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②] 철원 평야의 공존… 두루미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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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처럼 두루미는 예로부터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다. 지금 철원 평야에서는 농민들과 공존하며 겨울을 보내고 있다. / 사진=시사위크 취재팀
군계일학(群鷄一鶴)이라는 말처럼 두루미는 예로부터 특별한 존재로 여겨졌다. 지금 철원 평야에서는 농민들과 공존하며 겨울을 보내고 있다. / 사진=시사위크 취재팀

시사위크|철원군=김두완·박설민 기자  군계일학(群鷄一鶴). 수많은 닭 무리 속에서도 한 마리 학이 유난히 돋보인다는 뜻의 고사성어다. 예로부터 학은 고귀함과 절개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조선시대 문관의 관복에는 두 마리 두루미 문양이 새겨졌고, 십장생에도 등장하는 장수의 상징이었다. 이렇게 상징 속에서 특별한 존재로 여겨지던 두루미는 지금 겨울 철원 평야에서 또 다른 의미로 사람들과 마주하고 있다. 자연 속 신비로운 존재가 아니라 논과 들판을 함께 사용하는 ‘이웃’으로서 말이다.

◇ 두루미 농법… 흰두루미, 재두루미 사는 논

강원도 철원 평야는 겨울이면 수백 마리의 두루미가 모여드는 곳이다. 수확이 끝난 논 위에 떨어진 벼 낱알, 즉 낙곡은 두루미에게 중요한 먹이다. 멀리서 보면 텅 빈 갈색 들판처럼 보이지만 두루미에게는 거대한 식탁이다. 논과 습지가 이어진 철원 평야는 두루미가 겨울을 보내기에 드문 조건을 갖춘 장소가 됐다.

철원 평야는 DMZ와 민간인통제구역 일대의 넓은 농경지와 습지가 남아 있어 겨울철 두루미가 집중되는 대표적인 월동지로 꼽힌다. / 사진=시사위크 취재팀
철원 평야는 DMZ와 민간인통제구역 일대의 넓은 농경지와 습지가 남아 있어 겨울철 두루미가 집중되는 대표적인 월동지로 꼽힌다. / 사진=시사위크 취재팀

두루미가 철원에 모이게 된 배경에는 역설적으로 분단의 현실이 있다. 비무장지대(DMZ)와 민간인통제구역이 만들어낸 넓은 농경지와 습지는 사람의 출입이 제한된 덕분에 비교적 원형을 유지했다. 서해안과 수도권 일대 농경지가 개발로 사라지면서 두루미는 점점 북쪽으로 이동했고, 결국 DMZ 인근 평야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철원 평야가 동아시아 두루미의 대표적인 월동지로 자리 잡은 이유다.

하지만 철원에 두루미가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히 사람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곳 농민들의 선택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철원에서는 오래전부터 두루미와 공존하는 방식의 농업이 이어지고 있다. 흔히 ‘두루미 농법’이라고 불리는 방식이다. 수확 이후 볏짚을 모두 치우지 않고 일부를 논에 남겨 두거나, 겨울철 논에 물을 채워 두루미가 먹이를 찾고 쉴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논에 남은 볏짚과 낙곡은 두루미의 먹이가 되고 물이 있는 논은 잠자리 역할을 한다.

멸종위기 야생생물 Ⅰ급인 두루미와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인 재두루미는 한반도의 갯벌, 습지, 경작지, 초지에서 집단으로 월동한다. 식성은 잡식성으로 게, 어류와 같은 수생물이나 벼, 율무 등 곡물을 취식하고 밤에는 결빙된 저수지나 강의 모래톱 등에 모여 수면을 취한다. / 그래픽=이주희 기자
멸종위기 야생생물 Ⅰ급인 두루미와 멸종위기 야생생물 Ⅱ급인 재두루미는 한반도의 갯벌, 습지, 경작지, 초지에서 집단으로 월동한다. 식성은 잡식성으로 게, 어류와 같은 수생물이나 벼, 율무 등 곡물을 취식하고 밤에는 결빙된 저수지나 강의 모래톱 등에 모여 수면을 취한다. / 그래픽=이주희 기자

이러한 방식은 자연스럽게 시작된 것이지만 농민들에게는 결코 쉬운 선택이 아니다. 볏짚을 남기면 사료나 퇴비로 활용할 수 있는 자원이 줄어들고, 겨울철 논에 물을 유지하는 일도 추가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럼에도 철원 농민들은 두루미와의 공존을 선택해 왔다. 두루미가 논에서 먹이를 찾는다는 사실 자체가 그 지역의 환경이 깨끗하다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원에서 두루미와 농민의 관계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두루미와 농사짓는 사람들 모임에서 활동하고 있는 최종수 씨다. 그는 두루미 보호 활동이 거창한 사업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농민들의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져 온 것이라고 설명한다.

최씨는 “농민에게 두루미는 특별한 사업의 대상이라기보다 함께 살아가는 동반자 같은 새”라며 “봄부터 가을까지는 농사를 지어 생활을 하고, 겨울이 되면 논에 남은 낙곡을 두루미가 먹으며 지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두루미가 논에서 먹고 쉬고 있다는 건 그 지역 환경이 깨끗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며 “두루미가 찾아오는 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농민들에게는 자부심이 된다”고 덧붙였다.

수확이 끝난 논에 남은 낙곡과 습지 환경은 두루미의 주요 먹이터가 된다. 철원 평야의 논과 습지에 두루미가 모이는 이유다. / 사진=시사위크 취재팀
수확이 끝난 논에 남은 낙곡과 습지 환경은 두루미의 주요 먹이터가 된다. 철원 평야의 논과 습지에 두루미가 모이는 이유다. / 사진=시사위크 취재팀

◇ 지역 공동체의 기억… 이름을 가진 두루미

철원 지역 주민들 사이에서는 두루미에게 이름을 붙여 부른다. ‘철통이’, ‘검문이’, ‘초입이’, ‘볼록이’ 같은 이름이 대표적이다. 오랫동안 같은 개체를 관찰하며 주민들이 자연스럽게 붙인 이름이다. 할아버지 세대가 보던 두루미를 손자 세대가 다시 보기도 한다. 두루미는 그렇게 마을의 기억 속에 남는다.

철원에서는 이러한 두루미를 보기 위해 매년 탐조 관광도 이뤄진다. 겨울철이면 두루미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탐조객들이 철원을 찾는다. 탐조객들은 전기차를 타고 민통선 지역을 돌며 두루미를 관찰한다. 하루 탐조 인원은 제한되지만 겨울이 되면 두루미를 보기 위한 발걸음이 꾸준히 이어진다.

철원두루미운영협의체 유종현 사무국장은 두루미 탐조 관광의 특징이 일반 관광과는 다르다고 설명했다. 유 사무국장은 “보통 관광지는 한 번 와서 사진을 찍고 보고 가면 끝이지만 두루미는 그렇지 않다”며 “한 번 두루미를 본 사람들은 ‘작년에 봤던 그 두루미가 올해도 잘 왔을까’ 하는 마음에 다시 철원을 찾는다”고 말했다. 이어 “두루미를 보는 사람들 사이에는 그 새가 이곳에서 오래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며 “그래서 두루미 탐조객들은 해마다 철원을 다시 찾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철원 평야의 공존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최근 농경지 이용 방식이 빠르게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논이 비닐하우스나 인삼밭으로 전환되고 축사와 태양광 시설도 늘어나고 있다. 비닐하우스가 들어서면 사람의 출입이 잦아져 두루미가 접근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한 번 시설이 들어서면 주변 수백 미터 범위까지 서식지가 줄어들 수 있다.

두루미 보호를 위해 일부 농민들은 수확 후 볏짚을 남기거나 겨울철 논에 물을 채워 서식 환경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는 추가 노동과 비용 부담으로 이어진다. / 사진=시사위크 취재팀
두루미 보호를 위해 일부 농민들은 수확 후 볏짚을 남기거나 겨울철 논에 물을 채워 서식 환경을 유지한다. 그러나 이는 추가 노동과 비용 부담으로 이어진다. / 사진=시사위크 취재팀

두루미 보호에 참여하는 농민들의 부담도 적지 않다. 현재 일부 지역에서는 생태계서비스 지불제 등을 통해 보상이 이뤄지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충분하지 않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두루미 농법을 유지하려면 추가 노동과 비용이 필요하지만 이에 대한 지원은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논뿐 아니라 두루미가 먹이를 찾는 밭까지 지원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요구도 이어지고 있다.

조류인플루엔자(AI) 방역 역시 두루미 보호와 충돌하는 문제 중 하나로 지적된다. 현재 AI 방역은 ‘가축전염병 예방법’에 근거한 방역 지침에 따라 철새 서식지에서 먹이주기 활동을 제한하고 있다. AI가 발생하거나 위험이 높다고 판단될 경우 철새 먹이 공급을 중단하고 사람의 출입도 최소화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 때문에 철원 등지에서 두루미를 위해 낙곡을 공급하거나 먹이터를 관리하던 활동도 중단되는 경우가 있다. 특히 북상 직전 시기에는 두루미가 장거리 이동을 위해 체력을 비축해야 하는데 먹이 공급이 제한되면 개체군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가 현장에서 제기된다. 일부 전문가들은 멸종위기종이 대규모로 월동하는 지역의 경우 방역과 보전을 함께 고려한 예외 규정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

철원 평야의 두루미는 자연만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논을 지키는 농민들과 지역사회의 선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군계일학이라는 말처럼 두루미는 여전히 특별한 존재지만, 철원에서는 그 특별함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 겨울 들판 위를 천천히 걸어 다니는 두루미의 모습은 단순한 자연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과 자연이 어떻게 함께 살아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장면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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