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강다윤 기자] "왜 저를 쓸까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해서 저를 찾겠죠? 글쎄, 제가 누구한테 특별히 할 수 있는 말은 없는 것 같아요. 그냥 저는 여전히 쓸모 있는 배우로 살아남고, 여전히 통제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혜영은 최근 서울 종로구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마이데일리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영화 '파과'(감독 민규동) 개봉을 앞두고 만나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파과'는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조직에서 40여 년간 활동한 레전드 킬러 '조각'(이혜영)과 평생 그를 쫓은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김성철)의 강렬한 대결을 그린 액션 드라마. 구병모 작가의 동명 베스트셀러를 원작으로 한다.
이혜영 극 중 모든 킬러들이 열광하면서도 두려워하는 전설적인 킬러 '조각'으로 분한다. '조각'은 오랜 세월을 통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노련함을 가졌으나, 세월로 인한 한계 또한 부딪히게 되는 인물이다.

이날 이혜영은 "요즘 젊은 친구들이 시나리오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니까 마음이 아팠다. 이렇게 오래 하고도 이런 기회를 잡다니 놀랍다. 그렇지만 나도 늘 이런 작품을 만나지는 못했다. 나한테도 아주 특별한 작품"이라며 "'파과'라는 소설이 있는지도 몰랐다. 감독님이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를 한다고 하셔서 그제야 알았다. '파과'의 마니아들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고 말했다.
처음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는 '조각'이라는 인물에 회의감이 들었다.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껴지지 않았고, 스스로 할 수 있을지 확신도 서지 않았다. 왜 자신을 떠올렸는지, 아직 그 정도의 나이는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각에게 이상한 매력을 느꼈다. 일단 이름이 멋있었고, 설명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 힘에 관심도 생겼고, 능력 있는 할머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나리오는 소설 하고는 또 좀 달랐어요. 머릿속으로 잘 상상이 되지 않았어요. 그 언어들이, 흔히 액션 영화에서 보는 거친 말투도 아니었고요. '어떻게 액션을 하면서 저런 대사를 할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그런 와중에 편하게 배우를 할지, 한 번 도전을 해볼지 중에서 '도전'을 선택한 거죠."

하지만 촬영은 순탄치 않았다. 하필 액션을 찍는 첫날, 싱크대에 부딪히는 장면에서 갈비뼈가 부러졌다. 처음엔 한 개 반이 나갔지만 촬영을 며칠 안에 끝내야 했기에 쉬지 못하고 강행했다. 결국 세 개까지 부러졌고, 그 부상은 촬영이 끝날 때까지 회복되지 않았다. 몸을 바쳐 연기했지만 '늙었지. 다쳐서 회복도 더디지. 이러다 배우 못하는 거 아니야' 하는 공포가 밀려왔다. '영화까지 좋지 않은 평을 받으면 나는 뭐지' 싶었다. 그래서 '파과'는 정말 목숨을 걸고 임한 작품이었다.
이혜영은 "영화일지를 매일 썼지만 매일 불만이었다. 매일 다쳤고, 매일 감독님이 내 마음대로 못하게 했다. 나를 꽁꽁 묶어놓고 '두 발자국만 가라', '지금 너무 귀엽다', '왜 이렇게 친절하냐', '감정을 빼라'라고 했다. 하여튼 매일 그런 것만 썼다. 그래도 개봉했을 때, 나의 불신으로 인해 감독님께 미안하다는 마음이 컸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다"며 "실제로 베를린에서 영화를 봤을 때 감독님께 미안했다. '감독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싶었다"라고 후련한 듯 웃었다.
결과적으로는 '파과'에 만족했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혜영은 가장 마음에 들고 애착이 가는 장면이 있는지 묻자 고개를 저었다. 조각의 외로움, 조각의 흔들림이 편집 과정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아쉬움이 더 많이 남았다. '왜 우리나라에는 세 시간짜리 영화가 없을까, 두 시간 반이면 어때'라는 생각도 들었다. 현실적인 여건 속에서 오히려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래서 '이 장면은 내가 봐도 멋있다' 싶은 순간은 없었다.
"그럼에도 많은 분들이 너무 칭찬 일색이었어요. 저에게 애정을 갖고, 뭔가 한 번 보여주기를 바랐던 분들은 진짜 환호를 질렀어요. 기대에 계속 못 미쳤는데, 이번에는 그래도 뭘 보여준 것 같다고요. 그런 것 때문에 위로를 받는 거지 '이 영화에서, 그 장면은'하고 특별히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우리는 여전히 아쉽고, 뭔가 타협해야 하는 지점이 있었던 것 같아요. 혹시 감독님의 디렉터스컷이 나온다면 조각의 외로움과 고독을 더 깊이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많은 이들이 꼽는 '파과'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마지막 액션 장면이다. 60대 킬러 조각과 혈기왕성한 청년 투우가 맞붙어 강렬하면서도 섬세한 액션을 펼쳤다. 여기에 처절함과 애잔함, 두 킬러의 복합적인 감정도 뒤섞였다. 촬영을 마친 뒤 이혜영은 민규동 감독, 김성철과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 이를 이야기하자 이혜영은 단번에 '쓸모'라는 단어를 꺼내 들었다.
그는 "'쓸모'라는 단어보다 더 강하게 다가오는 건 '쓸모없다'였다. 이 영화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애가 쓸모 있는 인간이 됐다. 어쨌든 살았고, 버텨냈다"며 "오로지 최선을 다해 조각을 무사히 끝내야 된다는 생각에 달려갔는데, 어느 날 갑자기 끝이었다. '이제 난 어디로 가야 하지' 싶을 정도로 앞이 깜깜했다. '왜 끝나는 거야. 나한테 뭔가 보상하고 떠나야지'라는 싶었다. 그러다 '내가 만약 여기서 살아남으면 쓸모 있는 배우'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 믿음은 하루하루 현장에서 단련됐다. 민규동 감독은 전날 밤에 다음 날 촬영본을 보내고, 30분 뒤에는 다시 수정본을 보내왔다. 이혜영은 잠도 자지 못하고 다시 돋보기를 끼고 시나리오를 들여다봐야 했다. 결국 '대충 이런 거였잖아'하며 촬영장에 나갔다. 효율적인 촬영을 위해 현장에는 대역배우도 있었고, 조명과 앵글도 다 맞춰둔 상태였다. 하지만 이혜영은 '난 이렇게는 못 앉는다'며 조각의 자세부터 바꿨다.

그러나 이내 이혜영은 "감독님이 조용히 '우리 100명이 약속하고 나왔는데 혼자만 이러면 어떡하냐'고 하더라. 그래서 크게 깨달았다. 감독님도 '이 사람한테는 시간이 필요하구나'하고 아셨다"며 "리허설은 다른 애가 다 하고 나는 인형처럼 있어야 했다. 인형도 인형 같은 애들이 해야지, 나는 인형이 익숙하지 않았다. 적당히 스스로 체험해야 이게 됐다"고 털어놨다.
이어 "감독님도 나중에 '나도 선배님이 정해놓은 프레임에서 발휘하지 못하고 인형처럼 하는 걸 원하는 게 아니다. 그 안에서 찾으시라. 나도 이제 알았다'고 하셨다"며 "그래서 나도 감독님께 한 수 배웠다. 내 스타일대로만 하면 다른 젊은 감독들이 '저 배우는 정말 어려워' 하지 않겠나. 쓸모 있게, 앞으로 쓸모 있는 배우가 되기 위한 훈련이 됐다"고 미소 지었다.
이는 그간 단 한 번도 이혜영에게 디렉팅을 시도한 감독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영화든 드라마든, 이름난 거장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혜영은 언제나 자신이 상상하는 대로 연기했다. 스스로 "나의 힘은 무지함에서 나왔다"고도했다. 그날 느낀 감정에 따라 연기가 달라졌고, 아무리 상상해도 현장에 가면 달라지는 게 있었다. 누구도 예상하지 않았고 아무도 상상하지 않았던 것을 함께 즐기던, 넉넉하고 여유로운 시절이었다.
그러면서도 이혜영은 "여태 함께했던 감독님들은 내 의견을 존중해 주셨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감독님이 피곤하셨던 거구나 싶다. 상대배우들이 피곤했던 거구나, 심지어는 스태프들도 그래서 그랬구나 싶었다. 이번 영화를 하면서 깨달았다. 남을 신경 쓰지 않고 몰두한다는 게 안 좋게 보였을 수도 있겠더라"라며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은 아니다. 원래 그냥, 그렇게 생긴 거다. 몰랐던 거다"고 멋쩍게 웃었다.

하지만 이혜영은 여전히 '배우 이혜영'의 힘의 원천으로 '무지함'을 꼽았다. 자세히 아는 것을 귀찮아하고, 자기 혼자 세계에 갇혀서 혼자 상상하는 것. 지금도 남들을 다 알고 있는데 혼자만 모르고, 상상하고 기대하고 실망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진짜 혼자만 몰랐던 일이다. 어쩌면 그런 면이 있기에 배우가 된 것일지도 모른다. 연기를 배운 적 없고, 한 번도 통제당한 적도 없었던 이혜영이.
"어려서부터 '나는 배우가 될 사람인데 왜 이런 걸 시키세요?' 했어요. '쟤 돌았나?' 했겠죠. 하여튼 그랬어요. 배우를 신으로 생각했는지, 감독을 신으로 생각했는지… 감독을 또 얼마나 믿는지 몰라요. 너무 존경하고 너무 믿어요. 말은 안 들으면서! 그래놓고 나중에 혼자 또 실망하고 원망하고. 몰라, 내 힘을 한 번 좀 찾아봐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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