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경제] 2011년 3월 11일 오후 2시 46분, 일본 미야기현 앞바다에서 규모 9.0의 초대형 지진이 발생했다. 동일본대지진(東日本大震災)으로 기록된 이 재난은 쓰나미와 원전 사고까지 겹치며 2만 명 가까운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았다. 그러나 이 엄청난 피해를 키운 배경으로, 당시 방송 시스템의 한계와 형식적인 대피 매뉴얼이 지적되고 있다.

지진이 발생한 직후, 주요 방송국들은 "지진입니다. 진정하십시오"라는 멘트를 반복했다. 짧고 차분한 이 문장은 일견 침착함을 유도하는 듯했지만, 실상은 위기의식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비판이 이어졌다. 실제로 많은 지역 주민들이 해일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한 채 일상적인 대피 준비만 하다가, 급속도로 밀려든 쓰나미에 휩쓸렸다.
이 사건 이후, 일본 정부는 재난 방송 매뉴얼을 전면 개정했다. 총무성과 기상청, 방송국 등이 공동으로 참여한 새 지침에서는,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보다 명확하고 직설적인 언어를 사용할 것을 권장했다. "쓰나미가 옵니다. 지금 당장 높은 곳으로 도망치세요"와 같은 명령형 문장을 포함한 것이다. 방송 내용도 텍스트 자막뿐만 아니라, 큰 글씨와 굵은 색상, 음성 경보, 스마트폰 긴급 알림 등 다양한 수단을 통해 확산되도록 개선됐다.
당시 일본 각지의 학교와 공공시설에서는 '오하시모(おはしも)'라는 대피 지침이 널리 쓰이고 있었다. 이는 '밀지 말고(押さない), 뛰지 말고(走らない), 말하지 말고(しゃべらない), 돌아가지 말라(戻らない)'는 네 가지 행동 수칙을 말한다. 평상시에는 군중 밀집 상황에서 사고를 방지하기 위한 유효한 지침이지만, 3.11 당시에는 오히려 즉각적인 생존 행동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시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일렬로 정렬시키고 대피 방향을 결정하는 과정이 길어지면서, 대피가 지연된 사이 쓰나미가 빠르게 밀려들어오는 비극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일본의 일부 지방자치단체와 학교는 ‘오하시모’를 수정하거나 새로운 구호로 대체하기 시작했다. “무조건 살아남아라”, “망설이지 말고 뛰어라” 등의 현실적인 지침이 강조됐고, 각자 상황에 따라 판단하는 능력을 기르는 교육도 병행됐다. 행동 훈련도 단순히 줄을 서서 대피하는 방식이 아니라, 각자 흩어져 있던 상황에서 고지대로 가장 빠르게 이동하는 식으로 바뀌었다.

지난해 1월 1일, 일본 이시카와현 노토반도에서 규모 7.6의 강진이 발생했을 당시, 방송에서 이렇게 외쳤다.
큰 쓰나미가 옵니다! 지금 당장 높은 곳으로 도망치세요!
이는 기존의 조용하고 점잖은 방송 어조에서 완전히 벗어난 방식이었다. '진정하십시오'라는 표현은 사라졌고, 대신 직설적이고 반복적인 경고가 수차례 이어졌다.
이런 변화는 3.11을 계기로 마련된 새 매뉴얼과 대응 방식이 현장에서 실제로 적용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특히 노토반도 주변의 자치단체들은 3.11 이후 훈련을 반복해 온 지역으로, 일부 주민들은 지진 발생 1분도 안 돼 자발적으로 고지대로 이동했다. 이는 경고의 방식과 주민 교육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동일본대지진의 교훈은 14년이 지난 지금, 경고 방식과 대피 행동, 시민 교육 전반에 걸쳐 일본 사회의 대응 방식을 근본부터 바꿔놓았다. 과거의 형식적 지침은 사라지고, 보다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생존 중심의 원칙이 자리 잡았다. ‘망설이지 말고 도망치라’는 메시지는 단순한 구호를 넘어, 이제는 방송과 매뉴얼, 교육 현장까지 관통하는 일본 재난 대응의 새로운 표준이 되고 있다.
[포인트경제 도쿄 특파원 박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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