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을 가다⑥] 남극, 끝없이 찬란한 잔혹극의 무대

시사위크
서남극 ‘킹조지섬(King George Island)’ 바톤반도에 위치한 포터소만은 잔혹하지만 찬란한 삶의 흐름이 계속되는 생명의 땅이다. 멀리 보이는 고깔 모양 지형은 꼭대기만 눈이 쌓이지 않는 ‘누나타크(Nunatak)’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서남극 ‘킹조지섬(King George Island)’ 바톤반도에 위치한 포터소만은 잔혹하지만 찬란한 삶의 흐름이 계속되는 생명의 땅이다. 멀리 보이는 고깔 모양 지형은 꼭대기만 눈이 쌓이지 않는 ‘누나타크(Nunatak)’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잔혹극은 열정적이고 격렬한 삶의 개념을 담기 위하여 창조된다.”

-앙토냉 아르토-

시사위크=박설민·김두완 기자  삶은 죽음을 향한 항해다. 모든 생명은 그 끝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혹한의 땅 ‘남극’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불모지에서도 생명은 태어나고 치열하게 살아가며 결국 죽음을 맞이한다. 그리고 그 죽음은 새로운 생명의 씨앗이 된다. 시사위크 남극특별취재팀이 방문한 서남극 ‘킹조지섬(King George Island)’에서도 잔혹하지만 찬란한 생명의 흐름은 계속되고 있었다.

◇ 생명과 죽음의 순환, 그 한복판에서

2024년 12월 17일, 남극 생활을 시작한 지 3일이 흘렀다. 어느덧 남극세종과학기지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졌다. 기지 앞을 거니는 펭귄들과 웅장한 마리안소만 빙하를 지켜보는 것은 하나의 평범한 일상이 됐다. 물론 이따금 기지 앞에서 낮잠을 자는 웨델물범과 코끼리 해표들을 볼 때마다 신비로웠다.

약 30분 정도 조디악을 타고 펭귄팀과 ‘포터소만(Potter cove)’으로 향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약 30분 정도 조디악을 타고 펭귄팀과 ‘포터소만(Potter cove)’으로 향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시사위크 취재팀도 드디어 현장 취재 일정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첫 번째 동행 취재는 ‘야생동물팀’, 일명 ‘펭귄팀’이었다. 극지연구소 생명과학연구본부 소속의 하계연구대인 펭귄팀은 김유나, 김지희, 이혁재 연구원으로 구성된 3인방이다. 

이날 현장에는 김지희, 이혁재 연구원만 동행했다. 김유나 연구원이 감기몸살로 앓아누웠기 때문이다. (현재 김지희, 이혁재 연구원은 올해 11월에도 남극세종과학기지에 파견 중이다.)

약 30분 정도 조디악을 타고 펭귄팀과 방문한 연구 현장은 ‘포터소만(Potter cove)’이었다. 킹조지섬 바톤반도에 위치한 작은 만이다. 이곳은 신비한 푸른 빛을 내뿜는 ‘포어카데 빙하(Fourcade Glacier)’와 꼭대기만 눈이 쌓이지 않는 ‘누나타크(Nunatak)’가 자리 잡은 특이한 지형이다.

포터소만에 도착하면 신비한 푸른 빛을 내뿜는 ‘포어카데 빙하(Fourcade Glacier)’가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포터소만에 도착하면 신비한 푸른 빛을 내뿜는 ‘포어카데 빙하(Fourcade Glacier)’가 눈길을 가장 먼저 사로잡는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연구원들을 따라 포터소만 인근 해안가로 향했다. 험준한 바위와 절벽을 ‘날아다니듯’ 이동하는 과학자들을 따라가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포터소만에서는 그냥 걷는 것조차 고역이었다. 남극 바람에 날카롭게 부서진 자갈은 두꺼운 등산화를 뚫고 발바닥을 찔러댔다. 

자갈밭을 지나 도착한 포터소만과 맞닿은 내륙은 축축한 이끼와 자갈이 가득했다. 눈과 얼음으로 뒤덮여 있을 것이라 상상했던 남극의 땅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이는 남극이 단순한 불모지가 아닌, 생명들이 살아 숨쉬는 하나의 ‘삶의 터전’임을 드러내는 증거였다.

마치 화성처럼 보이는 포터소만의 모습. 이끼와 자갈로 덮여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남극과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마치 화성처럼 보이는 포터소만의 모습. 이끼와 자갈로 덮여있어 우리에게 익숙한 남극과는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남극의 거친 바람과 파도에 날카롭게 깎여나간 포터소만의 지형. 한발한발 내딛는 것 자체가 고역이였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남극의 거친 바람과 파도에 날카롭게 깎여나간 포터소만의 지형. 한발한발 내딛는 것 자체가 고역이였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이 신비로운 땅에는 다양한 남극 생명체들이 살아가고 있었다. 특히 남극의 핵심 조류(Bird)종들의 천국과 같은 곳이다. 갈색도둑갈매기(Brown Skua)부터 칼집부리물떼새, 자이언트패트롤, 남극제비갈매기 등이 이곳에서 둥지를 틀었다. 젠투펭귄, 턱끈펭귄 등 펭귄종들도 이곳에서 서식했다.

뿐만 아니라 코끼리해표, 웨델물범 등 대형 포유류가 서식하는 ‘해표마을’도 이곳 포터소만 인근에 위치했다. 펭귄팀을 따라 이동하는 길에 코끼리해표 무리가 보였다. 평균 3~4m에 이르는 거구인 코끼리해표들은 고래를 제외하면 가장 거대한 해양포유류다. 느긋해 보이는 표정으로 취재팀을 쳐다보는 코끼리해표는 ‘못생겼지만 귀엽다’는 말이 무엇인지 실감케 했다.

평균 3~4m에 이르는 거구인 코끼리해표들은 고래를 제외하면 가장 거대한 해양포유류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평균 3~4m에 이르는 거구인 코끼리해표들은 고래를 제외하면 가장 거대한 해양포유류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생명이 가득한 땅 위에는 죽음의 흔적도 존재했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오래된 동물의 사체가 눈에 띄었다. ‘게잡이물범’이었다. 남극에는 파리 등 곤충류가 살지 않는다. 또한 춥고 건조한 날씨 때문에 ‘미라’가 돼 있었다. 주변에는 거대한 통나무처럼 생긴 고래의 척추뼈도 보였다. 

이 동물들도 과거, 남극의 생태계를 지탱하던 중요한 기둥 중 하나였을 것이다. 생명과 죽음의 순환이 교차되는 포터소만 앞에서 다시 한 번 자연의 거대함, 그리고 삶의 중요함이 느껴졌다.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게잡이물범의 사체. 건조하고 곤충이 없는 남극 특성에 미라화됐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언제 죽었는지 알 수 없는 게잡이물범의 사체. 건조하고 곤충이 없는 남극 특성에 미라화됐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거대한 나무토막처럼 보이는 고래의 뼈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거대한 나무토막처럼 보이는 고래의 뼈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 하나의 죽음에 또 다른 생명은 자란다

본격적인 연구활동이 시작되자 이혁재 연구원과 김지희 연구원은 남방큰재갈매기, 남극제비갈매기들의 둥지를 찾아 하나씩 기록했다. 남극의 새들은 해안가 땅바닥에 둥지를 튼다. 둥지는 땅을 파서 만든다. 천적의 눈을 피해 이끼나 자갈 등으로 덮어 위장하는데, 일반인들은 둥지가 있는지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김지희 박사는 “새들의 알은 돌멩이·바위 등 주변 환경과 잘 구별이 되지 않는 색을 띠고 있다”며 “자칫 다른 연구자들이 밟고 지나갈 수도 있다. 때문에 이런 표시를 해놓는다”고 설명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방큰재갈매기의 새끼./ 사진=남극특별취재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남방큰재갈매기의 새끼./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부화하는 남방큰재갈매기의 새끼./ 사진=남극특별취재팀
부화하는 남방큰재갈매기의 새끼./ 사진=남극특별취재팀

“기자님들, 이리와 보세요!” 그때 펭귄팀 연구원들이 취재팀을 다급히 불렀다. 김지희 연구원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남방큰재갈매기의 둥지였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새끼 한 마리가 있었다. 새끼 갈매기는 깨알같은 점박이 무늬가 있는 회색빛 솜털이 자라있었다. 연구원들과 취재팀이 쳐다보는지도 모른 채 잠들어 있었다.

그때 남방큰재갈매기 부부가 취재팀의 머리 위를 날며 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용감하게 취재팀의 머리를 내려치며 공격하기 시작했다. 새끼를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 덩치가 제법 큰 새였기에 생각보다 얻어맞는 것은 아팠다.

귀여운 새끼 갈매기를 촬영한 후, 포터소만 해변을 걸으며 이동했다. 멀리 또 다른 새끼 남방큰재갈매기가 해변가에서 노는 모습이 보였다. 부모 갈매기들과 함께 산책을 나온 것처럼 보였다. 펭귄팀과 취재팀은 행복해 보이는 갈매기 가족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대형 렌즈로 줌을 당겼다.

그 순간, 하늘에서 거대한 갈색 물체가 날아올랐다. ‘갈색도둑갈매기’, 일명 ‘스쿠아’였다. 검고 날카로운 부리와 근육질의 강력한 날개를 지닌 스쿠아는 남극 하늘의 최상위 포식자 중 하나였다. 남방큰재갈매기의 새끼를 사냥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었다.

새끼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남방큰재갈매기 부부. 하지만 훨씬 강력한 포식자인 스쿠아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새끼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는 남방큰재갈매기 부부. 하지만 훨씬 강력한 포식자인 스쿠아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스쿠아와 남방큰재갈매기 부부의 사투가 시작됐다. 필사적으로 새끼를 지키려는 남방큰재갈매기 부부는 날개를 넓게 펴고 스쿠아에게 대항했다. 스쿠아 역시 강력한 부리와 갈퀴 달린 발톱을 앞세워 남방큰재갈매기들을 공격했다. 몇분 간의 정신없는 싸움은 하늘과 바다, 땅에서 계속됐다.

그리고 잠시 후, 스쿠아의 입에는 새끼 갈매기가 물려있었다. 이미 새끼는 죽어있었다. 남방큰재갈매기 부부의 필사적인 방어도 스쿠아의 강력함 앞에선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스쿠아가 새끼의 사체를 물고 날아가는 것을 남방큰재갈매기 부부는 그저 하염없이 쳐다보며 울었다.

결국 희생당하고 만 새끼 남방큰재갈매기. 그러나 이 스쿠아 부부도 돌보는 새끼가 있기에 사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결국 희생당하고 만 새끼 남방큰재갈매기. 그러나 이 스쿠아 부부도 돌보는 새끼가 있기에 사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남극특별취재팀 

이혁재 연구원은 “스쿠아들도 먹고 살아야죠. 슬픈 일이긴 하지만 이게 자연의 순리”라고 말했다.

침울한 분위기로 포터소만 주변을 촬영하던 중, 조금 전 새끼 갈매기를 물어갔던 스쿠아가 보였다. 암컷 스쿠아와 함께 둥지를 돌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품에는 어린 스쿠아 한 마리가 부모가 사냥해 온 새끼 갈매기를 먹고 있었다. 

이혁재 연구원이 말했던 ‘자연의 순리’가 직접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남극의 대자연은 잔혹하지만 아름다운 변주곡을 끊임없이 연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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