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김두완 기자 세계는 지금 플라스틱 문제를 바라보는 인식이 달라지고 있다. 과거에는 쓰고 난 뒤 얼마나 잘 버리고 재활용하느냐가 정책의 핵심이었다면, 이제는 얼마나 덜 만들고 덜 쓰게 할 것인가로 논의의 중심이 옮겨가는 분위기다. 특히 유럽연합(EU)은 플라스틱을 단순 폐기물 문제에서 머물지 않고 산업·통상 규범의 영역까지 규제 강도를 높이며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은 여전히 재활용과 분리배출 중심 정책에 머물러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국제 규범이 빠르게 재편되는 가운데 국내 정책 대응이 지나치게 늦다는 우려가 나온다.
◇ 플라스틱 규제 국제 흐름… 생산부터 친환경 설계로
국제 규범의 대표적인 사례가 EU의 ‘포장재 및 포장폐기물 규정’(Packaging and Packaging Waste Regulation/PPWR)이다. 이 제도는 단순히 플라스틱 폐기물을 줄이자는 차원을 넘어선다. 제품 설계부터 생산, 유통, 소비, 폐기에 이르는 전 과정에 환경 기준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설계됐다. 플라스틱 사용량 자체를 줄이고, 재사용 가능한 포장 시스템을 확대하며, 생산 단계부터 친환경 설계를 유도하는 것이 핵심이다. 기업 입장에서는 제품을 다 만든 뒤 처리하는 문제가 아니라 처음부터 만드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하는 셈이다.
여기에 탄소국경조정제도(CBAM), 디지털제품여권(DPP), 지속가능제품설계규정(ESPR) 등 각종 환경 규제도 잇따라 도입되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환경 정책이지만 실제로는 산업 규범이자 무역 규칙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유럽 시장에 제품을 판매하려면 해당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만큼 기업 입장에서는 사실상 새로운 ‘시장 진입 조건’이 되고 있다는 의미다.
이하얀 한국외국어대학교 EU연구소 연구교수는 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나프타 위기 속 드러난 한계, 탈플라스틱 종합대책 보완 방향’ 토론회에서 “최근 EU 환경 정책은 단순한 환경보호 차원을 넘어 산업정책, 통상정책, 공급망 정책이 결합된 새로운 규제 질서로 이해해야 한다”며 “유럽 시장 접근을 위한 기본 요건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고 설명했다. 환경 규제가 기업의 자율적 선택 영역이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의 기준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문제는 이런 흐름 속에서도 한국의 정책 기조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정부가 지난해 발표한 탈플라스틱 종합대책 역시 핵심은 재활용 확대와 폐기물 관리 강화에 맞춰져 있다. 일회용품 사용 저감, 재생원료 활용 확대, 분리배출 체계 개선 등 사후 처리 중심 대책이 대부분이다. 플라스틱 생산 자체를 줄이거나 생산 단계부터 개입하는 정책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정책 접근이 국제 흐름과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플라스틱을 많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구조는 그대로 둔 채 사용 후 얼마나 잘 처리할 것인가에만 집중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분명하다는 것이다.
박상현 녹색연합 정책팀 활동가는 “현재 탈플라스틱 정책은 여전히 재활용 중심의 폐기물 정책에 머물러 있다”며 “정량적인 정책 목표 역시 폐기물 발생량 관리에 맞춰져 있을 뿐 생산량 자체를 줄이는 방향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이어 “세계는 생산 감축으로 방향을 바꾸고 있는데 한국은 여전히 처리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재활용 확대만으로는 플라스틱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플라스틱 사용량 자체가 계속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재활용 비율을 높여도 생산량 증가 속도가 이를 앞지르면 결국 전체 폐기물 규모는 커질 수밖에 없다. 많이 만들고 많이 쓰는 구조를 유지한 채 재활용만 강조하는 방식에는 한계가 있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최근에는 ‘얼마나 재활용할 것인가’보다 ‘얼마나 덜 생산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게다가 일부 전문가들은 재활용 확대 과정에서 플라스틱 내 첨가물과 유해물질 관리 기준도 함께 마련돼야 한다고 지적한다. 특정 화학물질이 포함된 제품이 별도 관리 없이 재활용될 경우 재생 원료의 안전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단순히 재활용률만 높이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재활용 과정의 품질과 안전 기준도 함께 논의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만 정부는 단계적인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이정미 기후에너지환경부 자원순환정책과장은 이날 토론회에서 정부가 탈플라스틱 종합대책을 통해 일회용품 감축과 재생원료 사용 확대, 재활용 기반 강화 등을 추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산업계와 시장의 수용성을 고려해 관련 정책을 점진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는 취지다.
그러나 토론회 참석자들은 현행 대책이 여전히 ‘폐기 이후 관리’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을 한계로 꼽는다. 국제 사회가 생산 단계 규제로 빠르게 이동하는 상황에서 보다 근본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플라스틱 생산 감축 목표를 명문화하고 재사용 시스템을 확대하는 한편, 산업 전환 로드맵 마련까지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는 단순히 폐기물을 줄이는 수준을 넘어 생산과 소비 구조 자체를 재설계해야 한다는 의미다. 세계가 플라스틱 생산 감축과 재사용 확대를 새로운 기준으로 삼고 있는 만큼 한국 역시 재활용 중심 정책에서 벗어나 생산 단계부터 개입하는 방향으로 정책 전환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플라스틱 문제를 단순한 쓰레기 처리의 영역이 아닌 산업 구조 전환의 과제로 바라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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