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마포=이민지 기자 “지갑에 운전면허증 넣고 다니는 게 평생소원이라는 분들이 많아요.”
시동을 걸고 바람을 가르며 도로 위를 달리는 일. 누군가에게는 평범한 일상이지만 시각장애인에게 ‘운전’은 평생 해보기 어려운 일이자, 한 번쯤 꼭 경험해 보고 싶은 꿈이다. 그 바람이 현실이 됐다. 지난 15일 서울 마포구 서부운전면허시험장에서 시각장애인들이 직접 운전대를 잡는 체험 행사가 열렸다.
‘흰 지팡이의 날’을 맞아 마련된 시각장애인 운전체험은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과 한국도로교통공단이 협업해 2021년부터 진행해 온 행사다. 흰 지팡이의 날은 시각장애인의 안전한 보행과 자립의 의미를 알리기 위해 세계시각장애인연합회가 1980년 제정한 날이다.
두 기관은 시각장애인에게 평소 접하기 어려운 운전을 직접 경험할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사회참여 기회를 넓히고 새로운 도전을 독려하기 위한 취지로 매년 체험을 이어오고 있다. 지금까지 이 체험을 통해 운전대를 잡은 시각장애인은 총 41명이다.
신동선 실로암시각장애인복지관 스포츠여가지원팀 팀장은 “복지관 이용자들에게 소원이 무엇인지 물으면 ‘운전을 해보고 싶다’는 답변이 상당히 많았다. 꿈속에서 자동차를 몰아봤다고 이야기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다”며 “그만큼 운전에 대한 바람이 크기 때문에 한국도로교통공단과 함께 매년 1~2차례 운전체험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체험은 시뮬레이터를 통해 자동차의 기본 조작법을 익히는 것부터 시작됐다. 운전석에 앉는 것 자체가 처음인 참가자들은 가속페달과 브레이크의 위치를 발로 더듬이며 익혀 나갔다. 차 시동 켜는 법과 기어를 조작하는 법 등을 서부면허시험장 직원들의 안내에 따라 익혀 나가는 참가자들의 얼굴에는 호기심과 설렘이 묻어났다. 이번 체험에는 약 4대 1의 경쟁률을 뚫고 8명의 중증 시각장애인이 운전석의 주인공이 됐다.
시뮬레이터 체험을 마친 참가자들은 곧바로 대형 기능장으로 향했다. 실제 자동차의 운전석에 앉은 참가자들은 시험관의 안내에 따라 조심스럽게 페달을 밟으며 차량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자도 한 시각장애인이 운전하는 차량의 뒷좌석에 올라탔다. “10m 앞에서 좌회전 할게요. 지금 왼쪽으로 핸들 돌려주세요.” 시험관의 안내가 떨어지자 참가자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가속페달과 브레이크를 다루는 감각이 익숙하지 않은 탓에 다소 거친 운전이었지만, 시험장을 두세 바퀴 돌자 운전에 조금씩 익숙해지는 모습이었다. 차창으로 바람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운전대를 잡은 참가자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이날 체험에 참여한 전맹 시각장애인 정진욱 씨에게도 운전은 특별한 경험이었다. 정씨는 “조수석이나 뒷좌석에만 앉다가 직접 운전석에 앉아 운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며 “시뮬레이터로는 운전한다는 실감이 잘 나지 않았는데, 실제 차를 운전하니 반동과 흔들림이 느껴져 진짜 운전을 한다는 게 실감났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시각장애인에게는 보이는 것에 대한 로망이 크다. 여성에게 예쁘게 화장하는 것에 대한 로망이 있다면, 남성에게는 운전에 대한 로망이 있다”며 “이렇게 운전하면서 속도감을 느끼는 게 쉽지 않은 기회인데 직접 경험할 수 있어 좋았다”고 덧붙였다.
◇ 자율주행차가 키운 ‘운전의 꿈’… 현실은 면허부터 장벽
운전대를 잡아본 참가자들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자율주행차로도 이어졌다. 목적지까지 스스로 주행하는 기술이 빠르게 발전하면서 전맹 시각장애인들은 언젠가 자신들도 자동차를 타고 원하는 곳으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감을 드러냈다. 동시에 현재로서는 운전면허조차 취득할 수 없는 현실에 아쉬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사실 모든 시각장애인이 운전면허를 취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도로교통법 시행령’ 제45조(자동차등의 운전에 필요한 적성의 기준)에 따르면, 제2종 운전면허는 두 눈을 동시에 뜨고 측정한 시력이 0.5 이상이면 취득할 수 있다. 한쪽 눈을 보지 못하는 경우에도 다른 쪽 눈의 시력이 0.6 이상이면 면허 취득이 가능하다.
전맹 시각장애인 안서연 씨도 자율주행 기술의 발전에 기대감을 내비치면서도, 현행 면허제도 아래서는 여전히 현실적인 장벽이 있다고 말했다. 안씨는 “자율주행차가 나오면 내 차를 타고 가족들을 데리러 가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다”면서도 “자율주행차라고 하더라도 운전면허가 필요하지 않나. 전맹인 입장에서는 운전면허를 취득한다는 것 자체를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할지 막막하고, 여러 장벽이 느껴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한국도로교통공단 서부운전면허시험장 박성민 면허시험부 과장은 “아직 자율주행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지 않은 만큼 장애인들이 실제로 이용할 수 있기까지는 조금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인다”며 “공단 내 자율주행연구소에서도 관련 연구를 진행하고 있지만, 우선 자율주행 기술이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안정성이 충분히 검증돼야 한다. 시각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생애 처음으로 운전대를 잡은 8명의 참가자에게는 체험을 마친 뒤 ‘명예운전면허증’이 수여됐다. 올해 처음 마련된 명예운전면허증에는 점자스티커도 부착됐다. 실제 운전면허증을 가질 수 없는 참가자들이 운전체험의 의미를 오랫동안 기념할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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