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총수 일가가 제한적인 지분으로 그룹을 지배하고 이사회가 이를 뒷받침해 온 대기업 경영 방식에 변화가 시작됐다. 개정 상법은 이사의 책임을 전체 주주로 확장하고 소수주주가 지지하는 후보의 이사회 진입 가능성을 높였다. 자사주를 활용해 우호 지분을 확보하는 전통적인 경영권 방어 방식도 제약을 받는다. 총수의 지배력은 앞으로 지분율뿐 아니라 이사회와 주주의 동의를 끌어내는 능력에 따라 좌우될 전망이다. 마이데일리는 삼성·SK·현대자동차·LG 등 4대 그룹의 지배구조를 들여다보고 개정 상법이 이사회 운영과 총수 리더십, 향후 승계 구도에 가져올 변화를 살펴본다.

[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국내 주요 대기업의 이사 선임 공식이 오는 10일을 기점으로 달라진다. 회사가 추천한 후보를 총수와 최대주주가 보유 지분을 앞세워 선임하던 기존 구조에 소수주주와 기관투자자가 영향력을 행사할 제도적 통로가 열린다.
당장 모든 기업의 이사회 구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개정 상법 시행 이후 이사를 선임하기 위해 소집되는 주주총회부터 집중투표제가 적용된다. 감사위원 가운데 다른 이사와 별도로 뽑아야 하는 인원도 늘어난다.
실질적인 첫 시험대는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가 될 전망이다. 기관투자자와 외국인 주주, 소수주주가 특정 후보에게 표를 모을 경우 회사 측이 추천하지 않은 인사가 이사회나 감사위원회에 진입할 가능성이 이전보다 커진다.
변화는 단순히 이사 몇 명을 교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등기이사 복귀 여부, SK그룹의 사업 재편, 현대자동차그룹의 순환출자 해소, LG그룹의 계열 분리와 향후 승계 등 총수의 지배력과 맞닿은 사안에도 주주의 영향력이 확대될 수 있다.
총수의 의중을 이사회 결의로 뒷받침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주요 경영 판단이 회사와 전체 주주에게 어떤 이익을 주는지 설명해야 하는 시대가 열리는 셈이다.
◇집중투표제 의무화…이사 선임 공식 바뀐다
3일 재계에 따르면 지난해 9월 공포된 2차 개정 상법은 1년의 유예기간을 거쳐 오는 10일 시행된다. 이에 따라 자산총액 2조원 이상 대규모 상장회사는 정관을 통해 집중투표제 적용을 배제할 수 없다.
집중투표제는 한 번의 주주총회에서 2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에게 보유 주식 수와 선임 이사 수를 곱한 만큼의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다. 주주는 주어진 표를 여러 후보에게 나눠 행사하거나 한 명에게 집중할 수 있다.
이사 3명을 선임한다면 100주를 가진 주주는 총 300표를 행사한다. 이 표를 특정 후보에게 몰아주면 지분 경쟁에서 열세인 소수주주도 자신들이 지지하는 인사를 이사회에 진입시킬 가능성이 생긴다.
집중투표제는 1998년 도입됐지만 대부분 기업이 정관에 배제 조항을 두면서 실제 활용은 제한적이었다. 지난해 기준 86개 공시대상기업집단 소속 상장회사 361곳 가운데 제도를 도입한 곳은 13곳으로 전체의 3.6%에 불과했다.
개정 상법 시행 이후에는 기존 정관에 배제 조항이 남아 있더라도 대규모 상장회사가 집중투표제 적용을 피할 수 없다. 시행일 이후 처음으로 이사 선임을 목적으로 주주총회를 소집하는 경우부터 새 규정이 적용된다.
소수주주가 추천한 후보가 자동으로 당선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주주의 표를 결집해 당선에 필요한 의결권을 확보해야 한다. 다만 최대주주가 회사 측 후보 전원을 선임하던 기존 방식에는 상당한 변수가 생겼다.
기업의 대응 전략도 달라질 전망이다. 집중투표제에서는 한 번에 선임하는 이사 수가 많을수록 소수주주가 특정 후보에게 표를 집중하기 쉽다. 기업들이 이사 정원을 줄이거나 이사별 임기 만료 시점을 분산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배경이다.
내년 정기 주주총회에서는 후보의 이력과 전문성뿐 아니라 이사회 정원과 임기 구조, 한 번에 선임하는 인원까지 주요 표 대결 요소로 부상할 가능성이 크다.
◇감사위원 분리선출 2명으로…대주주 표는 제한
경영진을 감시하는 감사위원회의 선출 방식도 강화된다. 다른 이사와 분리해 선임해야 하는 감사위원이 최소 1명에서 2명으로 늘어난다.
감사위원 분리선출은 주주총회에서 일반 이사로 선임한 뒤 감사위원을 정하는 방식과 다르다. 후보 단계부터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로 구분해 주주의 표를 받는다.
적용 대상은 자산총액 2조원 이상 대규모 상장회사와 자산총액 1000억원 이상이면서 상근감사 대신 감사위원회를 설치한 상장회사다.
분리선출 과정에는 이른바 ‘합산 3%룰’이 적용된다. 최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은 보유 지분을 모두 합해 발행주식 총수의 3%까지만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최대주주가 아닌 주주도 각자 3%까지 행사할 수 있다.
가령 총수 일가와 계열사가 지분 30%를 확보했더라도 감사위원 분리선출에서는 이들의 의결권이 합산 3%로 제한된다. 반면 여러 기관투자자와 소수주주가 각각 의결권을 행사한 뒤 같은 후보를 지지하면 최대주주 측 후보를 상대로 경쟁할 수 있다.
분리선출 대상이 두 자리로 늘어나면서 주주 측 후보가 감사위원회에 진입할 기회도 확대된다. 복수의 주주 추천 인사가 선임되면 감사위원회 내부에서 독자적인 의견을 형성할 가능성도 있다.
감사위원회는 회사의 회계와 업무를 감사하고 이사와 경영진의 직무 수행을 감시한다. 계열사 간 합병과 지분 교환, 대규모 내부거래처럼 총수 일가와 일반주주의 이해가 엇갈릴 수 있는 사안도 주요 감시 대상이다.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선출 확대가 동시에 시행되면 소수주주는 일반 이사 후보의 당선을 추진하는 한편 감사위원이 되는 이사 후보도 별도로 추천할 수 있다. 이사회와 감사위원회 양쪽에 주주 의견을 전달할 통로가 넓어지는 것이다.

◇이사 책임은 전체 주주로…‘그룹 이익’만으로 부족
이사의 책임 범위는 이사회 선출 방식보다 앞서 확대됐다. 지난해 7월 시행된 1차 개정 상법은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 및 주주’로 넓혔다.
이사는 직무를 수행하면서 총주주의 이익을 보호하고 전체 주주를 공평하게 대우해야 한다. 회사에 손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일반주주의 피해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졌다는 의미다.
특히 합병과 분할, 주식교환 등 지배구조 개편 과정에서 이사회의 부담이 커졌다. 거래 자체가 회사에 도움이 되더라도 합병비율이나 거래 조건이 총수 일가에 유리하고 일반주주에게 불리하다면 의사결정의 공정성을 둘러싼 분쟁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계열사 사이의 사업 양도와 자산 매매, 자금 지원, 대규모 투자도 마찬가지다. 과거에는 ‘그룹 전체의 이익’을 근거로 계열사 간 거래의 필요성을 설명했다면 앞으로는 각 상장회사와 그 주주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야 한다.
상장회사 사외이사의 명칭은 지난 7월 23일부터 ‘독립이사’로 변경됐다. 최소 선임 비율도 전체 이사의 4분의 1에서 3분의 1로 높아졌다.
독립이사 확대는 단순한 명칭 변경이나 인원 증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경영진이나 지배주주와 거리를 두고 회사와 전체 주주의 관점에서 안건을 판단해야 한다는 책임이 한층 명확해졌기 때문이다.
총수가 추진하는 사업 재편이나 지배구조 개편이 이사회 문턱을 넘으려면 독립이사에게 거래의 필요성과 주주에게 돌아갈 이익을 충분히 설명하는 과정이 중요해질 전망이다.
◇자사주 소각 원칙…전통적 경영권 방어도 제약
자기주식을 경영권 방어에 활용할 수 있는 여지도 줄었다. 올해 3월 시행된 3차 개정 상법은 회사가 취득한 자기주식을 원칙적으로 취득일로부터 1년 안에 소각하도록 했다.
예외적으로 자기주식을 계속 보유하거나 처분하려면 법에서 정한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보유 목적과 주식의 종류·수량, 보유 기간과 처분 시점 등을 담은 자기주식보유처분계획을 작성해 매년 주주총회 승인을 받아야 한다.
자사주는 회사가 보유하는 동안 의결권이 없지만 제3자에게 처분하면 의결권이 되살아난다. 기업이 경영권 분쟁 과정에서 우호 세력에 자사주를 매각해 의결권을 확보하는 ‘백기사’ 전략이 가능했던 이유다.
인적분할 과정에서 자사주에 신설회사 주식을 배정해 지배력을 강화하는 이른바 ‘자사주의 마법’도 제한된다. 개정 상법은 회사의 합병이나 분할·분할합병 과정에서 자기주식에 신주를 배정하는 것을 금지했다.
자사주가 장기간 보유하는 경영권 방어 수단에서 소각을 원칙으로 하는 주주환원 수단으로 전환되면 총수와 이사회는 자본정책에 대해서도 주주의 승인을 구해야 한다. 회사가 자사주를 계속 보유하거나 특정 목적으로 활용하려면 그 필요성과 주주 이익을 직접 설명해야 한다.
내년 1월부터는 자산총액 2조원 이상 상장회사의 전자주주총회 개최도 의무화된다. 주주는 총회장에 직접 가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출석해 의결권을 행사하고 의사진행에 참여할 수 있다. 물리적 거리와 시간의 제약이 줄어들면서 국내외 주주의 참여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된다.

◇삼성은 낮은 직접 지분, 현대차는 순환출자 ‘고리’
상법 개정의 파급력은 그룹마다 다르게 나타날 전망이다. 총수 일가가 보유한 지분과 지주회사 체제 여부, 핵심 계열사로 이어지는 출자구조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삼성그룹은 총수 일가가 삼성물산과 삼성생명 등을 거쳐 삼성전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조다. 이재용 회장은 그룹 총수지만 삼성전자 등기이사는 아니다. 이 회장의 낮은 삼성전자 직접 지분과 금융계열사를 경유한 지배구조, 보험업법 개정 논의 등이 맞물려 있다.
주주 추천 이사와 감사위원의 진입 가능성이 확대되면 삼성의 지배구조 개편 과정도 보다 강한 주주 감시를 받을 수 있다. 이 회장의 삼성전자 등기이사 복귀 여부 역시 책임경영과 이사회 권한 강화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다시 주목받을 전망이다.
SK그룹은 최태원 회장과 특수관계인이 지주회사 SK를 통해 주요 계열사를 지배한다. SK스퀘어를 거쳐 SK하이닉스로 이어지는 출자구조 아래에서 계열사 재편과 대규모 AI 투자, 재무구조 개선을 함께 추진해야 한다.
계열사 합병이나 자산 매각, 내부거래를 결정하는 과정에서 개별 회사 주주의 이익을 입증해야 할 부담도 커질 수 있다. 그룹 차원의 전략적 필요성만으로는 이사회와 주주를 설득하기 어려워진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지주회사 없이 현대모비스→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로 이어지는 순환출자 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정의선 회장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이 높지 않아 순환출자 해소와 지배구조 개편은 그룹의 오랜 과제로 남아 있다.
향후 합병이나 지분 교환을 통해 출자구조 개편에 나설 경우 거래 조건과 주주가치 훼손 여부가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과거 지배구조 개편 시도가 주주의 반대로 무산된 경험도 있어 이사회와 일반주주의 동의를 확보하는 작업이 더욱 중요하다.
LG그룹은 ㈜LG를 정점으로 한 지주회사 체제를 구축해 다른 그룹보다 출자구조가 단순하다. 구광모 회장도 ㈜LG 지분을 기반으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경영권을 확보하고 있다.
다만 주요 계열사의 사업 재편과 계열 분리 이후 남은 지분 관계, 장기적인 승계 구도에서는 개정 상법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지주회사 체제가 안정적이더라도 개별 상장회사 이사회에서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고려해야 하는 책임은 동일하다.
총수의 직접 지분이 낮고 계열사 간 출자나 자사주에 대한 의존도가 높을수록 개정 상법의 영향은 클 것으로 예상된다. 반대로 지주회사 지분과 우호 주주 기반을 안정적으로 확보한 그룹은 상대적으로 대응 여력이 크다.
◇지분을 넘어 주주의 지지로…총수 리더십 전환
개정 상법 시행만으로 총수 중심의 경영 체제가 곧바로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소수주주 추천 후보가 이사회에 진입하려면 주주제안 요건을 갖추고 기관투자자와 외국인 주주의 표를 끌어와야 한다.
주주가 추천한 이사 역시 특정 주주나 행동주의 펀드의 이익만을 대변할 수 없다. 선임 이후에는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직무를 수행해야 한다. 단기 배당 확대나 자산 매각이 장기적인 기업가치를 훼손한다면 주주 추천 이사도 충실의무 논란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총수 일가의 지분과 계열사 간 출자만으로 그룹 지배력을 유지해 온 기존 방식에는 변화가 불가피하다. 총수의 영향력은 앞으로 보유 지분과 함께 기관투자자·외국인·소수주주의 지지, 독립이사에 대한 설득력에 따라 좌우될 가능성이 크다.
삼성·SK·현대차·LG는 내년 3월 정기 주주총회를 앞두고 이사 정원과 임기, 감사위원 후보, 자사주 처리 계획을 포함한 대응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지배구조 개편이나 계열사 재편을 추진할 경우 전체 주주에게 돌아갈 이익을 제시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내년 정기 주주총회는 강화된 주주권이 4대 그룹의 이사회 구성과 의사결정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칠지 확인하는 첫 무대가 될 전망이다. 총수에게 필요한 힘도 이사회를 장악하는 능력에서 이사회와 주주의 동의를 끌어내는 능력으로 이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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