도 맞추고 있다. SK텔레콤은 아마존웹서비스(AWS)와 2027년 하반기 가동을 목표로 울산 AI 데이터센터를 건설하고 있으며 엔비디아와도 차세대 ‘AI 팩토리’ 구축을 추진하고 있다. 메모리를 공급하는 SK하이닉스와 데이터센터를 담당할 SK텔레콤, 전력·에너지 역량을 가진 계열사를 한데 묶어 AI 인프라 전체에서 수익을 만들겠다는 전략이다.

최 회장은 이를 ‘지능 생산 시장’이라고 표현했다. 과거 산업혁명이 공장에서 물건을 대량생산하는 시대를 열었다면 AI 시대에는 데이터센터에서 ‘지능’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새로운 시장이 만들어질 수 있다는 시각이다.

◇ 용인·청주·서남권 1100조…메모리 생산능력도 ‘선제 확장’

AI 데이터센터가 수요 측면을 맡고 있다면 반도체 생산벨트는 공급을 담당하는 전략이다. SK는 같은 자리에서 용인·청주·서남권을 잇는 AI 메모리 생산벨트에 총 1100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 로드맵을 제시했다.

핵심은 용인이다. SK하이닉스는 당초 2045년 완공 예정이던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건설 일정을 12년 앞당겨 2033년까지 4개 팹 건설을 마무리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후 생산장비까지 순차적으로 투입되면 용인 클러스터에 들어가는 전체 투자액은 약 600조원으로 예상된다.

청주에는 약 100조원을 투자해 낸드 신규 팹과 생산장비를 구축하고 HBM 후공정을 담당하는 첨단 패키징 능력도 강화한다. 여기에 기존 거점만으로 향후 AI 메모리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판단해 서남권에 또 다른 대형 생산거점을 마련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상반기 최 회장의 투자 공식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HBM 공급 확대→ HBM 소비 데이터센터 구축→ 통신과 에너지 내부 역량 연결로 이어지는 구조다. SK하이닉스를 정점으로 여러 계열사를 AI 밸류체인 안에 다시 배치하겠다는 것이다.

최태원 SK그룹 회장, 곽노정 SK하이닉스 CEO, 고승범 SK하이닉스 사외이사 겸 이사회 의장 등이 지난달 10일(현지 시간) 오전 미국 뉴욕 나스닥 마켓사이트에서 열린 나스닥 '오프닝 벨' 행사에서 타종하며 나스닥 ARD 거래 개시를 알리고 있다. /SK하이닉스

◇ 하반기 첫 결실은 나스닥…‘하이닉스 베팅’ 월가까지 통했다

상반기에 던진 승부수는 하반기 들어 글로벌 자본시장으로 이어졌다.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미국 나스닥에 미국주식예탁증서(ADR)를 상장하며 약 265억달러를 조달했다. 공모 수요는 공급물량의 7배를 웃돌았고, 조달 자금은 AI 반도체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국내 신규 공장과 생산설비 투자 등에 활용된다.

최 회장은 뉴욕 나스닥 개장식에서 직접 오프닝 벨을 울렸다. 2012년 적자기업 하이닉스를 인수했던 선택이 14년 뒤 세계 최대 AI 메모리 기업 중 하나의 미국 증시 상장으로 이어진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최 회장은 당시 “오랫동안 기다려온 역사적인 순간”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ADR 상장은 단순한 자금조달 이상의 의미도 갖는다. SK하이닉스는 미국 증시에 직접 접근함으로써 미국 기관투자자 기반을 확대하고,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아온 미국 마이크론과의 밸류에이션 격차를 줄일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다만 신주 발행에 따른 기존 주주의 지분 희석과 대규모 반도체 증설 이후 공급 과잉 가능성은 향후 자본시장이 지켜볼 변수다.

◇ 하이닉스만 잘해서는 부족…하반기는 ‘SK 전체의 AI’ 시험대

또 SK하이닉스가 너무 잘 나간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룹의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 SK㈜와 SK스퀘어 등 주요 회사의 실적 개선에도 하이닉스의 막대한 이익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만큼 반도체 호황이 꺾였을 때에도 그룹 전체가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수익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이는 SK하이닉스의 기록적인 실적과 SK㈜의 재무개선을 함께 놓고 볼 때 가능한 해석이다.

AI 투자 자체의 속도 조절도 중요하다. 최 회장 역시 지난 4월 메모리 공급 부족에 대해 “돈을 많이 버니 좋은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상황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는 취지로 경계했다.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한 메모리 산업은 수요 전망이 빗나갈 경우 공급 과잉으로 빠르게 돌아설 수 있는 대표적인 경기순환 산업이다.

15GW AI 데이터센터 계획도 부지와 전력망, 냉각설비, 고객 확보, 자금조달이라는 과제를 모두 풀어야 실제 사업이 된다. 특히 1000조원 규모로 추산되는 프로젝트는 전략적 파트너와 고객, 금융시장 참여가 전제돼 있어 SK가 혼자 밀어붙일 수 있는 사업이 아니다. 반도체 생산벨트 역시 1100조원이라는 거대한 숫자보다 장기간에 걸쳐 수요에 맞춰 투자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중요하다.

최 회장은 하반기 들어 그룹 내부에도 다시 속도를 주문하고 있다. 지난 13일 끝난 ‘2026 New 이천포럼’에서 그는 “360도 전방위로, 전속력으로 AI 전환에 돌입해야 할 때”라며 ‘1인 1 AI 에이전트’를 제안했다. 개인이 AI를 쓰는 수준을 넘어 조직 전체의 일하는 방식과 운영개선(O/I)을 AI로 바꾸겠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AX의 본질 자체를 운영개선이라고 규정했다.

재계 관계자는 "최 회장은 상반기 SK의 성과를 SK하이닉스 하나의 이야기에서 그룹 전체의 이야기로 넓혀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며 "특히 올하반기는 ‘AI 반도체 강자 SK’를 넘어 ‘AI 인프라 그룹 SK’라는 청사진이 실제 사업모델로 작동할 수 있는지를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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