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번역가 조민영] 요즘 우리 시대 화두는 단연 AI(인공지능)이다. AI가 가져온 가장 큰 변화는 한마디로 ‘정보의 대중화’다. 과거에는 발품을 팔아야 겨우 구했던 다양한 콘텐츠를 클릭 한 번이면 저렴한 비용으로 누구나 누릴 수 있다.
그러나 이 압도적인 편리함 속에서 문득문득 결핍을 느낀다. 이메일 대신 정성스레 편지를 쓰고, 유선전화 수화기를 붙들고 마음 졸이던 기억.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불편하지만 설레던 기다림의 시간이 그리워진다.
손안의 기기로 책을 주문해 당일 배송받는 지금과 달리, 동네 서점을 서성이며 책을 찾아보던 그 기쁨은 점점 귀한 경험이 되어간다. 물건이든 경험이든 모든 게 흔하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내 앞에 짜잔 하고 나타나는 순간이 이제는 마냥 신기하지도 또 달갑지도 않다.
디지털 시대의 피로감이 덮쳐올 때 마음을 달래줄 책이 있다. 바로 <채링크로스 84번지>다.
이 책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뉴욕의 가난한 작가 헬렌 한프와 런던의 중고서점 '마크스 & Co.' 직원 프랭크 도엘이 20년간 주고받은 실제 편지를 엮은 서간집이다.
스스로를 “그저 어쩌다 책에 특이한 취향을 갖게 된 사람”이라 소개하는 헬렌은 희귀 고서적을 구하기 위해 대서양 건너 런던의 중고서점에 편지를 보낸다. 서점의 성실한 직원 프랭크는 취향이 깐깐한 이 뉴욕 작가를 위해 정성껏 책을 수소문한다.
헬렌의 고집스러운 책 사랑은 단호하다.
“읽어보지 않은 책을 사는 것은 제 원칙에 위배되는 일이에요. 입어보지 않고 옷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죠.”(72쪽)
헬렌에게 책은 만지고 느끼며 영혼을 나누는 대상이다. 장인정신이 묻어나는 책의 장정과 편집자 의도가 드러나는 판본 고유의 매력, 100년 넘는 시간을 거치며 이전 주인들의 손때가 묻은 세월감은 중고서적만의 독특한 묘미다.
“저는 전 주인이 즐겨 읽던 대목이 이렇게 저절로 펼쳐지는 중고책이 참 좋아요. 해즐릿이 도착한 날 ‘나는 새 책을 읽는 것이 싫다’는 구절이 펼쳐졌고, 저는 그 책을 소유했던 이름 모를 그이를 향해 ‘동지!’ 하고 외쳤답니다.”(18쪽)
헬렌이 가까운 뉴욕 17번가 서점의 ‘못난 책’들을 마다하고 굳이 런던의 중고서점을 ‘나의 서점’이라 부르며 무한한 애정을 보낸 이유도 여기에 있다.
헬렌과 프랭크 두 사람의 교류는 책을 사고파는 관계에 머물지 않는다. 두 사람이 편지를 주고받던 당시 영국은 전쟁의 상흔으로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던 대단히 궁핍한 시기였다. 풍요로운 미국에 살던 헬렌은 일면식도 없는 서점 직원을 위해 각종 통조림, 달걀, 나일론 양말 같은 귀한 물품을 소포로 보낸다.
마크스 서점 직원은 이 세심한 배려에 감동하고, 헬렌은 ‘프랭크의 한프 양’이자 가장 특별한 고객이 된다. 그들은 헬렌이 채링크로스 84번지를 방문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린다.
하지만 가난한 작가였던 헬렌의 영국행은 치과 치료비나 이사 비용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되고 만다.
그를 대신해 서점을 방문한 친구는 마크스 서점 풍경을 이렇게 묘사한다.
“먼지와 곰팡이와 세월의 냄새에, 바닥과 벽의 나무 냄새가 얽히고설킨 냄새라고 하면 될까… 안쪽으로 들어가면 왼쪽으로 탁상용 등이 놓인 책상이 하나 있고, 한 남자가 앉아 있어. 나이는 쉰 정도에 코만 보이는 남잔데, 고개를 들고 ‘안녕하십니까’ 하는 것이…”(52쪽)
어찌 보면 한적한 런던 골목에 자리한 고서점의 전형적인 이미지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이 묘사에는 오늘날 깔끔하고 차가운 디스플레이 화면에서 결코 맡을 수 없는 인간적인 온기와 세월의 깊이가 배어 있다.
헬렌은 이 채링크로스 84번지 마크스 서점을 방문했을까? 그녀와 도엘은 끝내 만났을까? 드넓은 대서양을 사이에 둔 물리적 거리와 편지가 오고가는 시간적 거리를 이겨내며 20여 년간 이어오던 두 사람의 인연은, 예상치 못한 시간의 장벽 앞에서 멈춰 선다. 이미 결론을 알고 이번에 다시 읽었는데도, 나는 이 대목에서 똑같이 가슴이 먹먹해졌다.
헬렌 한프는 작가로서는 크게 성공하지 못했지만 이 서간집으로 이름을 알렸고, 이 이야기는 앤 밴크로프트와 앤서니 홉킨스 주연 영화(1988)로도 만들어졌다. 국내에는 <84번가의 연인>이란 제목으로 소개됐다. 원작에서는 아슬아슬하게 그려지는 두 사람의 플라토닉한 사랑을 부각시킨 작명이 아닐까 한다.
혹시나 해서 구글 지도에 ‘84, Charing cross road’를 검색해보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서점이 있던 곳에는 현대 자본주의의 초고속 효율성을 상징하는 패스트푸드점 맥도날드가 자리해 있다.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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