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사 김혜인] 아마 고등학생 때인 걸로 기억한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읽으며 그 안의 설정 하나하나가 모두 끔찍했다. 인간이 배양되는 계급사회라는 점도 그렇지만 예술과 종교와 철학이 없으며 모든 감정을 약물 ‘소마(Soma)’로 통제하는 세상이라니!
소마는 모든 불쾌한 감정을 없애는 약이다. 소설 속 버나드가 삶의 회의감을 느낄 때 레니나는 “그럴 땐 소마를 먹어 봐”라고 말하곤 한다. 그 대사가 종종 떠오를 때면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나, 40대가 된 나는 손쉽게 불쾌한 감정을 통제할 수 있는 소마가 늘 주머니에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내 주머니엔 소마 대신 렉사프로가 있다. 2년 전 수면 장애와 짜증이 느는 걸 느끼고 정신과에 갔다. 뇌파 검사와 문진 결과 스트레스가 꽤 높았다. 세 가지 약을 처방받아 6개월 복용하고 점차 가짓수와 용량을 줄여나갔다. 의사는 내 스트레스 상황이 빠른 시일 내에 개선되기 어렵기에 남은 약은 상비약처럼 가지고 있으라고 권했다.
그는 항우울제가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지는 못한다고 했다. 규칙적인 일과를 보내며 명상, 독서와 글쓰기, 운동을 하라는 당부를 더 많이 했다.
그러나 약 복용은 부정적 감정이 폭발하는 것을 막는 데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발달 장애 아이를 키우며 극심한 스트레스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종종 내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병원에 가서 약을 처방받으라고 권했다. 그러니까 나는 감정 조절을 위해 약을 복용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응용행동분석(ABA) 치료사가 아이에게 약을 먹이길 권했을 때, 나는 너무 절망해서 몸을 일으킬 힘조차 나지 않았다.
자폐 아동은 감정 조절 문제를 많이 겪는다. 공식적 통계를 확인하진 않았지만 만 6~7세부터 약을 복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알고 있다. 아빌리파이가 대표적인 약이다. 내 아이도 필요할 수 있다.
자폐 진단을 받았을 때 약은 언제부터 고민해야 하는지, 내가 먼저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지금도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더 묻지 않았다. 아이가 ‘고작 만 3세’라는 생각에서였다.
진단과 약 복용에 대해서는 좀처럼 먼저 말을 꺼내지 않는 치료사가 얼마 전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이는 연령에 비해 분노발작 강도가 매우 심하다고. 행동수정기법이 보통 수개월 내에 효과를 보는 데 반해 1년이 넘은 교육에도 불구하고 효과가 미미하단다.
분노발작은 아이 자신에게 너무 힘든 일이다. 그래서 약을 권한다는 걸 안다. 나도 아이를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
그러나 이 불편하고 괴로운 마음은 뭘까? 아이 약 복용에 관해 무엇이 내 마음을 괴롭게 하는지 해석할 시간이 필요했다. 다시 소마로 돌아갔다.
혼잡한 군중 속에서 내내 우울한 기분인 버나드가 말했다. “나는 이대로 있고 싶어. 비록 비참하더라도.(I’d rather be myself. Myself and nasty.)”
레니나는 다시 소마를 권했다. 그러나 버나드에게 필요한 건 소마가 아니었다. 소마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문제를 느끼지 못하게 만들 뿐이다.
나는 내 아이가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게 될까 봐 두려웠다.
아이는 비효율적인 루틴으로 길을 걷고, 버튼과 문에 집요하게 고집을 부리며, 남들은 신경 쓰지 않는 순서를 따진다. 타인과 소통되지 않는 강박으로 평범한 일상이 어렵다. 그 모든 강박을 완화하겠다고, 사회의 기준에 맞추겠다고, 내가 아이의 세상을 지나치게 통제한 건 아닐까.
아이가 분노발작하며 고통스럽게 "왜!"라고 내지른다. 그건 단지 괴성이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조리를 향해 던지는 절박한 질문일지 모른다.
다음 달에 소아정신과 주치의를 만난다. 아이의 분노발작 문제와 약 복용을 상의할 예정이다. 그 다음,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아이가 정체성을 치열하게 고민하며 때로는 슬픔에 가라앉기도 하고 부당함에 분노하기를 바란다. 예술과 종교와 철학의 풍부함 속에서 환희와 연민, 고뇌와 평안을 얻길 원한다.
내 주머니엔 렉사프로가 있다. 나는 그걸 꺼내기보다 규칙적으로 생활하려 노력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한다. 이웃에게 농담을 건네고 부조리한 사회를 욕한다. 세상이 더 나은 곳으로 변하도록 목소리를 낸다.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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