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아연, 3인의 선택이 만든 반세기…‘제련 불모지’서 글로벌 핵심광물로

마이데일리
(왼쪽부터) 최창영 명예회장, 故최창걸 명예회장, 최창근 명예회장이 지난 2002년 2월 열린 고려아연 명예회장, 회장, 부회장 이취임식에 참석했다. /고려아연

[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1970년대 국내 비철금속 산업의 불모지에서 시작된 고려아연의 도전이 52년 만에 글로벌 핵심광물 공급망으로 뻗어나가고 있다. 창업주의 결단 위에 최창걸 회장의 경영, 최창영 명예회장의 기술, 최창근 명예회장의 자원 경쟁력이 차례로 쌓였고, 현 경영진은 이 유산을 핵심광물과 미래 신사업으로 확장하고 있다.

올해 역대 최대 상반기 실적과 106분기 연속 영업흑자를 기록하면서 이를 가능하게 한 반세기의 축적에도 관심이 쏠린다. 단순한 아연·연 제련기업에서 금·은·동과 각종 희소금속을 함께 생산하는 멀티메탈 기업으로 진화한 과정에는 세대마다 다른 과제를 풀어낸 경영진의 선택이 자리하고 있다는 평가다.

◇불모지에 세운 제련소…최창걸 회장, 성장의 틀 만들다

산업화가 한창이던 1970년대에도 국내 비철금속 산업 기반은 취약했다. 원료 대부분을 해외에 의존했고 제련 기술 역시 선진국과 격차가 컸다. 이런 상황에서 대규모 비철금속 제련사업에 뛰어드는 것은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최기호 창업주와 함께 고려아연을 세운 최창걸 회장은 신생기업이 장기간 투자할 수 있는 경영 기반을 만드는 데 집중했다.

최 회장은 회사 전체의 경영을 총괄하며 조직과 재무, 주요 사업 현안을 두루 챙겼다. 막대한 설비투자가 필요한 제련업의 특성상 단기 성과보다 지속적인 투자와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기업의 틀을 갖추는 일이 우선이었다.

이 같은 경영 기반은 이후 고려아연이 설비와 기술에 꾸준히 투자하며 글로벌 제련기업으로 성장하는 토대가 됐다.

◇최창영, ‘기술로 승부’…버려지던 잔재에서 금속을 찾다

고려아연에 있어 첫 번째 도약이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었다면 이후 과제는 해외 기술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경쟁력을 확보하는 일이었다. 그 역할을 맡은 인물이 최창영 명예회장이었다.

금속공학을 전공한 최창영 명예회장은 고려아연의 성장 방향을 ‘기술’에 맞췄다. 선진 제련기술을 도입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공정을 스스로 개선하고 하나의 원료에서 더 많은 금속을 회수할 수 있는 기술을 축적하는 데 힘을 쏟았다.

대표적인 성과가 제련 과정에서 발생한 잔재를 다시 처리하는 TSL(Top Submerged Lance) 기술이다.

기존에는 버려질 수 있었던 제련 잔재를 다시 공정에 투입해 유가금속을 회수하면서 자원 활용도를 높였다. 이는 고려아연이 오늘날 여러 금속을 한꺼번에 회수하는 통합제련 체계를 구축하는 중요한 기술적 기반이 됐다. 특히 기술을 통해 원료의 가치를 끝까지 끌어내는 방식은 이후 고려아연 사업모델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최 명예회장의 기술 경영은 외부에서도 인정받았다. 2006년 ‘한국을 일으킨 60인의 엔지니어’에 선정됐고, 2010년에는 한국공학한림원이 뽑은 ‘대한민국 100대 기술인’에 이름을 올렸다.

◇최창근, 세계 자원현장을 누비다…원료 경쟁력 확보

기술력을 확보한 뒤에는 안정적으로 원료를 확보하는 문제가 남았다. 국내에서 필요한 광물을 충분히 조달하기 어려운 제련업 특성상 해외 자원 공급망을 확보하지 못하면 생산 경쟁력 역시 유지하기 어려웠다.

최창근 명예회장은 세계 각지의 광산과 자원개발 현장을 무대로 해법을 찾았다. 원료 대부분을 수입해야 하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 해외 자원 현장을 돌아다니며 원료 공급망 확대에 힘을 쏟았다. 제련기업의 경쟁력은 생산기술뿐 아니라 필요한 원료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는 능력에서 나온다는 판단이었다.

이를 통해 고려아연은 글로벌 자원시장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원료 조달 네트워크를 넓혀갔다. 최창걸 회장이 경영 기반을 만들고 최창영 명예회장이 기술력을 끌어올렸다면 최창근 명예회장은 여기에 자원 경쟁력을 더한 셈이다.

3가지 경쟁력이 맞물리면서 고려아연의 사업 구조도 달라졌다. 아연과 연을 생산하는 전통적인 제련기업에서 벗어나 하나의 원료와 제련 부산물에서 금·은·동을 비롯해 다양한 희소금속까지 회수하는 멀티메탈 통합제련 체계를 완성했다. 특정 금속의 가격과 수요에만 의존하지 않고 여러 금속이 서로의 시황 변동을 보완하는 구조가 만들어진 것도 이 과정에서다.

◇최윤범, 선대의 멀티메탈 경쟁력을 ‘핵심광물’로 확장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을 비롯한 현 경영진은 선대가 구축한 경영·기술·자원 경쟁력을 새로운 산업환경에 맞게 확장하고 있다. 가장 먼저 주목한 분야는 핵심광물이다. 미·중 갈등과 공급망 재편으로 특정 국가에 편중된 전략광물 공급망이 경제안보 문제로 떠오르면서 기존 통합제련 기술의 가치도 다시 커지고 있다.

특히 고려아연은 연구개발과 설비투자를 통해 같은 원료에서 더 많은 유가금속을 회수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현재 통합공정의 유가금속 회수율은 최대 96.5%, 핵심광물 회수율은 80%대까지 높아졌다.

오는 2028년에는 동 생산능력을 연간 15만톤으로 확대하고 갈륨과 게르마늄 생산도 본격화한다는 계획이다.

최 회장은 기존 제련사업 밖에서도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았다. 지난 2022년 △신재생에너지·그린수소 △이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자원순환을 3대 축으로 하는 ‘트로이카 드라이브’를 내놓았다. 반세기 동안 제련업에서 쌓은 금속과 자원 분야 경쟁력을 미래산업으로 연결하겠다는 구상이다.

호주에서는 신재생에너지와 그린수소 사업을 확대하고 있으며 이차전지 소재 밸류체인 구축과 전자폐기물·스크랩을 활용한 자원순환 사업도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과거 하나의 광석에서 최대한 많은 금속을 회수했던 기술 경쟁력이 이제는 폐자원에서 다시 금속을 뽑아내는 순환경제 사업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는 셈이다.

◇106분기 연속 흑자…반세기 축적이 만든 실적 체력

52년간 쌓아 올린 사업구조는 실적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고려아연은 올해 2분기 연결 기준 매출 6조3730억원, 영업이익 5870억원을 기록했다. 전년동기 대비 각각 66.6%, 126.8% 증가했다. 상반기 기준으로는 매출과 영업이익 모두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특히 2분기 금과 은 가격이 조정을 받는 상황에서도 아연 가격 상승과 동 판매량 증가, 핵심광물 판매 확대가 실적을 뒷받침했다. KZ트레이딩과 호주 SMC, 미국 페달포인트 등 계열사의 실적 개선도 힘을 보탰다.

무엇보다 고려아연은 분기 실적을 공개하기 시작한 이후 106분기 연속 영업흑자를 이어가고 있다.

한 종류의 금속에 의존하지 않고 아연·연에서 금·은·동과 희소금속까지 사업을 넓혀온 멀티메탈 구조가 시황 변동을 흡수하는 실적 체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평가다.

◇온산에서 미국으로…52년 제련기술, 경제안보 자산 됐다

고려아연의 다음 무대는 미국이다. 미국이 핵심광물을 국가안보와 직결된 전략자산으로 규정하고 자국 중심의 공급망 재건에 나서면서 온산제련소에서 축적한 고려아연의 통합제련 기술도 새로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참석한 핵심광물 관련 회의에서 고려아연의 미국 투자 프로젝트를 주요 공급망 구축 사례로 직접 거론하기도 했다.

고려아연은 ‘프로젝트 크루서블(Project Crucible)’을 통해 한국에서 축적한 제련 기술과 미국의 자원·산업 인프라를 연결한다는 구상이다.

미국 통합제련소에서는 아연·연·동뿐 아니라 갈륨·게르마늄·인듐·안티모니 등 다양한 핵심광물을 생산하는 방안이 추진되고 있다.

52년 전 한국의 산업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시작한 제련사업이 이제는 미국의 핵심광물 공급망 재건에 활용되는 단계까지 확장된 것이다. 지난 52년을 만든 ‘비전과 도전정신’이 앞으로의 50년을 어떤 모습으로 바꿔놓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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