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인의 반걸음 육아 71] 글자를 읽습니다

마이데일리

[교사 김혜인] 어린이집 현관에서 아이가 오랫동안 미적거린다. 신발장 바닥에 있는 이름표를 살펴보는 중이다.

등원을 맞이하는 선생님 세 분이 기다리고 있는 상황은 전혀 안중에 없다. 아이를 재촉했다가 분노발작을 일으키는 걸 자주 경험한 선생님들은 말없이 차분히 기다린다.

아이는 이름표를 하나씩 살펴보다가 어떤 신발을 획 치워 버린다. 그게 이름표를 가린 채 놓여 있어서다. 선생님 한 분이 “뭐라고 쓰여 있는지 읽어 봐” 하니, 신발을 치운 자리에 드러난 이름을 읽는다.

모든 이름을 다 훑어본 아이는 그제야 자기가 고집하는 특정 자리에 가서 신발을 벗은 후 내게 인사도 하지 않은 채 안으로 들어간다.

간혹 세 살이나 네 살 때 글을 깨우친다는 말을 듣긴 했어도, 내 아이가 그럴 줄은 몰랐다. 아이는 30개월이 되기 전에 숫자를 100까지 익혔고 세 돌이 되기 전에 알파벳과 한글 자모음을 모두 익혔다. 세 돌이 지나서는 받침 없는 글자 대부분을 읽었다.

작년엔 한동안 숫자와 알파벳, 한글 자모음을 비교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숫자 2와 알파벳 E는 소리가 비슷해서, 알파벳 O와 한글 ㅇ은 모양이 비슷해서 좋아했다. ㄷ을 90도 돌려서 U라고 읽고, ㅅ을 거꾸로 돌려서 글자체에 따라 V 혹은 Y라고 말하며 즐거워했다.

최근에는 저 혼자 안내문 글자를 읽고 있을 때가 많다. 일전엔 키즈카페 트램폴린에서 신나게 뛰다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한 글자씩 또박또박 ‘유치부전용’ 하고 말했다.

주변 사람들은 아이가 책도 읽겠다며 반색했다. 으레 책을 좋아하리라 짐작했다.

아이는 자발적으로 책을 꺼내 글자를 하나씩 가리키며 내가 읽어주길 원했다. 그러나 내용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책 제목 위에 있는 ‘다중지능 프로그램’과 같은 말이나 출판사명, 저자 이름을 가리켰고, 그걸 읽어주면 웃긴 말처럼 들리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지만 아이는 글자를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가리키며 거꾸로 읽어달라고 요구했다. 또 오로지 자기가 원하는 책만 꺼내는 걸 허용했다. 내가 어떤 책을 선택해서 꺼내면 마치 흉물이라는 듯 서둘러 뺏어서 제자리에 꽂았다.

아이는 아직 맥락이나 내용보다는 글자 자체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글을 깨우친 게 아니라 글자를 깨우쳤다고 봐야겠다.

자폐인 대부분은 글을 소리 내어 읽는 데에는 강점을 보이지만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고 한다. 또 지능이 높다 하더라도 은유나 반어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하고 추론적, 비판적 의미를 파악하는 건 더욱 어렵다.

나는 오래전부터 아이와 침대에 함께 기대어 동화책을 읽어주다가 잠드는 모습을 동경했다. 아이가 졸린 눈을 비비며 더 읽어달라고 조르면 “이번이 마지막이야” 하며 실랑이를 하는 풍경을 꿈꿨다. 그 꿈이 저만치 보이는 듯도 한데, 손을 뻗어보면 너무 멀어서 잡히지 않을 것만 같다.

|김혜인. 중견 교사이자 초보 엄마. 느린 아이와 느긋하게 살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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