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이미정 기자·장고은 인턴기자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한 서적이 증가하면서 출판업계는 고심에 빠졌다. AI 활용이 늘고 있지만 일정한 기준이나 규범이 부재한 탓이다. 창작자의 AI 활용 여부도 명확하게 검증할 수 없다 보니 혼란이 이어지고 있다. 해외에선 한 도서가 AI 활용 의혹으로 책 판매가 중단된 사례까지 나왔다.
◇ AI 출판물과 인간 저작물 선 긋기, 가능할까
지난 3월 글로벌 출판사인 아셰트(Hachette)는 미아 발라드 작가의 공포 소설 ‘샤이 걸(Shy Girl)’ 미국 출간을 취소하고 영국 판매분을 전량 회수했다. 미국 출간을 앞두고 작가가 AI를 활용해 창작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미아 발라드 작가가 자비를 들여 지난해 2월 출간한 작품이다. 아셰트는 해당 작품이 틱톡에서 인기를 끌자 판권을 구입했다.
독자들은 동일한 묘사와 표현의 반복을 이유로 AI 활용을 강하게 의심했다. 독서 커뮤니티 굿리즈에서는 “이 글은 분명 chatGPT가 쓴 것 같다”는 리뷰가 다수 올라왔다. 온라인 커뮤니티인 레딧과 아마존 리뷰에서도 이 책이 AI로 쓰인 것 같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특정 단어가 반복적으로 쓰이고, 의미 없는 수식이 남발됐다는 것이 의심 배경으로 제시됐다. 한 리뷰에 따르면, ‘날카로운’을 뜻하는 ‘Sharp’은 무려 159번 반복됐다.
작가 측은 AI의 직접 활용 여부를 부인하면서 “프리랜서 편집자가 AI를 사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셰트는 내부 검토를 거쳐 출간을 취소하고 영국 내 도서 유통도 중단했다.
이 사건은 대형 출판사가 AI 활용을 이유로 도서 판매를 중단한 최초 사례로 주목받으며 파장을 일으켰다.
해외 출판계 및 창착계에선 최근 AI 활용도서를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미국에선 AI 출판물과 인간 창작물을 구분하기 위한 집단 대응 움직임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해부터 미국작가조합(The Authors Guild)은 인간 저술을 보증하는 ‘인간 저작물(HUMAN AUTHORED)’ 로고를 도입했다. 도입 배경으로는 독자에겐 인간 저작물인지, AI 출판물인지 알아야 할 권리가 있다고 밝혔다. 이 로고는 스펠링이나 문법 검수, 자료 조사를 위한 최소한의 AI 활용을 제외하고는 온전히 인간의 작업임을 증명한다.
유럽 출판계에서도 AI 창작물의 구분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유럽작가협의회(EWC), 유럽문학번역가협회협의회(CEATL), 유럽출판사연합(FEP)은 작년 4월 공동 성명을 내고, AI 출판물에 대한 의무 표시제 도입과 인간 창작물 보호를 촉구했다. 이들은 AI 출판물이 인간 창작물과 명확히 구분돼야 한다며, 공공 문화 지원과 저작권 제도는 인간이 만든 작품에 우선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무분별한 AI 출판물 확산이 작가·번역가·출판사·서점의 생계를 위협하고 문화 생태계를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나라는 어떨까. 지난해 불거진 ‘딸깍출판(AI를 활용해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책을 찍어내는 방식을 비판한 신조어)’ 논란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AI 출판물에 대한 문제 의식이 확대되고 있다. AI 출판물에 대한 표시 기준이나 창작 윤리 기준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구체적인 공동 대응 방침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 ‘인간 저술 보증마크’ 도입한 국내 출판사 사례 ‘주목’
다만 최근 국내 한 출판사가 AI도서에 대응하기 위한 제도를 도입해 업계의 이목을 끌고 있다. 국내 출판사인 커뮤니케이션북스는 지난 4월 국내 최초로 인간 저술 출판물을 보증하는 마크인 ‘HAP 보증제’ 도입했다. 인간이 쓴 출판물이 명확히 알리고, AI 활용 여부에 대한 투명성을 높여 독자의 알 권리를 보장한다는 취지다.
커뮤니케이션북스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인터뷰에서 저자의 AI 활용을 어떻게 확인하는지에 대해 “AI가 많이 쓰는 문장, 패턴을 통해 확인한다”고 답했다. 또한 “출판 계약 시 10가지의 ‘AI 활용 집필 가이드라인’을 서약한다”고 덧붙였다.
해당 가이드라인은 AI를 저술의 주체로 인정하지 않고, AI가 생성한 문장을 그대로 쓰는 것은 ‘표절’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AI를 창작의 보조 도구로 인정하면서도, AI로 정리한 자료의 출처를 확인해 검증하는 것은 저자의 의무라고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 국내 출판계, 문제 인식 확산… 대응 방안 모색
도서유통 플랫폼에선 AI 출판물을 라벨링하는 움직임도 가시화되고 있다. 온라인 도서 유통 플랫폼 예스24는 지난 1월부터 AI 활용 표기를 도입했다. 또한 도서 검색 시 ‘AI 활용 콘텐츠 제외’ 기능을 추가했다.
예스24 관계자는 “현재는 출판사가 AI 활용 여부를 직접 표시하는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생성형 AI를 저자로 등록할 수 있는 시스템도 준비 중이다”라고 밝혔다. 또 “AI 활용 범위에 따른 출판물 표기 기준에 대해서도 논의 중”이라고 언급했다.
AI 출판물에 대한 대응은 아직 개별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다만 문제인식은 출판계 안에서 점차 확대되고 있다는 전언이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관계자는 “AI 활용으로 인한 문제 상황을 인지하고 있다”며 “AI 전환 흐름은 피할 수 없다. 출판계가 소외되지 않고 그 변화에 적응해 가도록 도울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29일 한국출판인회의는 AI 시대의 출판 생태계를 주제로 긴급 포럼을 열기도 했다. 포럼에선 공통적으로 ‘AI 사용 여부’를 밝힐 뿐 아니라, 작성·번역·교정 등 어디서 AI를 사용했는지 명확히 알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날 박정인 덕성여대 AI DynaInfo 연구소 교수는 “출판사는 AI 활용 내부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사실검증·표절검사·출처 확인 절차를 표준화해야 한다”며 “출판을 ‘신뢰 인프라 산업’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출판계는 현재 다양한 관계자의 의견을 모아 AI 출판물에 대응 방안을 모색 중이다. AI 활용 여부 표기 방식, 활용 범위에 따라 출판물을 구분하는 방식, 창작 윤리기준 확립, 검증 체계 등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을 수집하고 있는 분위기다. 이를 위한 포럼과 연구 활동도 본격화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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