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규의 AI 컨텍스터 선언 20] 텍스터는 같아지고, 컨텍스터는 달라진다

프라임경제
[프라임경제] 최근 몇 년 사이 자기소개서나 축사, 감사 인사말처럼 누구나 한 번쯤 쓰게 되는 글을 여러 편 받아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서로 다른 사람이 쓴 글인데, 어딘가 낯이 익다. 비유도, 문장의 흐름도, 심지어 마무리 짓는 방식까지 겹친다. 다들 각자의 이야기를 담으려 애썼을 텐데, 왜 이렇게 닮아 있을까.

미국 산타클라라대학교(Santa Clara University) 연구팀이 2024년 6월 이 질문을 실험으로 풀어냈다. 연구팀은 참가자에게 정답이 없는 질문을 던지고,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최대한 많이 적어보라고 했다. 예를 들어 "봉제 인형을 더 재미있게 갖고 놀 수 있는 방법은?" 같은 질문이었다. 이렇게 총 33명의 참가자 데이터가 분석에 쓰였다. 

참가자들은 이 과제를 한 번은 챗지피티에게 물어보며 풀었고, 한 번은 짧고 모호한 문구가 적힌 카드를 뽑아가며 풀었다. 카드에는 "거꾸로 뒤집어보라" 같은 문장이 적혀 있을 뿐, 인공지능(AI)처럼 구체적인 답을 주지는 않았다. 참가자들은 챗지피티를 쓸 때 더 많은 아이디어를 냈고, 서술도 평균적으로 길어졌다.

그런데 뜻밖의 결과가 있었다. 한 사람이 낸 아이디어만 놓고 보면, 챗지피티를 썼을 때와 카드를 썼을 때 다양성에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참가자 전체를 한자리에 모아 놓고 보니, 챗지피티를 쓴 사람들의 아이디어끼리가 서로 더 겹쳐 있었다. 각자는 더 많이, 더 길게 썼지만, 모아 놓으면 오히려 내용이 좁아진 것이다. 

연구팀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연구팀은 같은 AI 모델이 서로 다른 사용자에게 유사한 제안을 건넸기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했다. 더 눈에 띄는 결과도 있었다. 챗지피티를 쓴 참가자들은 자신이 낸 아이디어에 대해 느끼는 책임감이 더 낮았다. 아이디어는 더 많이 냈지만, 그것이 온전히 자기 것이라는 감각이 점차 사라진 것이다.

이것이 실험실 안, 소수의 참가자에게서만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닐지 모른다. 미국 조지타운대학교(Georgetown University) 연구팀은 2025년 9월 이 물음을 더 큰 규모로 검증했다. 

연구팀은 미국 동부의 한 사립대학교가 입학 지원자에게 내는 자기소개 에세이 문항을 그대로 가져왔다. 그리고 그 문항에 실제로 제출된 지원자들의 에세이를 무작위로 뽑았다. 같은 문항으로 챗지피티에게도 대학 지원자인 것처럼 자기소개 에세이를 써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이 쓴 에세이와 챗지피티가 쓴 에세이를 각각 모아 2200편을 비교했고, 세 차례에 걸쳐 연구를 진행했다.

연구팀은 간단한 방법을 썼다. 에세이를 두 편, 세 편, 네 편… 이렇게 묶어가며 함께 읽었다. 그리고 매번 그 묶음의 다양성 점수를 계산했다. 사람이 쓴 에세이는 묶는 편수를 늘릴수록 그 안의 이야기도 계속 다양해졌다. 열 번째, 스무 번째 에세이를 더해도 그전까지 없던 이야기가 새로 나왔다는 뜻이다. 

반면 챗지피티가 쓴 에세이는 몇 편만 묶어도 다양성이 금세 한계에 부딪혔다. 편수를 아무리 늘려도 비슷한 이야기가 반복됐다. 그 격차를 수치로 재보니, 사람 쪽이 챗지피티 쪽보다 최소 2배에서 많게는 8배까지 컸다. 에세이를 더 많이 모을수록 이 격차는 더 벌어졌다. 연구팀은 챗지피티에 "최대한 창의적으로 써달라"는 지시를 덧붙이고, 같은 단어를 반복하지 않도록 설정도 바꿔보았다. 그러자 에세이 한 편의 다채로움은 사람이 쓴 것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러 편을 모아 놓으면, 챗지피티가 쓴 글들은 여전히 사람이 쓴 글들보다 서로 더 닮아 있었다.

실험실의 소규모 비교와 2200편의 에세이 분석은 조건이 전혀 다르다. 그런데도 결론은 같은 곳을 가리킨다. AI를 쓰는 개인은 더 많은 결과물을 더 빠르게 만들어낸다. 다만 같은 AI 모델을 쓰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았을 때만 보이는 진실이 있다. 그들이 만든 결과물은 서로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는 것. 개인이 체감하는 생산성과 집단이 맞이하는 결과가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셈이다.

이 연재가 줄곧 구분해온 두 태도가 있다. AI가 내놓은 결과물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멈추는 사람을 텍스터, 그 결과물을 발판 삼아 스스로 맥락을 더하고 판단하는 사람을 컨텍스터라 부른다. 텍스터는 자신의 화면 안에서만 판단한다. AI가 준 아이디어가 이전보다 많고 상세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자신의 결과물이 다른 누군가의 화면에서 나온 결과물과 얼마나 겹치는지, 애초에 텍스터는 살펴보지 않는다.

컨텍스터는 화면 밖을 본다. AI가 내놓은 답이 그럴듯할수록, 그 답이 지금 이 순간 다른 수많은 사람에게도 똑같이 그럴듯하게 보이고 있을 가능성을 함께 떠올린다. 그래서 AI의 제안을 받아 든 다음에도 한 걸음을 더 걷는다. 그 제안에는 없는, 자신만의 경험이나 관찰을 하나 더 얹는다. 그리고 그 아이디어를 자기 것이라 부를 수 있는지도 스스로에게 묻는다. 챗지피티를 쓴 참가자들의 책임감이 낮아졌다는 결과는 우연이 아니다. 도구가 내놓은 답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답에 대한 소유감도 함께 옅어지기 때문이다.

닮음은 편리함의 대가로 조용히 찾아온다. 처음에는 개인의 체감으로만 남아 있다가, 같은 도구를 쓰는 사람이 늘어날수록 서서히 집단의 풍경이 된다. 그 풍경 안에서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남는 일은 이제 저절로 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 지켜야 하는 일이 되었다. 오늘 우리가 만든 결과물을 다시 보자. 그것은 우리만의 목소리인가, 아니면 지금 이 순간 누군가도 똑같이 받아 들고 있는 답인가.

최홍규 EBS 연구위원 / 미디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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