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박설민 기자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 양상이 장기화에 접어들면서 국내외 경제와 산업이 흔들리고 있다. 예멘의 친(親) 이란 성향의 후티 반군까지 참전하면서 혼란은 가중되고 있다. 지난 30일(현지시간) 이란은 후티 반군에 전쟁이 격화될 경우 홍해까지 봉쇄할 것을 주문했다.
호르무즈 해협과 홍해라는 중동 지역 무역 항로 두 곳이 막히게 될 위기가 엄습하며 국내 석유산업계는 초긴장 상태다. 원유 공급뿐만 아니라 각종 석유화학원료 무역까지 차질이 빚어지면서다. 특히 일상생활에서는 ‘비닐 대란’ 공포 분위기까지 사회적으로 조성되며 혼란스럽다.
◇ ‘종량제 봉투’ 사재기 나선 사람들… 편의점 매출 따라 공급 우선 순위도 달라
30일 저녁 미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편의점에 잠시 들렀다. 음료수를 사기 위에 계산대로 가자 몇몇 고객들이 편의점 계산원에게 종량제 봉투 구매를 요청하고 있었다. 하지만 계산원은 이미 재고가 떨어져 판매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편의점 문 앞에는 ‘종량제 봉투 재고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종이가 이미 붙어 있었다. 종량제 봉투를 구매하려고 한 방문자에게 물어보니 “최근 뉴스에서 봉투 대란이 나와 불안해 미리 사놓으려고 한다”고 답했다. 말 그대로 ‘쓰레기봉투 대란’을 직접 체험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미-이란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들어서자 국민들의 비닐 공급 문제에 대한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이마트, 롯데마트 등 주요 유통업체 매장의 종량제 봉투 판매량은 2~4배 증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편의점에서는 상황이 더 좋지 않은 실정이다. 한 편의점 직원은 기자에게 각 매장의 매출 규모에 따라 종량제 봉투 공급이 다르게 이뤄지고 있다 말했다. 쉽게 말해 장사가 잘 되는 매장에 우선 순위로 종량제 봉투가 발주되는 것이다. 이 경우, 도서지역이나 지방의 경우 종량제 봉투 보급에 차질이 발생할 우려가 있다.
이 같은 일상생활의 혼란을 불러일으킨 비닐 대란의 원인은 ‘나프타(Naphtha)’다. 석유 정제 과정에서 140~180도 온도가 되면 분리돼 나오는 고분자 탄소화합물이다. 에틸렌과 프로필렌 등 기초 유분 생산의 원료다. 나프타에서 추출된 원료들은 플라스틱과 비닐, 고무, 합성섬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용된다.
국가통계포털(KOSIS) 자료에 따르면 한국의 연간 나프타 공급 규모는 2024년 기준 6,142만3,760톤이다. 이 중 국내 자체 생산량은 3,640만3,320톤, 수입량은 2,902만440톤이다. 국내 산업에 필요한 나프타의 47%는 수입에 의존한다. 따라서 호르무즈 해협 통제로 인한 나프타 수입 차질은 국내 산업계에 큰 타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 가운데 최근 발생한 비닐 대란은 나프타 공급난에 어느 정도로 타격을 받고 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한 정확한 국내 비닐 생산 관련 통계 자료를 찾기는 어려웠다. 나프타를 분해할 경우, 비닐 원료뿐만 아니라 다양한 플라스틱, 석유화학제품 원료 등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는 ‘시사위크’와의 통화에서 “나프타의 경우 지금 업계에서 너무 다양하게 사용하고 있어 정확히 얼마가 소요된다 설명하기는 좀 어려울 수 있다”며 “또한 업체마다 사업 방향도 달라 이를 통계적으로 정확히 집계하기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 봉투용 나프타, 전체 공급 2% 수준… 전문가들 “전쟁 초장기화만 아니면 대란은 아냐”
이에 시사위크에서는 비닐봉투의 원료인 ‘폴리에틸렌(PE)’의 국내 생산량과 한해 비닐류 소비량 통계를 기반으로 1년 치 비닐 생산에 필요한 나프타의 양을 간접적으로 추정했다.
먼저 비닐봉투에 필요한 나프타 사용량을 추정하기 위해선 정확한 성분 정의가 필요하다.
일단 우리가 쓰는 비닐봉투의 재료는 비닐이 아니다. 주 원료는 ‘폴리에틸렌(PE)’라고 불리는 열가소성 플라스틱이다. 실제 비닐은 PVC 파이프 등을 제작할 때 사용된다. 또한 식품포장용기도 폴리에틸렌을 보통 사용한다. 즉, 생활 속 비닐은 사실 폴리에틸렌 제품이라고 보면 된다.
‘식품의약품안전처’가 지난해 발표한 ‘2024년 식품 등의 생산실적 통계’에서 ‘허가품목기구 및 용기포장’에 사용된 PE의 양을 분석했다. 허가품목기구 및 용기포장 분류에는 우리가 사용하는 마트 비닐봉투, 식품 포장 비닐 등이 포함된다. 데이터 분석 결과, 1년간 국내서 허가품목기구 및 포장용기에 사용되는 폴리에틸렌은 약 57만1,754톤으로 추정된다.
통상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나프타분해시설(NCC)’에서 공정 과정을 거쳐 에틸렌을 만든 후, 폴리에틸렌으로 변환하면 최종 수율은 약 31~33% 수준이다. 즉, 3톤의 나프타를 분해하면 약 1톤의 폴리에틸렌이 생산되는 것이다.
이를 역으로 계산하면 국내서 허가품목기구 및 용기포장에 사용되는 나프타의 양은 약 170~180만톤 수준으로 추정된다. 즉, 전체 나프타 공급 규모의 2.9~3% 정도가 생활용 폴리에틸렌에 사용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때 기후에너지환경부가 발표한 ‘전국폐기물 발생 및 처리 현황’ 자료에 따르면 매년 전국서 발생하는 비닐류 폐기물은 약 43만7,294톤이다. 즉, 순수하게 비닐봉투 폐기물만 따로 놓고 보면 전체 나프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15%에서 2.3%로 더 줄어든다. 수치적으로만 보면 결코 작은 양은 아니다.
하지만 종량제봉투와 마트 비닐봉투만으로 범위를 좁힐 경우, 우리가 ‘대란’이라고 부를 정도로 심각한 위기는 아닐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입장이다.
한국화학산업협회 관계자도 “전쟁이 아주 장기화가 된다면 모를까 일단 현재 기준에서는 비닐 대란이라고 부를 수 있는 상황은 아니라고 본다”며 “다만 언론에서 전쟁, 납사수급 관련 이야기가 다뤄지면서 국민들 사이에 불안감이 돌아 사재기 가수요가 폭증한 것이 더 큰 문제”라고 우려를 표했다.
다만 국민적 혼란이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은 크다. 이에 정부 역시 비닐 대란 현상을 안정화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기후에너지환경부는 비닐 대란 우려가 시작된 지난 25일 공식 설명을 통해 “기초지방정부별 종량제봉투 완제품 재고량은 전국 평균 3개월 분 이상으로 안정적 공급에 문제 없다”고 밝혔다.
이어 “6개월 분 이상 보유한 기초지방정부도 123개로 전체 228개 중 54%에 달한다”며 “추가 투입할 수 있는 국내 재활용업체의 폴리에틸렌 보유량도 3월 기준 2만5,700톤 이상으로 18억3,000매의 종량제 봉투를 생산 가능한 량”이라고 밝혔다.
이재명 대통령 역시 31일 청와대에서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쓰레기 봉투가 부족해 값이 오를 수 있으니 미리 사재기 하지는 이야기가 나온다”며 “하지만 종량제 봉투는 행정처리 비용 조달을 위해 만든 세금과 같은 것이기에 가격이 오르거나 내리지 않는다”고 밝혔다.
또한 지난 27일엔 나프타를 경제안보품목으로 한시 지정, 수출 제한을 발표했다. 이에 따라 나프타에 대한 ‘매점매석’도 금지된 상태다. 화학산업계는 해당 조치가 중동사태로 나프타 수급에 난항을 겪고 있는 석유화학업계에 큰 버팀목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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