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임경제] 이선희 '알고 싶어요'는 1500년 조선 중종시절을 살았던 황진이(1506~1567)가 소세양을 못잊어 써서 보낸 야사하(夜思何)란 한시(漢詩)가 원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500여 년이 흐른 뒤 소설가 양인자씨가 번안을 한 것으로 작곡가 김희갑이 곡을 붙여 공전의 히트를 쳤다.
◆ 황진이 있게 한 인물은 '허균'
이승연 원광대 교수에 따르면 황진이와 소세양의 만남에 관한 얘기는 전라북도 익산에서
출발한다. 여기는 소세양의 고향으로 소세양이 관직에서 은퇴한 후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황진이의 얘기가 우리에게 알려진 데는 익산의 함열현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허균(1569~1681)이 쓴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중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이라고 하니, 허균은 황진이의 이야기를 함열 유배 당시 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황진이가 죽고나서 결국 우리에게 황진이를 있게 한 인물은 허균인 듯하다. 소야월곡, 즉 야사하원문과 함께 번안을 통해 '알고 싶어요'가 된 詩노래를 보자.
야사하 (夜思何)
소요월야사하사 (蕭寥月夜思何事)
달 밝은 밤에 그대는 누굴 생각하나요?
침소전전몽사양 (寢宵轉輾夢似樣)
잠이 들면 그대는 무슨 꿈을 꾸나요?
문군유시녹망언 (問君有時錄忘言)
때로는 붓을 들어 내 이야기도 쓰나요?
차세연분과신량 (此世緣分果信良)
나를 만나 행복했나요? 나의 사랑을 믿나요?
이런 작품이 나오기까지의 사연이다.
1976년 작곡가 김희갑은 가수 김일우를 통해 '가을나무사이로'란 노래를 내놓는다. 그러나 대중적인 호응은 별반이 아니었다. 1984년에 다시 이승재라는 가수가 2차 리메이크해 발표했으나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3차 이선희의 리메이크에 들어 대중의 폭발적인 반응에 의해 KBS 가요톱텐에서 5주 연속 1위를 기록하고, MBC라디오 음악캠프에서 15주 연속 1위를 달성하는 등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이에 더해 골든디스크를 수상하며 최고의 히트곡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 세 번만에 대히트
물론 이렇게 되기까지는 여러 과정이 있었다. 이선희는 우연히 이 노래를 듣게 되었는데
음율이 가슴에 와 닿았다. 작곡가를 통해 본인이 이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의사를 물었고
좋다는 승낙을 받자마자 양인자씨에게 부탁해 가사를 본인에게 맞게끔 여성스럽고 애절한
내용으로 바꿔 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양 선생은 황진이와 소세양의 30일 사랑이야기에 귀결하고, 그야말로 애뜻한 감성을 담은 사연의 가사로 완성시켰다. 보컬 또한 강렬하고 힘찬 스타일에서 벗어나 여성스럽고 애절한 모드로 변환시켰다.
보통의 유행가 스타일을 벗어나 3차까지 리메이크되면서 히트를 하게 된 것도 특이하지만 이 노래를 작사한 양인자씨와 김희갑작곡가가 이 3차 작업을 통해 천생연분의 연을 맺은 것이 이야기꺼리 다름아니다.
◆ 노래가 맺어준 부부
김희갑 작곡가는 1936년생, 양인자 소설가는 1945년생으로 김희갑 씨는 재혼, 양인자 씨는 미혼인 상황이었다. 이 노래를 같이 작업하며 알아가는 과정에서 노래가 나온 다음 해인 1987년에 결합했고, 지금까지 백년해로하고 있다.
이선희가 이들 부부의 결혼식날 축가로 이 노래를 불러 단순한 사랑의 노래를 넘어서 그들
사랑을 기념하는 상징곡이 된 듯하다.
본시 양 선생은 △소설가 △극작가 △각본가로 유명했으나 결혼 후에는 남편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작사가로 나섰고 반야월, 손로원 이상 가는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 가요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녀가 작사한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2006년 봄날은 간다에 이어 시인들이 뽑은 시 보다 더 아름다운 노래 2위에 마크되기도 했다.
결혼 후 작사가가 된 양 선생은 우리의 삶을 자극한 많은 가사를 내놓았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 그 겨울의 찻집, 서울 서울 서울, 큐 등을 비롯,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김국환의 타타타, 문주란의 여자는 남자를 귀찮게 해, 혜은이의 열정, 뮤지컬 명성왕후 등 이 들이 손잡고 만든 곡이 김희갑의 총 3000여곡 중 500여곡이 넘는다.
김희갑 선생은 한국 대중 문화의 황금기를 열었다는 평을 받는 작곡가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을 비롯해 지난 60여년간 많은 곡을 만들었다. 2025년 11월5일엔 그의 음악 여정을 담은 다큐멘타리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이 개봉되기도 했다.
◆ 방학숙제로 한국의 사강이 되다
양인자는 1945년 함경북도 나진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여섯 달을 살다 부산으로 왔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었던 1960년. 해방둥이의 일상에 소설 같은 일이 끼어 들었다. 부산여중 3학년 때 쓴 '돌아온 미소'가 이듬해 책으로 출간됐다.
당시 한 장 정도의 작문을 내라는 게 방학 숙제였는데 쓰다 보니 700장이 넘어갔고, 어린 소녀의 우정을 담은 이 소설은 국어 선생의 추천으로 출간돼 1년만에 5쇄를 찍었다. 양인자에겐 한국의 사강 이란 별명이 붙었다. 19세기에 등단한 프랑스 여류작가 프랑수아즈 사강이 쓴 '슬픔이여 안녕'이란 10대의 사랑과 우정을 다룬 소설을 빗댄 것이다.
◆ 방송 작가 김수현과의 인연
그는 대학 졸업 후 월간지 '여학생'에서 기자로 일했다.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동료였다. 김수현 작가의 권유로 드라마 작가의 길로 나섰다.
김수현 작가가 두 살 위, 처음엔 같이 소설을 썼다. 둘 다 신춘 문예에 떨어져 김 씨가 "먹고 죽게 쥐약 사 오라"고 해 진짜 사 간 일도 있었단다. 소설에 대해 미련을 계속 못 버리다 김수현씨는 방송 쪽으로 후회 없이 갔고 얼마 후 양 선생도 드라마 작가로 돌아서 '부부만세' '제3교실' 등을 썼다.
알고 싶어요. 이 노래는 1986년에 이선희가 불러 공전의 대히트를 했으나 불편한 진실이 있는 듯하다. 사실 양인자 씨가 이 노래를 번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양선생이 허균의 황진이·소세양의 이야기에 착안해 가사를 만들었는데, 이 노래가 유명해지자 소설가 이재운 씨가 주간조선이라는 매체에 청사홍사를 연재하며 가사를 15세기 버전의 한시로 바꿨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인터넷 매체에서는 황진이가 소세양을 못 잊어 쓴 한시로 알려져 있다.
◆ 황진이는 양귀비와 다르다
역대 최고 미인을 꼽을 때 중국은 양귀비(楊貴妃 719-756), 서양은 클레오파트라, 한국은 황진이(1506~1567)를 꼽고 있다.
조선 중기의 황진이는 이들과 다르게 미모를 겸비했을 뿐만 아니라 학문과 시조에도 뛰어나 시조 작품 6수가 청구영언을 비롯한 여러 시조집에 전해지고 있을 정도였으며더 나아가 서화를 겸한 멋진 기녀였다.
따라서 당시 수준높은 학자나 시인들과의 사랑이야기가 운치있게 전해져 내려오고 있는 가운데 특히 서경덕을 짝사랑해 유혹하려 했으나 실패해 사제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훗날 진정 황진이가 사랑했던 사람은 익산 출신으로 대제학을 지낸 소세양이였다는 사실 또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상철 위드컨설팅 회장/칼럼니스트·시인·대지문학동인/ 한국HR서비스산업협회 회장(前)/국회 환노위 정책자문위원/ 국회의원 보좌관(대구)/ 쌍용그룹 홍보실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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