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위크|킬(Kiel)=박설민 기자 독일 북부의 항구도시 ‘킬(Kiel)’은 오랫동안 조선업과 기계공업이 발달한 산업도시로 성장한 곳이다. 실제로 킬이 위치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는 독일 전체 조선 생산의 약 20%를 담당하는 해양산업 거점으로 꼽힌다. 때문에 킬은 거대한 항만과 조선소, 운하, 공업시설이 자리한 도시로 묘사된다.
기자가 마주한 킬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잠수함과 선박 건조 현장, 물류 컨테이너들이 항구에서 바쁘게 오갔다. 하지만 이 항구도시의 한편에는 숲과 공원, 바다로 이뤄진 자연과의 조화가 있었다. 200년이 넘은 숲은 시민들의 일상이었다. 항구 주변에는 녹지가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자연환경만이 아니다. 킬은 폐품에서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제로웨이스트 공간’과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공원은 친환경 도시로의 면모를 다방면으로 드러냈다. 또한 소소한 일상 용품들 모두 환경 보호를 위한 독일인들의 노력이 깃들어 있었다.
◇ 버려진 건물과 자재가 만든 작품 ‘ARTE MU’
따뜻한 발트해의 햇살 아래 킬 항구(Kiellinie)를 따라 남쪽으로 30분쯤 걷자 붉은 벽돌 건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벽의 여기저기엔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었다. 또한 오래된 나무 판자, 철근으로 만든 모빌 등의 장식은 현대적이면서도 고풍스러운 느낌을 줬다.
8일(현지시간) 기자가 방문한 이곳은 ‘알테 무 크레아티프첸트룸(Alte Mu Kreativzentrum)’이다. 킬 로렌첸담(Lorentzendamm)에 위치한 알테 무는 시민과 예술가, 디자이너, 기업들이 함께 사용하는 창작·문화·지속가능성 복합공간이다.
알테 무의 역사는 옛 예술대학 건물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재활용하면서 시작됐다. 2012년 무테지우스 예술대학은 로렌첸담에서 레기엔슈트라세 신규 캠퍼스로 이전했다. 이때 4명의 젊은 사업가들이 빈 대학교 건물에서 도시 양봉 프로젝트 ‘킬러 호니히(Kieler Honig)’를 시작한 것이 알테 무가 만들어진 계기다.
이후 퇴비화 화장실 프로젝트, 개방형 공방, 사진 스튜디오, 자전거 발전 영화관 등이 하나둘 입주했다. 이들이 모여 2014년 공동 운영회의를 시작했다. 이후 2015년 비영리단체를 설립하면서 현재의 알테 무 창작센터로 발전했다.
빈 건물을 예술 공간으로 바꾼 곳답게 알테 무는 킬 ‘제로웨이스트(Zero Waste)’ 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센터 내부 장식들은 모두 산업 현장서 버려진 나무 조각, 철근,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제로웨이스트란 일상생활에서 배출되는 쓰레기를 최소화하고 모든 자원을 재사용 및 순환시켜 폐기물을 없애는 것을 말한다.
알테 무 제로웨이스트 프로젝트의 핵심 사업은 ‘Alte Mu goes Zero Waste’다. 지역단체 ‘Zero Waste Kiel’과 협력, 알테 무를 폐기물 발생이 적은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이에 알테 무 내부에서는 일회용 컵과 플라스틱 용기 대신 도자기 식기와 다회용품을 사용한다.
버려진 물건, 폐자재로 새로운 제품을 만드는 ‘업사이클링’도 알테 무의 핵심 사업이다. ‘베르크 슈타트 콘줌(Werk Statt Konsum)’은 개방형 목공소다. 이곳에서는 고장난 가구를 폐목재를 활용 고칠 수 있다. 또한 가구 수리, 재사용, 업사이클링 교육도 함께 진행된다.
‘베르트슈토프복스(Wertstoffbox)’는 버려질 재료를 수집해 다시 활용하는 ‘재료 도서관’이다. 가정에서 폐기되기 쉬운 약 180종의 재료를 수집, 시민들에게 제공한다. 또한 이 폐자재로 만든 제품을 판매·공유하는 업사이클링 워크숍도 연다.
◇ 자연과의 조화… 일상에 스며든 친환경
자연과의 조화도 킬의 핵심이었다. 특히 킬 시내를 탐방하던 중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정부 청사(Staatskanzlei Schleswig-Holstein)를 방문했다. 놀랍게도 이곳에서는 여러 곤충들을 위한 ‘곤충 호텔’이 주 총리실 안뜰에 만들어져 있었다.
2023년 주정부 청사의 디르크 슈뢰터(Dirk Schrödter) 디지털 정책부 장관은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산림청 연구원들에게 요청, 목조 골조 구조의 곤충 호텔을 만들었다. 약 300kg에 달하는 이 구조물은 1.25m³의 넓이로 참나무를 이용해 제작됐다.
곤충 호텔 내부는 1층은 점토와 갈대로, 그 위 2층은 덤불, 나무껍질로 덮여 있다. 3층은 곤충들이 둥지를 틀 수 있도록 미리 잘라놓은 나무들이 놓여 있다. 이곳에서는 호박벌부터 야생 꿀벌, 풀잠자리들의 보금자리로 활용된다는 게 주정부 청사 관계자 측 설명이다.
정부청사 뿐만 아니라 킬의 자연 친화적 환경은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었다. 킬의 공원들엔 반려동물과 산책나온 주민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공원 모습은 한국과는 조금 달랐다. 깔끔하고 예쁘게 정돈된 느낌이 한국 공원이라면 킬의 공원은 울창한 숲이 우거져 정글처럼 보이기도 했다. 실제로 킬의 대표 정원인 ‘Alter Botanischer Garten’은 무려 200년이 된 공원이었다.
또한 각 공원 입구엔 검은색 부엉이 모양 표지판이 서 있었다. 표지판에는 ‘경관보호구역(Landschafts-schutzgebiet, LSG)’라고 적혀 있었다. 이는 독일의 ‘연방 자연보호법(Bundesnaturschutzgesetz)’에 의거, 자연경관의 특성, 생태적 기능, 휴양 가치를 보전하기 위한 지역을 의미한다. 현재 독일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쥐트티롤 등에서 시행 중이다.
이때 LSG는 ‘자연보호구역(Naturschutzgebiet)’과는 차이가 있다. 자연보호구역이 생물종과 생태계에 대한 엄격한 보호에 초점을 맞춘다면, LSG는 전반적인 경관의 모습 보전이 목표다. 따라서 토지 이용, 활동 자체에 대한 제한은 상대적으로 적다. 다만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 LSG를 ‘제5급 보호지역’으로 분류하는 만큼 환경 보전에 대한 가치는 결코 작지 않다.
◇ 상품 하나에도 ‘자연 보전’이 담겼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 저녁거리를 사러 간 곳에서도 킬의 친환경 노력이 담겨 있었다. 독일 슈퍼마켓 ‘에데카(Edeka)’ 내부의 비닐 봉투는 모두 재활용 가능한 얇은 비닐이었다. 또한 비닐 봉투 대신 종이 봉투 사용을 장려했다. 상품 매대에 진열된 음료수, 물병들은 오래 쓴 흔적이 보였다. 분리 수거된 유리병을 재활용해 다시 사용하고 있던 것이다.
에데카에는 글로벌 환경 인증을 받은 제품들도 다수 있었다. 대표적으로 글로벌 최대 규모의 비영리 자연보전기관 ‘세계자연기금(WWF)’ 인증을 받은 소시지가 눈길을 끌었다. 제품 설명에는 “유기농 생산, 화학 살충제 사용 금지, 무기질 비료 사용 자제에 대한 WWF 인증을 받은 제품입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해당 제품에 WWF 인증을 받은 것은 에데카가 WWF와 2009년부터 ‘지속가능성을 위한 파트너십’을 이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독일WWF는 에더카 내 5,000여개 제품군에 20명 이상의 전문가가 과학적 자문을 제공하고 있다. 환경 기준을 통과한 제품은 WWF의 상징인 판다 로고를 표시한다.
독일 킬의 사례를 보면서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협력이 가능할 것이란 기대감도 커졌다. 실제로 한국WWF는 2022년부터 ‘이마트’와 ‘상품 지속가능성 이니셔티브(Product Sustainability Initiative·PSI)’를 추진하고 있다. 친환경 상품 및 원재료 조달, 건강·영양·안전, 포장·플라스틱 등 4개 분야의 지속가능한 상품 기준 마련과 공급이 목표다.
또한 양사는 친환경 식품 관련 연구도 협력 중이다. 2024년에는 이마트, 한국WWF는 서울대학교 연구진과 함께 한국인의 지속가능한 식재료 52가지를 선정한 ‘K-Future Foods 52’를 발표한 바 있다. 이어 올해는 기후변화에 따른 고등어·갈치 등 수산물 공급망의 위험을 분석하고, MSC·ASC 등 국제 인증 수산물 확대와 지속가능한 원재료 조달 방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킬에서 본 친환경은 특별한 구호보다 생활 속 작은 선택에 가까웠다. 소비자의 일상적인 ‘장보기’ 단계에서 지속가능한 선택을 늘리려는 시도였다. 상품과 생활 모두에서 환경 기준을 반영했다. 한국에서도 이마트와 한국WWF의 협력처럼 비슷한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만큼, 이런 변화가 일상적인 소비문화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 지켜볼 만하다.
◇ 시민·정부·기업 공동의 협력, 독일 최초의 ‘제로웨이스트 인증 도시’로
이 같은 시민들과 주정부, 기업들 공동의 노력으로 킬은 독일 친환경 정책의 상징인 도시로 자리 잡았다. 지난 2023년 2월에는 독일 최초의 ‘제로웨이스트 인증 도시(Zero Waste Certified City)’로 선정되기도 했다.
해당 인증은 ‘Mission Zero Academy(MiZA)’에서 부여했다. 유럽 제로웨이스트 네트워크 ‘Zero Waste Europe’의 산하 기관인 MiZA는 유럽 지방정부와 중소기업 등이 제로웨이스트와 순환경제 체제로 전환하도록 교육·컨설팅하고 성과를 인증하는 유럽 전문기관이다.
킬은 지난 2021년 5월에 제로웨이스트 인증 도시 후보 자격을 획득했다. 이후 2023년 2월 초 3일간의 심사를 거쳐 최종 인증 절차를 걸쳐 인증 받았다. 후보 자격 획득부터 최종 인증까지 2년 만에 전체 평가 시스템을 완료한 유럽 최초의 도시가 됐다.
킬 시 측은 “제로 웨이스트 인증 도시가 되기 위해 450명이 넘는 시민들과 부퍼탈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2019년에서 2020년까지 제로 웨이스트 콘셉트를 개발했다”며 “이 콘셉트에는 킬시의 폐기물 발생을 줄이기 위한 100가지 이상의 구체적인 방안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가 개발한 방안들은 폐기물 관리 시스템 전환, 가정, 교육기관, 공공기관, 상업, 무역 및 행사 등 다양한 분야로 구성됐다”며 “킬 시는 이러한 방안들을 통해 2035년까지 1인당 연간 총 폐기물량을 평균 15% 감축하고 잔여 폐기물 발생량을 절반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한다”고 전했다.
킬의 친환경·탄소중립으로 나아가는 길은 때로는 부족하고, 때로는 다소 어설퍼 보일 수도 있다. 버려진 자재로 만든 장식과 시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공방, 관공서 한편의 작은 곤충 호텔만으로 거대한 도시의 환경문제를 단숨에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킬은 완벽한 친환경 도시의 선언이 아닌, 일상에서 가능한 실천을 하나씩 쌓아 올리는 길을 택했다. 거창한 구호보단 재활용을, 극단적인 재생에너지 전환보다는 당장의 지붕 위 태양광 패널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우리 역시 서툴지만 꾸준히 친환경의 성과를 만들어가는 킬의 사례를 다시 한번 되짚어 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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