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광주=박설민·김두완 기자 우리가 사는 아파트에는 1층과 2층, 3층이 있다. 하지만 1.5층, 1.25층 같은 소수 층은 없다. 너무 당연한 사실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와 분자의 세계에서도 이와 비슷한 규칙이 존재한다. 원자와 분자의 에너지는 계단을 오르내리듯 정해진 상태 사이에서 변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빛을 흡수하거나 내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규칙을 깨버리는 곳이 있다. 바로 ‘양자(Quantum)’의 세계다. 이곳에서는 우리가 평소 당연하게 여겼던 상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일어난다. 아주 작은 입자가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원래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을 통과하기도 한다.
이처럼 양자 세계는 상식적으로는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 하지만 이곳의 현상 원리를 밝혀낸다면 물질과 에너지의 비밀을 풀어내는 것도 가능하다. 전 세계 물리학자들이 양자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남 광주에 위치한 ‘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변환 연구단’도 그중 하나다.
◇ 분자 하나에 숨겨진 비밀을 찾아서… 연구장비까지 직접 만드는 과학자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분자 하나하나에도 에너지가 있다. 그렇다면 이 에너지는 어떻게 이동하고 변환할까. 또 소멸 과정은 어떻게 이뤄진다고 생각하는가.”
지난 15일 방문한 광주과학기술원(GIST)의 기초과학연구원(IBS) 양자변환 연구단에서 김유수 연구단장은 기자에게 질문했다. 이 질문의 답을 찾는 것이 바로 연구단의 목표다. 눈에 보이지 않는 원자와 분자 하나가 갖고 있는 에너지가 어떻게 이동하고 다른 형태로 바뀌는지 관찰하고, 나아가 이를 제어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이때 연구단은 양자 세계에서 발생하는 ‘분자 하나’의 변화에 주목한다. 우리가 주변에서 접하는 물질은 셀 수 없이 많은 원자와 분자로 구성돼 있다. 이를 한꺼번에 관찰하면 전체적인 특성은 알 수 있다. 하지만 세부 정보는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수백 명의 사람이 동시에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과 한 사람의 행동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의 차이다.
김호원 연구위원의 안내를 받아 GIST C동 실험실 내부로 들어갔다. 실험실은 두꺼운 검은색 천들로 벽과 장비들이 덮여있었다. 마치 옛 고전영화에 등장하는 경찰서의 사진현상소처럼 보였다. 이는 분자들을 관측하기 위한 초정밀 광학장비들을 운영하기 때문이다. 김호원 연구위원은 정확한 실험을 위해 빛을 철저히 차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핵심 장비는 ‘주사터널링현미경(STM)’이라는 특수한 장비다. 이 장비는 끝이 원자 수준으로 뾰족한 탐침을 물질 표면에 가까이 가져가 미세하게 흐르는 전류를 측정한다. 우리가 손으로 물체의 표면을 더듬어 모양을 알아내듯, 전기의 흐름을 이용해 원자와 분자의 모습을 살펴보는 것이다. 일반 현미경처럼 빛으로 확대해 보는 방식과는 다르다.
연구단 내부 실험실에서는 ‘장비 제작’도 한창이었다. 은색빛이 나는 거대한 진공챔버엔 여러 관들이 연결돼 있었다. 양자변환 연구단에서는 실험 목적에 맞춰 필요한 장치와 부품을 직접 설계하고, 맞춤 제작된 부품들을 조립해 장비를 구축한다. 기존 장비로는 관찰하기 어려운 미세한 현상을 연구하기 위해 실험에 필요한 기술과 장비부터 개발하는 셈이다.
김호원 연구위원은 “현재 연구단은 2대의 주요 실험장비를 운영하고 있고 별도의 공간에서는 새로운 장비를 구축하고 있다”며 “완제품 실험장비를 구매해 설치하는 방식이 아니라 연구 목적에 맞춰 장비를 설계하고 맞춤 제작된 부품들을 직접 조립한다”고 말했다.
◇ 1조 분의 1초를 제어하다… 빛으로 여는 양자기술의 미래
현재 광주과학기술원(GIST)에 자리한 IBS 양자변환 연구단은 김유수 단장을 중심으로 연구원과 학생연구원, 지원인력 등 총 28명으로 구성돼 있다. 일본에서 오랜 기간 연구 경험을 쌓은 김 단장과 다양한 전문성을 가진 연구자들이 함께 새로운 실험기술을 개발하며 주목할 만한 연구 성과를 거두고 있다.
김유수 단장은 일본의 대표적인 기초과학 연구기관인 이화학연구소(RIKEN)에서 약 25년간 연구한 과학자다. 특히 201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리켄의 수석과학자(Chief Scientist)에 선정돼 표면계면과학 연구실을 이끌었다. 이후 도쿄대학교 교수 등을 거쳐 2024년 9월 IBS 양자변환 연구단장으로 부임했다.
김유수 단장 부임 후 대표적인 연구단의 성과는 ‘단일 분자 여기자 생성 제어’ 연구다. 해당 연구는 지난해 3월 국제학술지 ‘사이언스(Science)’에 게재됐다. 국제 과학자들과 공동으로 진행된 이 연구는 분자 하나에 전자가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을 극도로 짧은 순간에 조절해, 분자가 빛을 내도록 만드는 데 성공한 것이다.
김유수 단장은 “이 기술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단일 분자의 초고속 양자현상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됐다는 것”이라며 “장기적으로 단일광자 광원, 분자 기반 양자소자의 동작 원리를 이해하고 성능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같은 양자변환 연구는 순수 기초과학학문 분야다. 하지만 산업 현장 등에 적용될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실제 양자변환 원리는 이미 우리 생활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스마트폰과 TV에 사용되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다. OLED는 아주 작은 유기물 분자에서 전기에너지에 의해 만들어진 전자와 정공이 다시 결합하며 빛을 내는 원리를 이용한다.
김유수 단장은 “물론 단일 분자 수준에서 확인한 양자변환 현상을 실제 산업 공정까지 확장하기까지는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면서도 “에너지가 분자에 전달되는 경로를 이해하고 반응이 선택적으로 일어나도록 유도한다면 에너지 소비를 낮추는 새로운 촉매 및 화학공정 기술로도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연구단은 빛을 이용해 분자의 양자상태가 어떻게 변하는지도 연구 중이다. 핵심은 극도로 짧은 순간에 일어나는 분자의 변화를 측정하는 것이다. 이 시간은 1피코초를 1초로 늘려 생각하면 무려 약 3만1,700년에 달하는 시간이다.
김유수 단장은 “초고속 광학기술과 원자 수준의 공간 분해능을 갖춘 현미경을 결합해 양자상태를 연구하고 있다”며 “이를 통해 물질이 에너지를 받아 빛을 내거나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리를 밝혀내고자 하는 것이 연구단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5~10년 동안 우리 연구단이 달성하고자 하는 가장 큰 목표는 원자와 분자 수준에서 일어나는 양자상태의 변화를 극한 상황에서 관찰하고 제어하는 것”이라며 “이 연구가 당장 우리 사회의 에너지·환경 문제의 해법을 제시하진 못하더라도 장기적 관점에서 고효율 에너지 전환, 신물질 개발을 가능케 하는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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