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드는 사람들은 출판업계를 ‘홍대 바닥’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곳에 많은 출판사가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문화 예술의 거리로 불리던 홍대의 옛 정취도 지금은 많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의미 있는 책의 가치를 전하고 싶습니다. 홍대 바닥에서 활동 중인 여섯 명의 출판인이 돌아가며 매주 한 권씩 책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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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조민영] 내가 다닌 고등학교는 정릉 부근 언덕배기에 자리한다. 후문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작은 절이 있는데, 하루는 야간 자율학습을 앞두고 친구 몇 명과 그곳에 들어가 보았다.
여느 가정집 대문처럼 생긴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깜짝 놀랐다. 문턱을 넘는 순간 외부 소음이 일시에 차단된 듯 사위가 고요해졌기 때문이다. 왁자지껄한 학교 운동장에서 불과 몇 걸음 떨어진 곳인데도, 그곳은 마치 다른 세계 같았다.
땅거미가 질 무렵 어둑한 분위기에, 경내는 바람 소리마저 숨죽인 듯 괴괴했다. 곧 자율학습 시작종이 울릴 시간이었지만 나는 한동안 발길을 떼지 못했다. 소란한 마음을 잠재워주는 이곳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다.
그날 이후 그 사찰은 내게 특별한 공간이 되었다. 종교적인 믿음이 없어도 누구에게나 문을 열어주는 이 고요한 세계가 작은 숨구멍 같았다. 여행길에 들르는 명승지 사찰도 좋지만, 특히 도심 사찰은 복잡한 세상의 여백 같은 느낌이다.
이번에 소개할 책 <나 혼자 서울 사찰 여행>은 도시 소음과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 일상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여러 사찰을 섬세하게 따라간다. 사찰에서 흔히 마주하는 불상과 불화 의미를 설명하고, 그와 관련된 조선시대 불교 역사와 더불어 불교문화도 다룬다.
책 앞부분에서는 보신각이 있는 종각에서 출발해 청계천을 지나, 동대문을 거쳐 돈암동 한성대로 이어지는 여정을 소개한다. 여기서는 옛 도읍 한양 사대문 부근에 세워진 원각사(탑골공원), 흥천사 등을 둘러본다. 대략 지하철 1호선과 4호선을 타면 갈 수 있어 내게는 친근한 곳이다.
다음으로 용인 호암미술관에 들러 석가모니 생애를 그린 불화를 살펴본다. <석가탄생도>, <석가출가도>, <팔상도>가 그 주인공이다. 왕비, 공주, 후궁 등 왕실 여성의 불심을 엿볼 수 있는 <궁중숭불도>도 눈길을 끈다.
그들은 자신이 섬기던 왕이 서거하면 궁을 떠나야 했고, 조선 전기만 하더라도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 경우가 잦았다. 신심이 깊었던 이들은 사찰을 화려하게 장식하는 불화를 후원하며 불교 미술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제 여정은 다시 사찰로 돌아가, 강남 한복판 빌딩 숲 사이에 들어앉은 봉은사로 향한다. 이곳은 과거에도 “도성 안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무릉도원 같은 이미지를 지니고”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사찰은 저마다 절절한 사연을 지녔지만, 그중에서도 봉은사는 역사적으로 얽힌 인물도 많고 외적으로도 큰 부침을 겪었다. 임진왜란과 그 이후 발생한 화재 및 파손으로 대부분 건물이 사라졌고, 여러 차례 중건되어 사실상 근현대 유적으로 보아야 할 정도다.
봉은사의 거대한 미륵대불과 주변 빌딩이 비현실적인 대조를 이루는 모습을 뒤로하고, 다음은 북한산성을 따라 지어진 사찰로 발걸음을 옮긴다.
북한산은 서울 강북구, 도봉구, 은평구, 성북구, 종로구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양주시, 의정부시에 걸쳐 있는 큰 산이다. 큰 산인 만큼 사찰도 많다. 병자호란 이후 북한산 일대에 축조한 북한산성 능선을 따라, 각 성문마다 절을 지어 군대가 머물렀는데 이를 승영이라고 한다.
북한산에는 승영 외에도 줄잡아 20개가 넘는 사찰이 있다. 그중 산 중턱에 자리한 승가사에는 거대한 바위 면에 조각된 마애석가여래좌상이 있다. 멀리 지방에 있는 고찰까지 가지 않아도 이런 장엄한 불상을 볼 수 있다니, 서울이란 도시가 품은 다채로움이 남다르게 다가온다.
<나 혼자 서울 사찰 여행> 마지막 여정은 다시 종각이다. 종각 부근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불교종단인 조계종의 본산 조계사가 있다. 조계사에는 조선 불교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목조여래좌상을 비롯해, 불교 관련 국보와 보물을 만날 수 있는 불교중앙박물관이 있다.
조계사는 접근성이 좋고 워낙 유명해서, 내가 고등학교 시절 느꼈던 딴 세상 같은 고요함을 기대하긴 힘들겠다. 하지만 이 책 <나 혼자 서울 사찰 여행>에서 배운 불교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그 오랜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이유를 되새기기에는 더없이 좋은 장소다.
조선이 유교 국가를 표방했음에도, 불교는 오랜 탄압 속에서도 끈질기게 명맥을 이어왔다. 그 이유는 분명하다.
“결국 유교 사상으로 무장한 조선 지배자들이 아무리 불교를 비판하더라도, 성리학은 병들고 늙고 죽는 인생에 대해 명확한 해답을 주지 못했으므로 백성들이 쉽게 다가가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66쪽)
삶의 고통에 다가가는 언어를 지닌 불교는 시대와 이념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에게 조용한 위안의 공간을 내어준다. 이 책은 바로 그 고요한 공간들을 서울이라는 일상 속에서 발견하도록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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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조민영. 세 아이가 잠든 밤 홀로 고요히 일하는 시간을 즐긴다. 월간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번역위원으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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