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초격차 기술과 품질로만 경쟁하던 시대는 끝났다. 미 트럼프 행정부발 관세 폭탄이 빚은 보호무역주의와 파편화된 공급망이 기업 경영의 핵심 변수로 부각하면서 기업의 생산과 수출, 투자 전략 등을 흔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미국과 이란 전쟁이 낳은 지정학적 리스크라는 암초까지 기업 경영의 새로운 상수(常數)로 자리 잡으면서 기업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 마이데일리는 우리 기업들이 맞닥뜨린 지정학적 위기의 실체를 진단하고, 기업들의 대응 전략과 하반기 경영 환경에 미칠 영향을 짚어본다.

[마이데일리 = 심지원 기자] 중동발 지정학적 리스크가 글로벌 산업계를 뒤흔드는 가운데 국내 정유업계는 고유가에 따른 재고평가이익과 정제마진 개선에 힘입어 상반기 실적을 가까스로 방어했다. 정유 부문이 주요 그룹의 실적 하락을 상쇄하는 버팀목 역할을 하며 구원투수로 나섰다.
그러나 하반기 실적 불확실성은 더욱 커질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유가 상승에 따른 실적 개선은 재고평가이익에 크게 의존한 일회성 성격이 짙은 데다, 지정학 리스크 장기화로 원유 도입 비용과 물류비 부담이 커지고 있어서다.
28일 정유 4사(SK이노베이션·GS칼텍스·에쓰오일·HD현대오일뱅크)의 1분기 경영실적에 따르면 이들 기업의 1분기 합산 영업이익은 합산 5조9635억원으로, 6조원에 육박했다. 각사 영업익은 SK이노베이션 2조1622억원, GS칼텍스 1조6367억원, 에쓰오일 1조2311억원, HD현대오일뱅크 9335억원이다. 이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초기인 2022년 2분기(7조5536억원) 이후 최대 규모다.
실제 SK이노베이션, GS 등 주요 그룹의 1분기 영업이익에서 정유 계열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을 훌쩍 넘어섰다. 배터리·석유화학 등 그룹 내 핵심 사업부문이 수요 둔화와 원가 부담으로 적자를 기록하거나 이익이 급감한 상황에서 정유 부문이 실적 버팀목 역할을 한 셈이다.
SK이노베이션은 1분기 연결 영업이익 2조1622억원 중 정유 자회사 SK에너지가 1조2832억원을 기록해 비중이 59.4%에 달했다. 여기에 정유사업을 겸하는 SK인천석유화학(6471억원)까지 더하면 정유 관련 비중은 90%에 달한다.
GS도 비슷한 흐름이다. GS의 1분기 연결 영업이익은 1조2586억원으로, 이 중 정유 중간지주 역할을 하는 GS에너지가 1조585억원을 기록해 비중이 84.1%에 이르렀다. 다만 이는 GS칼텍스 실적이 직접 매출로 잡히는 구조가 아니라 GS에너지를 거쳐 지분법 평가이익 형태로 지주사 손익에 반영된 결과다. GS칼텍스는 1분기 매출 13조347억원, 영업이익 1조6367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1310% 급증했다. 중동 정세 불안으로 두바이유 기준 국제유가가 배럴당 80달러 후반대까지 오르면서 저가에 매입한 원유 재고평가이익이 대거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정유사 실적의 핵심 지표인 싱가포르 복합 정제마진도 상반기 내내 손익분기점(배럴당 4~5달러)의 4~5배에 달하는 초강세를 유지하며 실적을 뒷받침했다. 유안타증권에 따르면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2분기 평균 배럴당 24.74달러를 기록했다. 이후 지난달에는 16.41달러까지 낮아졌지만 이달 둘째 주 다시 20.9달러로 반등했다.

◇ “유가가 착시 만들었을 뿐”…우회 항로·원유 도입 비용 급증
하지만 정유업계는 이번 실적 개선을 순수한 체질 개선이나 시장 수요 회복에 따른 것으로 보지 않는다. 고유가에 따른 재고평가이익은 유가가 하락세로 돌아서면 그대로 손실로 전환되는 일시적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중동 지정학 리스크는 자동차 업계와 마찬가지로 정유업계의 물류 및 원가 부담을 가중시키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 위협에 이어 예멘 후티 반군이 홍해 남단 바브엘만데브 해협 봉쇄를 예고하면서, 우회로였던 홍해마저 막히자 원유 수송선들의 회항이 속출하고 있다.
아시아 정유업체들은 사우디 홍해 연안 얀부항에서 출발한 원유를 북쪽으로 이동해 수에즈 운하를 통과한 뒤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초장거리 항로를 검토하고 있으며, 이 경우 기존 항로 대비 운송 기간이 최대 4주 늘어날 수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항해 거리가 길어지면서 운임과 연료비, 전쟁 위험 보험료도 함께 오를 수밖에 없어 원유 도입 단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원유 도입선 다변화도 말처럼 쉽지 않다. 중동산 원유 비중이 높은 국내 정유사 설비 특성상 미국산이나 중남미산 원유 도입을 늘릴 경우 수송 거리 연장에 따른 추가 물류비가 발생한다.
정유업계 관계자는 “1분기 실적 개선은 장부상 재고평가이익이 커진 영향이 결정적이었다”며 “하반기에도 여전히 중동 지정학 변동성이 큰 만큼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 정부 가격통제 장기화에 사법리스크까지…하반기 ‘정제마진 피크아웃’ 경고
문제는 하반기다. 공급 차질이 이어지는 동안에는 고유가와 높은 정제마진이 유지돼 실적 방어가 가능하지만, 중동 정세가 예상보다 빠르게 안정되면서 유가가 급락할 경우 현재 보유 중인 원유 재고에서 발생한 재고평가이익이 재고평가손실로 전환되며 수익성이 급격히 악화할 가능성이 있다.
실제 국제통화기금(IMF)은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이 하반기 중 점차 완화될 수 있다는 시나리오를 제시한 바 있다. 이 경우 정유업계는 높은 정제마진 효과가 약화되는 동시에 재고평가손실 부담까지 겹치는 이중 리스크에 직면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처럼 중동 정세로 국제유가 변동성이 확대되는 가운데, 정부가 유가 불안이 확실하게 해소될 시점까지 석유 최고 가격제를 지속하고 유류세 인하 조치도 9월 말까지 연장하기로 하면서 가격 통제 정책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정유업계는 시장가격이 아닌 정부가 정한 원가 기준으로 손실을 산정하는 구조인 만큼 부담이 적지 않다는 입장이다. 호르무즈 해협 통항에 따른 운송비와 보험료, 고환율에 따른 금융비용 등 실제 비용이 충분히 반영돼야 하지만, 국제 시세와의 괴리가 커질수록 손실도 확대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재는 정부 방침에 따라 지난 6월까지 발생한 손실을 원가 기준으로 정산하는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사법 리스크도 변수로 떠올랐다. 지난 6일 서울중앙지검 공정거래조사부는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 GS칼텍스, 에쓰오일 등 정유 4사를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들 업체는 전쟁 발발 직후 석유제품 가격 인상 시기와 폭을 담합한 혐의를 받고 있다. 당시 상당량의 원유를 이미 확보해 가격 급등 요인이 크지 않았음에도, 4개사가 이례적인 수준으로 입금가를 인상한 것으로 조사됐다.
국내 정유시장은 통상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가 가격을 결정하면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이 이를 추종하는 구조다. 검찰은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의 가격 담합이 시장 전반의 유가 급등을 촉발했고, GS칼텍스와 에쓰오일은 가격결정 부서를 통해 이를 그대로 따라간 것으로 판단했다. 검찰이 파악한 HD현대오일뱅크와 SK에너지의 직접 담합 규모는 14조2000억원에 달한다.

◇ 2분기 개선세 지속…실적 불확실성 확대
다만 2분기까지는 실적 개선세가 이어질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SK이노베이션의 2분기 영업이익 컨센서스는 1조5582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4176억원의 영업손실에서 흑자 전환이 예상된다. 정유 자회사인 SK에너지도 실적 개선이 기대된다. 에쓰오일은 영업이익 9551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흑자 전환이 전망되며, 비상장사인 GS칼텍스와 HD현대오일뱅크 역시 지난해보다 양호한 실적을 거둘 것으로 예상된다.
전문가들은 지정학 리스크에 기댄 실적 방어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하반기 정유업계의 실적 불확실성이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 명예교수는 “1분기 실적 개선에는 유가 상승에 따른 재고평가이익 영향이 컸다”며 “유가가 안정되거나 하락하면 그 효과는 사라질 수밖에 없다”고 진단했다.
이어 “현재 가장 큰 변수는 미국의 통상 정책과 중동 정세”라며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방향에 따라 시장 환경이 크게 달라질 수 있고, 홍해 사태 등 공급망 불안이 장기화할 경우 업황은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국내 정유사들은 상반기에는 충분한 재고와 현금 여력을 바탕으로 버텨왔지만, 수급 불안이 장기화되면 결국 기초 체력이 시험대에 오를 수밖에 없다”며 “우리나라는 원유 생산국은 아니지만 대규모 정제산업을 기반으로 경쟁력을 유지해왔는데, 이러한 환경이 지속되면 한계가 드러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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