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2026년 대한민국 4대 그룹의 시계가 하반기에 접어들었다. 이재용·최태원·정의선·구광모 회장은 상반기 인공지능과 반도체, 모빌리티, 에너지 등 미래 산업을 둘러싼 승부수를 잇달아 던지며 각자의 성장 방향을 선명히 했다. 마이데일리는 상반기 이들의 선택과 성과를 되짚고, 발표한 투자와 전략을 실제 생산·수주·실적으로 증명해야 할 하반기 승부처를 5회에 걸쳐 짚어본다.
[마이데일리 = 윤진웅 기자] 삼성·SK·현대자동차·LG 등 이른바 4대 그룹의 총수들은 올해 상반기 인공지능(AI)를 중심으로 한 각자의 투자 공식을 사실상 완성했다. 그룹의 특성에 따라 AI 사업의 초점은 달랐지만 경기와 통상 환경의 불확실성을 이유로 투자를 늦추기보다 국내 생산기반과 연구개발, AI 인프라를 먼저 확보하는 쪽을 택했다는 게 공통 분수다.
올해 상반기가 기술과 부지, 생산거점, 글로벌 동맹을 선점하는 시간이었다면 하반기부터는 이를 양산과 수주, 현금흐름으로 연결하는 '전환 속도'가 각 그룹의 성적표를 가를 핵심 변수가 될 전망이다.

4일 재계에 따르면 4대그룹 총수의 투자 지도는 ‘인공지능(AI)’이라는 한 지점에서 만났지만, 그 뒤부터는 네 갈래로 갈렸다. 같은 AI를 바라봤지만 서로 다른 길을 택한 네 총수의 진짜 경쟁이 하반기 들어 본격화하고 있는 모양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첨단 패키징 등 AI 핵심부품에 집중했고,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메모리부터 데이터센터·전력·통신까지 연결하는 ‘AI 풀스택’을 꺼냈다.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은 제조 데이터와 로봇, 수소를 결합한 ‘피지컬 AI’를 전면에 세웠고,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AI 모델을 로봇·냉각·전력 등 산업 현장에 심는 사업화에 무게를 뒀다.
이를 위한 이들 그룹의 투자 방향은 지난해 말부터 선명하게 부각됐다. 삼성은 향후 5년간 연구개발을 포함해 국내에 450조원을 투자하기로 했고, SK는 오는 2028년까지 128조원, 현대차그룹은 2026년부터 2030년까지 125조2000억원, LG는 향후 5년간 100조원의 국내 투자 계획을 각각 내놨다. 투자기간과 집계 기준이 서로 달라 단순 비교에는 한계가 있지만, 발표액을 더하면 803조2000억원에 달한다.
이전의 대규모 투자가 특정 공장이나 생산설비 증설을 중심으로 이뤄졌다면 이번 투자계획은 범위가 훨씬 넓다. 반도체 공장에 데이터센터와 전력 인프라가 붙고, 자동차 생산기지에는 로봇과 AI 학습체계가 결합한다. AI 모델을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를 가동할 서버와 냉각장치, 전력원, 핵심부품까지 함께 확보하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 이재용 ‘AI 핵심부품 집중’…HBM·패키징 직접 챙겨

이재용 회장의 투자 공식은 ‘AI 핵심부품 집중’으로 요약된다. 삼성의 450조원 국내 투자계획에는 평택 반도체 5라인 건설과 AI 데이터센터 관련 사업 등이 포함돼 있지만, 이 회장이 상반기 직접 힘을 실은 곳은 AI 반도체의 성능을 결정하는 HBM과 첨단 패키징이었다. 지난 6월 삼성전자 천안사업장 C1·C2 라인을 찾아 사업장 운영 현황과 생산계획, 기술개발 진행 상황을 직접 점검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다.
천안사업장은 HBM 후공정과 첨단 패키징을 담당하는 삼성전자의 핵심 생산거점이다. 이 회장이 단순한 메모리 생산량보다 HBM의 성능과 품질을 완성하는 후공정까지 직접 챙겼다는 점에서 상징성이 컸다는 평가다.
기술 성과도 뒤따랐다. 삼성전자는 지난 2월 HBM4 양산 출하를 시작한 데 이어 5월에는 차세대 제품인 HBM4E 샘플을 고객사에 공급했다. HBM 시장에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았던 삼성이 세대 전환을 계기로 주도권을 되찾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셈이다.
삼성은 메모리뿐 아니라 파운드리와 첨단 패키징을 모두 보유한 기업이다. 이 회장의 전략은 이 세 영역을 개별 사업으로 떼어놓지 않고 AI 가속기에 필요한 하나의 통합 솔루션으로 묶는 데 가깝다. 상반기에 기술과 생산현장을 직접 점검했다면 하반기에는 HBM4·HBM4E 공급 확대와 고객사 확보를 통해 투자 성과를 증명해야 한다.
◇ 최태원 ‘AI 풀스택’…데이터센터·반도체에 초대형 승부수

최태원 회장은 ‘AI 풀스택’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SK하이닉스가 공급하는 AI 메모리를 중심에 두고 SK텔레콤의 통신·데이터센터 운영 역량, 그룹의 에너지 사업을 하나의 AI 인프라 생태계로 연결하는 구상이다.
이와 관련 최 회장은 지난 6월 말 SK텔레콤을 중심으로 오는 2035년까지 전국에 총 15GW 규모의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을 공개하기도 했다. 전력과 부지를 확보할 수 있는 지역에 5GW 규모를 조성하고, 이후 AI 수요와 투자 여건에 맞춰 10GW를 추가하는 방식이다. AI 데이터센터 프로젝트에는 약 1000조원, 반도체 생산기반 확충에는 약 1100조원 규모의 장기 로드맵을 제시했다.
다만 이 숫자는 SK가 단기간에 단독으로 집행하는 현금 투자액이라기보다 시장 수요와 참여 기업, 지역별 사업을 전제로 2035년까지 순차적으로 진행하는 프로젝트 총규모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SK 역시 투자 여건을 살피며 1·2단계로 나눠 데이터센터를 확대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규모보다는 구조가 핵심이다. 최 회장은 SK하이닉스의 HBM 경쟁력을 개별 계열사의 성공으로 남겨두지 않고, 데이터센터와 전력 수요를 창출해 그룹 전체의 성장으로 확산하려 하고 있다. 메모리를 판매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AI가 생산되고 유통되는 공장 자체를 운영하겠다는 것.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 구축 일정을 앞당기고 청주와 서남권까지 생산벨트를 넓히겠다는 계획도 같은 맥락이다. 최 회장에게 하반기는 SK하이닉스의 성과를 AI 인프라와 에너지, 통신 사업의 실질적인 성장으로 얼마나 빠르게 확산할 수 있느냐가 시험대가 될 전망이다.
◇ 정의선 ‘피지컬 AI’…자동차 공장을 로봇 학습장으로

정의선 회장은 AI에 ‘몸’을 입혔다. 소프트웨어나 데이터센터에 머무르지 않고 AI가 로봇과 자동차, 제조설비를 통해 현실에서 움직이게 만드는 ‘피지컬 AI’가 투자 공식의 중심이다.
이에 따라 현대차그룹은 ‘아틀라스’를 오는 2028년부터 미국 조지아주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에 단계적으로 투입하고, 같은 해까지 연간 3만대 규모의 로봇 생산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계획이다. 2030년부터는 부품 분류를 넘어 조립 공정까지 아틀라스의 작업 범위를 확대한다.
아틀라스는 지난 1월 CES 2026에서 공개된 보스턴다이나믹스의 차세대 전동식 휴머노이드 로봇이다.
실제 제조현장에서 축적되는 방대한 데이터가 현대차그룹이 가진 강점이다. 로봇을 공장에 투입해 학습시키고, 그 결과를 다시 소프트웨어와 제품에 반영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다. 정 회장이 자동차 제조사를 넘어 로봇과 AI를 생산하는 미래기술 기업으로의 전환을 강조하는 이유다.
지난 2월 발표한 새만금 투자계획은 이 구상을 국내 산업거점으로 옮긴 사례다. 현대차그룹은 2026년부터 새만금에 9조원을 단계적으로 투자해 5조8000억원 규모 AI 데이터센터와 4000억원 규모 로봇 제조·부품 클러스터, 1조원 규모 수전해 플랜트, 1조3000억원 규모 태양광 발전시설, 4000억원 규모 AI 수소 시티를 구축하기로 했다. 이는 현대차그룹이 앞서 발표한 125조2000억원 국내 투자계획의 핵심 프로젝트다.
데이터센터가 AI의 두뇌를 만들고, 로봇 공장이 몸을 생산하며, 태양광과 수소가 이를 움직일 에너지를 공급하는 구조다. 정 회장 체제의 투자가 자동차 한 대를 더 만드는 설비 확장이 아니라 제조업의 운영체계 자체를 AI로 바꾸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뚜렷하게 보여준다.
◇ 구광모 ‘산업 AI’…모델·부품·인프라를 사업으로

구광모 회장은 ‘산업 AI’에 집중하고 있다. AI를 연구실 밖으로 꺼내 제품과 산업 현장에서 돈을 버는 사업으로 전환하는 것이 핵심이다. 향후 5년간 국내에 투자할 100조원 가운데 60%인 60조원을 소재·부품·장비 기술 개발과 확장에 투입하기로 했다. AI 경쟁력 역시 협력사와 제조 생태계 전체의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져야 한다는 게 구 회장이 제시한 방향이다.
상반기 LG의 행보는 AI 모델과 로봇, 데이터센터 인프라를 동시에 사업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다. LG전자는 지난 1월 CES 2026에서 가사노동을 수행하는 홈로봇 ‘LG 클로이드’를 공개하고 로봇 관절에 들어가는 액추에이터 브랜드 ‘악시움’을 처음 선보였다. 가전에서 쌓은 모터·구동 기술을 피지컬 AI 시대의 핵심부품 사업으로 확장하겠다는 구상이다.
AI 데이터센터에서는 계열사 역량을 묶은 ‘원 LG’ 전략을 가동했다. 오는 2027년 준공을 목표로 건립 중인 파주 AI 데이터센터에 LG유플러스의 운영 역량, LG전자의 냉각기술, LG에너지솔루션의 전력·배터리 기술을 결합했다. LG유플러스가 실증한 직접 액체냉각 방식은 기존 공기 냉각보다 약 24% 높은 에너지 효율을 보였다.
LG AI연구원은 자체 AI 모델 엑사원과 엔비디아의 네모트론을 결합해 차세대 모델과 산업 특화 AI 생태계를 공동으로 구축하기로 했다. 구 회장 체제의 LG는 AI 모델 자체만으로 경쟁하기보다 엑사원을 제품과 제조, 신소재, 데이터센터에 적용해 기존 사업의 부가가치를 끌어올리는 쪽을 택한 셈이다.
업계는 투자액 아닌 ‘전환율’이 하반기 승부를 결정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거대한 투자계획이 곧바로 리더십의 성과가 되는 것은 아니"라며 "삼성은 HBM4와 HBM4E의 공급처를 넓히고 첨단 패키징 경쟁력을 양산 성과로 연결해야 한고, SK는 15GW 데이터센터와 반도체 생산벨트의 부지·전력·자금조달 방식을 구체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현대차그룹은 새만금 투자계획을 실제 착공으로 옮기는 동시에 아틀라스의 안전성과 생산성을 입증해야 하는 과제를 갖고 있고, LG 역시 클로이드와 악시움, 데이터센터 냉각 솔루션을 수주와 이익으로 전환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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