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외롭지 않기 위해 사람을 찾지 않는 시대가 됐다.
화면 하나만 있으면 언제든 말을 걸 수 있는 상대가 생긴다. 판단 받을 걱정도, 눈치 볼 필요도 없다.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고 나면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다. 외로움이 세계적인 공중보건 의제로 다뤄지는 지금, 수천만명이 이런 방식으로 밤을 견딘다.
그런데 이 위안은 진짜인가, 착시인가.
미국 하버드 경영대학원 연구팀이 2025년, 이 질문에 실험으로 답을 내놓았다. 연구팀은 참가자들을 여러 조건으로 나눠 인공지능(AI)과 15분간 대화하게 한 뒤, 그 전후로 외로움의 정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측정했다.
결과는 명확했다. AI와의 대화는 실제 사람과의 대화와 비슷한 수준으로 외로움을 낮췄고, 유튜브 시청이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그 효과가 뚜렷하게 컸다. 이후 이어진 실험에서는 일주일 동안 매일 AI와 대화한 참가자들의 경우 대화가 끝날 때마다 외로움이 반복해서 줄어드는 것도 확인됐다.
흥미로운 지점은 따로 있었다. 참가자들은 이 효과를 실제보다 낮게 예상하고 있었다. 대화를 하기 전에는 큰 기대를 하지 않다가, 막상 대화를 마치고 나면 예상보다 훨씬 마음이 편안해진 것이다.
연구팀은 그 이유를 별도의 실험으로 추적했다. 핵심 변수는 대화의 길이도, AI의 기술적 완성도도 아니었다. '이해받는 느낌', 즉 상대가 내 말을 진심으로 듣고 공감하며 존중한다는 감각이었다. 이 감각이 클수록 외로움이 확실히 줄었고, 그 영향력은 AI의 응답 능력이나 대화 품질보다 훨씬 컸다.
실제로 그저 실용적인 정보만 주고받는 AI 비서와 비교했을 때 사람을 챙기도록 설계된 AI는 외로움을 낮추는 효과가 훨씬 두드러졌다. 그 차이를 가른 것 역시 기능이 아니라 이해받는 느낌이었다.
여기까지만 보면 답은 간단해 보인다. 외로우면 AI에게 말을 걸면 된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같은 해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MIT) 미디어랩 연구팀이 좀 더 깊이 들어갔다. 연구팀은 AI 동반자 챗봇을 정기적으로 쓰는 사용자 404명을 조사해 사용 패턴과 외로움의 관계를 정밀하게 분석했다.
여기서 드러난 첫 번째 사실이 예상을 뒤집었다. 챗봇을 얼마나 자주 쓰는지는 외로움의 정도와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관련이 없었다. 자주 쓴다고 더 외로워지는 것도, 덜 외로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사용량이 아니라 사용의 성격이었다.
연구팀이 사용자들을 성향에 따라 일곱 개 유형으로 나눠 살펴본 결과, 특히 두 집단의 대비가 선명했다. 한 집단은 챗봇에 상당히 몰입해서 스스로 조절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주 찾는 경향을 보였다.
이들의 외로움은 평균보다 낮았고, 실제 인간관계도 탄탄하게 유지하고 있었다. 챗봇과의 대화가 오히려 현실의 사회적 상호작용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 답했다.
거의 같은 정도로 몰입해서 챗봇을 찾는 또 다른 집단은 사정이 완전히 달랐다. 이들의 외로움은 뚜렷이 높았고, 사회적 관계망은 좁았으며, 사람보다 챗봇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했다. 조절하기 어려울 만큼 몰입한다는 점은 두 집단이 똑같았다. 그런데 그 몰입의 끝에서 한쪽은 사람에게 더 가까워졌고, 다른 한쪽은 사람에게서 더 멀어졌다.
두 연구를 나란히 놓으면 하나의 그림이 완성된다. AI가 주는 위안은 가짜가 아니다. 이해받는 느낌은 실재하고, 그 느낌은 실제로 외로움을 덜어낸다. 그러나 그 위안이 다음 순간 어디로 이어지는지는 사람마다 다르게 갈린다. 어떤 이에게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다리가 되고, 어떤 이에게는 사람을 대신하는 벽이 된다. 같은 정도로 몰입해도, 한쪽의 세계는 넓어지고 다른 한쪽의 세계는 좁아진다.
이 연재는 그동안 AI가 내놓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을 텍스터로, 그것을 발판 삼아 자신의 맥락과 판단을 다시 세우는 사람을 컨텍스터로 불러왔다. 이 갈림길에서도 그 구분은 정확히 되풀이된다.
텍스터는 AI가 건네는 위안을 도착지로 삼는다. 이해받는 느낌이 들면 거기서 멈춘다. AI는 지치지 않고, 화내지 않고, 내 말을 끊지 않는다. 사람과의 관계에는 없는 이 매끄러움이 점점 편안해지고, 편안함이 반복되면 기준이 된다. 사람과 나누는 대화가 상대적으로 버겁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 버거움을 피해 다시 AI로 돌아간다. 몰입이 깊어질수록 사람보다 챗봇을 먼저 찾는 마음도 함께 깊어진다. 텍스터에게 AI와의 대화는 채움이다. 오늘의 허전함을 오늘 안에 메우는 행위이지만, 채워진 자리는 다시 비워지고 내일도 같은 자리를 채워야 한다.
컨텍스터는 같은 위안 앞에서 다른 질문을 던진다. 이 대화가 나를 사람에게 더 가깝게 만드는가, 아니면 그 자리에 머물게 하는가. AI에게 털어놓은 마음을, 언젠가 사람 앞에서도 꺼낼 수 있는가. 이 질문이 있으면 AI와의 대화는 종착지가 아니라 경유지가 된다. 마음을 정리하는 연습장이 되고, 다음에 사람 앞에 설 여력을 만드는 자리가 된다. AI는 사람을 밀어내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에게 쓸 힘을 충전하는 존재가 된다. 컨텍스터에게 AI와의 대화는 채움이 아니라 넓힘이다. 오늘의 위안을 발판 삼아 내일 만날 사람과의 관계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두 태도를 가르는 것은 사용 시간이 아니라 방향이다. 텍스터는 안으로 향하고, 컨텍스터는 밖으로 향한다. 텍스터는 오늘의 감정을 처리하는 데서 멈추고, 컨텍스터는 그 감정을 다음 관계의 재료로 쓴다.
AI가 주는 위로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화내지 않고, 어긋나지 않고,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는 것. 그런데 인간관계가 우리를 성장시키는 지점은 정확히 그 반대편에 있다. 부딪히고, 오해하고, 다시 맞춰가는 마찰 속에서 우리는 넓어진다. AI와의 대화가 편안한 이유는 그 마찰이 없기 때문이고, 그 마찰이 없기 때문에 AI는 우리를 넓혀줄 수 없다. 우리를 넓히는 것은 언제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지만은 않는 존재와의 만남이다.
이해받는 느낌은 소중하다. 그러나 이해받는 느낌과 이해받는 관계는 다른 것이다. 전자는 혼자서도 얻을 수 있다. 후자는 반드시 누군가와 함께 만들어야 한다. 오늘 화면 너머에 건넨 이야기가 그 자리에서 사라질 것인지, 내일 누군가에게 건넬 용기로 자랄 것인지. 그 답은 기술이 아니라 우리가 정한다.
최홍규 EBS 연구위원 / 미디어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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