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이지유신 이후 근대화를 거치며 방직 산업이 급성장한 일본은 심각한 면화 원료 부족에 직면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을 거대한 면화 공급 기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세웠고, 1904년(명치 37년) 목포 일본영사 와카마쓰 도사부로(若松兎三郞)는 고하도에서 육지면 시험 재배를 시작해 성공을 거뒀다. 이를 토대로 일제는 조선 전역에 체계적인 면화 재배 시스템을 구축해 나갔다.
이 비석은 1936년, 제3대와 제5대 조선총독을 지내며 이른바 '문화통치'를 표방했던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의 글씨를 받아 세워졌다. 표면적으로는 육지면 재배 성공 3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비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일제의 치밀한 경제 침탈과 농업 수탈의 역사가 자리하고 있다.
◆일제의 경제적 하청기지가 된 조선
메이지유신 이후 산업화를 본격화한 일본은 방직 산업의 급성장으로 면화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자국 내 생산만으로는 이를 감당할 수 없었고, 결국 조선을 원료 공급 기지로 활용하는 식민지 정책을 추진했다.
고하도에서의 육지면 시험 재배 성공은 이러한 정책의 출발점이었다. 이후 일제는 면화 재배를 조직적으로 확대했고, 이는 훗날 1930년대 식민지 경제정책인 '남면북양(南棉北羊·남쪽에는 면화, 북쪽에는 양)'으로 이어졌다. 조선은 일본 산업을 떠받치는 원료 생산 기지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장려'라는 표현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역사
목포 근대역사관의 설명문에는 '면화 재배를 장려했다'는 표현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표현은 식민지 현실을 지나치게 중립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는 무단통치(1910년대)와 문화통치(1920년대), 민족말살통치(1930년대)로 이어지며 토지와 식량, 자원은 물론 사람까지 수탈한 시기였다. 면화 재배 역시 이러한 식민지 경제정책의 일부였다. 한국 농민들에게 그것은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식민 권력이 강요한 생산 체계였다.
강요된 재배는 농민들을 소작농으로 내몰았고, 생산된 면화는 일본의 방직 산업을 위한 원료가 되었다. 한편 면직공장에서는 어린 여성 노동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을 감내해야 했다. 면화 산업의 이면에는 농민의 고통과 노동자의 눈물이 함께 존재했다.
오늘날에도 일제 식민지배를 미화하거나 왜곡하려는 주장이 간헐적으로 제기된다. 그러나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식민지 경제정책의 본질은 조선의 발전이 아니라 일본 제국의 이익을 위한 수탈이었다.
◆'삼백(三白)의 도시' 목포가 품은 복합적 역사

그러나 이러한 성장은 조선인의 번영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일제가 조선을 자신들의 경제적 하청기지로 활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부산물에 가까웠다.
고하도의 육지면 재배 성공은 목포와 전남의 경제 지형을 바꾼 중요한 사건인 동시에, 조선을 일본 산업의 원료 공급지로 편입시키는 출발점이었다.
이제 목포 근대역사관 1관의 비석 설명문도 달라질 필요가 있다. '면화 재배 장려'라는 가치중립적인 표현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 뒤에 있었던 식민 권력의 강제성과 농민들의 희생, 그리고 조선 농업을 일본 제국주의 경제체제에 편입시킨 역사적 의미를 함께 설명해야 한다.
역사관은 과거의 유물을 전시하는 공간을 넘어, 역사의 진실을 온전히 전달하는 공간이어야 한다. '조선육지면발상지지' 비석 역시 단순한 면화 재배 성공의 기념비가 아니라, 식민지 수탈 정책의 상징이라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읽힐 때 비로소 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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