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필 ‘에세이’] H에게-난장이들 세상

시사위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김재필(미 델라웨어대학 사회학 박사)

“인류에게는 더 이상 법 대신 사랑이 지배하는 세상 같은 것은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다. 능력만큼 일하고 필요한 만큼 얻는 세상 같은 것도 올 리가 없다. 그럴 방법도 없고 무엇보다 시간이 부족하다. 아마도 인간은 이렇게 난장이들인 채로 머지않아 세상의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 이룰 수 없는 헛된 꿈 때문에 잠 못 이루는 날들을 다시는 맞고 싶지 않다. 또한 나는 더 이상 혁명의 가능성도 믿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절대로 한꺼번에 바뀌지 않는다. 한꺼번에 바뀐 듯한 세상은 곧 다시 한꺼번에 타락할 수밖에 없다. 역사는 비약을 허락하지 않는다. 비약을 이루었다면 조만간 그 생략되었던 시간만큼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문학평론가 김명인 교수가 <한겨레>에 5년 동안 연재했던 칼럼을 마치며 썼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밖에는’의 일부일세(2026/01/02). 지난 몇 년 동안 나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칼럼을 읽으면서 가슴이 먹먹해지지 않을 수 없었네. 나 또한 비슷한 이유로 ‘일체의 유토피아적 몽상’을 접은 지 꽤 오래되었거든. 기후 위기와 인공지능(AI)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서 우리는 “난장이들인 채로 머지않아 세상의 종말을 맞게 될 것이다”라고 확신하게 되었어. 물론 여기서 ‘세상’은 인간들이 사는 세상이야. 지구라는 아름다운 행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인간이 사라진 후에는 지구는 건재할 테니까.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작가 조세희 선생은 생전에 ‘혁명이 필요할 때 혁명을 겪지 못해서 우리 모두는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있다’라는 말을 자주 했네. 물론 여기서 그가 말하는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 국민이야. 하지만 지난 100여 년의 세계 역사를 뒤돌아보면, 이 지적이 꼭 맞는 말만은 아닌 것 같네. 이른바 ‘혁명’을 경험했던 나라들의 대다수 국민도 지금 난쟁이인 채로 살고 있거든. 서유럽과 북유럽의 이른바 복지국가들에서도 극우세력이 득세하면서 복지 체제가 무너지고 있고, 미국 국민은 트럼프 같은 사람을 두 번이나 대통령으로 뽑았지.

김명인 교수가 이 칼럼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금은 어떤 “유토피아적 비전도, 그를 향한 혁명적 변화도 불가능한 시대”임이 분명하네. “유토피아와 혁명을 꿈꾸고 그 도달 불가능성에 절망하는 것조차 어쩌면 사치스러운 나르시시스트의 탄식”일지도 몰라. 자본이 부추기는 소비주의에 물들고, 편리함에 길든 우리들의 생활방식을 즉각 버리지 않고는 ‘파국’은 돌이킬 수 없네. 지금 우리가 아는 인류는 머지않아 사라질 수밖에 없어. 인간의 개입 없이 스스로 살상을 결정하고 실행하는 자율 살상 무기가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란 공격에서 사용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나락의 길로 들어선 게 분명해.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노인 세대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이 먹고, 가장 오래 살고, 가장 먼 곳까지 여행을 다닌 원시 인간으로 기록될 걸세. 그만큼 인류의 소멸에 공헌한 세대라는 뜻이지. 인류세의 시작을 1950년대로 말하는 과학자들이 많은 걸 보면 틀린 말이 아니야. 게다가 이 세대는 ‘AI’라는 불가역적인 기술의 등장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하고 묵묵히 받아들이고 있네. 그들에게는 편리함이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이야. 그러니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기술마저 진보라고 믿고 따라갔던 무력한 세대로 후세에 기록될 수밖에 없겠지.

그럼 우리는 어떻게 남은 세월을 살다 가야 할까? 솔직하게 말하면 별 방법이 없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살면서 지금 인간의 지적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어떤 우연, 즉 행운을 기다릴 수밖에 없네. 지금 세계가 매우 절망적인 상황에 부닥쳐 있다는 뜻이야. 기후 위기도 극복하기 버거운데 전쟁에 인공지능 무기까지 등장했으니, 인류의 앞날이 암담할 수밖에.

제행무상(諸行無常), 영원한 것은 없고 인연에 따라 계속 변하는 게 세상의 이치일세. 지구에 사는 생물종의 흥망성쇠(興亡盛衰)도 마찬가지야. 지구의 긴 역사에서 보면 인류는 하루살이에 지나지 않아. 다른 생명체가 지구에 등장해서 새로운 문명을 시작한다고 해서 이상해할 것도 없어. 아마 그 생명체의 고고학자들은 인류가 남긴 플라스틱 쓰레기들과 피지컬 AI들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걸세. “그들은 도대체 왜 이런 걸 만들어 사용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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