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학 박사
북한 체제를 특징짓는 몇 가지 요소 중 눈길의 끄는 것 중 하나는 부정부패다. ‘뇌물을 바친다’는 의미로 북한에서 자주 쓰이는 ‘고이다’라는 표현은 이런 사회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저널리스트이자 연구자로서 지난 34년 간 필자가 북한 내부를 관찰하고 탈북민들의 증언 등을 청취하면서 수없이 접했던 말도 “담배 한 막대가 고이고 단속에서 빠질 수 있었다”거나 “뭐라도 고여야 일이 인차(즉각) 진행된다”는 얘기다. 담배 한 보루를 ‘막대’라고 지칭하는 것도 흥미롭지만, 비교적 소액인 물품제공으로 이런저런 일들이 일사천리로 끝날 수 있다는 점도 관심을 끈다.
최근 들어 북한 관영 선전매체에 비리와 뇌물, 부패 문제가 종종 공론화되고 있다. 그동안 쉬쉬하면서 숨겨오던 일들이 이런 식으로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걸 보면 그만큼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는 의미일 수 있다.
특히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직접 이를 언급하고, 노동신문 등 매체가 주민들에게 관련 사실을 공개하는 대목은 이례적이다. 김정은 위원장이 내세우는 ‘부패와의 전쟁’은 이미 북한 사회 전반을 잠식한 부패 구조 위에서 발신되는 경고의 목소리이자 체제를 지켜내기 위한 권력 보호용 ‘사정(司正) 정치’에 가깝다.
개혁·개방으로 경제문제를 풀고 체제의 체질을 개선하지 못하면 결국 부정부패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건 자명하다. 김정은 위원장의 토로는 결국 노동당 간부와 권력층을 중심으로 비리의 수렁에 빠져 체제 붕괴 위험을 키우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 6월 노동당 중앙간부학교 창립 80주년 행사 연설에서 “유능한 당 간부 인재와 실력가형 핵심 골간들이 많지 못하다”고 직격탄을 날리며 간부층 전반의 무능과 사상 이완을 공개 비판했다. 특히 “세도와 관료주의, 부정축재와 같은 반인민적 현상들이 당 안에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하며, 창당 시기에는 찾아볼 수 없었던 부패가 체제 내부를 좀먹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은 위원장은 간부들의 정신 붕괴도 언급했다. 사실 체제붕괴의 트라우마 때문에 북한은 이 말을 금기시해 왔다. 미국에 의한 베네수엘라 마두로 전 대통령 체포·압송이나 이란 최고지도부 제거 작전 보도를 보며 긴장했을 김정은 위원장이 노동당의 핵심 간부양성 기관인 중앙간부학교를 찾아 경고한 건 그만큼 위기감이 크다는 얘기다.
김정은 위원장의 부패 척결 드라이브는 집권 이후 반복돼왔다. 당·군·내각 전 분야에 걸친 사정 바람과 고위 간부 처형·해임과 및 강등 사례는 이미 북한 권력의 일상 풍경이 됐다. 그리고 이젠 공공연하게 이런 사실을 알리고 있다. 6월 당 전원회의에서도 핵심 요직인 군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박희철 소장을 부정부패 혐의로 법 기관에 넘겼다고 공개해 군 엘리트층에 대한 본보기 처벌을 예고했다. 동시에 김재룡 조직비서를 해임하고 조용원을 다시 조직담당 비서로 복귀시키는 등 핵심 권력 인사를 전격 교체했다. 물론 이런 인사가 직접 부패와 관련 있는지는 좀 더 파악해 봐야 할 사안이지만 노동당 내부에서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방증일 수 있다.
북한 매체들은 김정은 위원장이 “세도와 관료주의를 일심단결을 파괴하고 좀먹는 위험한 독소, 적을 도와주는 이적 행위로 보고 그와의 전쟁을 선포했다”고 강조해왔다. 그러나 실제로는 김씨 일가의 세습 권력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 경쟁자를 솎아내고, 공포를 통해 충성 경쟁을 조장하는 ‘정치적 숙청 메커니즘’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언급한 일반 주민들 사이의 비리 토착화도 이제 쉽게 뽑아낼 수 없는 무성한 잡초밭이 됐다. 북한은 오랫동안 무상치료제를 이른바 사회주의 우월성의 대표적 상징으로 내세워왔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이후 의료 시스템은 사실상 붕괴됐고, 병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각종 접수비·진단비·치료비·약값을 모두 지불해야 한다는 탈북민 증언은 이미 수없이 되풀이됐다.
최근에는 북한이 헌법 개정을 통해 무상치료 조항을 아예 삭제하고, 병원 간판에서 ‘인민’이라는 단어를 내리고, 가격표를 공식 부착하는 조치가 포착됐다. 이는 무상치료제가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현실을 정권 스스로 인정한 셈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각종 연설과 담화에서 남한 영상물과 한류 문화 유입을 “체제 붕괴를 노린 적대 행위”로 규정해 강력한 통제를 지시해왔다. 최근 반동사상문화배격법 등을 만들어남한 드라마·영화를 시청할 경우 최고 사형 또는 장기교화형까지 내릴 수 있도록 처벌 수위를 높인 것도 이미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장의 법 집행은 다른 모습이다. 단속반이 밤중에 가정집에 들이닥쳐 TV·USB를 압수한 뒤, ‘처리해주겠다’며 돈이나 물품을 요구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는 증언이 잇따른다. 현금이 없으면 쌀·기름, 심지어는 가정 내 귀중품까지 내놓아야 ‘한류 시청’ 사실이 무마되고 사건이 종결되는 구조다.
한류 드라마를 보다 적발돼도, 적당한 뇌물을 건네면 처벌 수위가 ‘비사회주의 행위에 대한 사상투쟁’ 정도로 완화되고, 기록 삭제까지 도와주는 보안원·검열원도 적지 않다는 탈북민 증언은 북한 사회의 부패 수준이 심각하다는 국제 평가와 정확히 맞닿는다.
김정은 위원장이 당 간부학교에서 인정했듯, 북한의 세도·관료주의·부정축재는 단순한 일부 간부 일탈이나 도덕적 타락을 넘어선 구조적 현상이다. 배급체계 붕괴 이후 장마당 경제에 의존해 생존을 도모해야 했던 주민들은, 관료·군인·보안원과의 비공식 거래를 통해 식량·연료·생필품을 확보했고, 이 과정에서 권력형 부패가 일상화됐다.
이처럼 체제 내부가 부패로 썩어들어가는데도 공포 정치로만 그 균열을 눌러대는 방식은, 어느 순간 위기 상황에서 충성·헌신 대신 탈주·방관·내부 붕괴를 촉발할 가능성이 높다. 결국 김정은 권력이 진정한 개혁·개방으로 나아가 생산·유통·복지 시스템을 다시 설계하지 못한다면, 부패는 단순한 병폐가 아니라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구조적 트리거’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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