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이데일리 = 최주연 기자] 국내 금융지주들의 지속가능경영보고서 첫 장이 달라졌다. 탄소중립과 기후금융 중심이던 ESG 서사에 생산적 금융과 포용금융이 새로운 축으로 부상하고 있다. 혁신기업과 첨단산업, 소상공인 지원이 금융의 새로운 사회적 역할로 제시되는 모습이다.
다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불과 얼마 전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 연차보고서에서 생산적 금융 확대를 건전성 리스크로 설명했던 금융지주들의 시각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국내에서는 상생과 혁신금융을 강조했지만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연체율 상승과 자산건전성 악화 가능성을 경고했던 만큼, 생산적 금융을 둘러싼 금융권의 현실적 딜레마도 함께 드러나고 있다는 평가다.
◇ ESG의 새 화두 된 생산적 금융
1일 금융권에 따르면 KB금융그룹은 최근 발간한 지속가능경영보고서에서 2030년까지 생산적 금융 93조원, 포용금융 17조원 등 총 110조원을 공급하겠다는 목표를 제시했다. 신한금융그룹 역시 생산적 금융 95조원과 포용금융 15조원 등 총 110조원 지원 계획을 내놨다. 이 가운데 올해만 생산적 금융 17조원과 포용금융 3조원 등 총 20조원을 공급할 계획이다.
하나금융그룹은 생산적 금융 84조원과 포용금융 16조원 등 총 100조원을 투입하는 '하나 모두 성장 프로젝트'를 공개했다. 올해 생산적 금융 공급 규모도 당초 계획보다 1조6000억원 늘어난 17조8000억원으로 확대했다. 우리금융그룹은 2030년까지 생산적 금융 73조원과 포용금융 7조원 등 총 80조원을 지원하는 '미래동반성장 프로젝트'를 전면에 내세웠다.

과거 ESG 보고서가 탄소중립과 기후금융에 방점을 찍었다면 최근에는 혁신기업과 첨단산업, 청년과 소상공인 지원이 새로운 핵심 의제로 부상하는 모습이다.
흥미로운 점은 금융지주들이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생산적 금융을 다른 시각에서 설명했다는 점이다.
KB금융은 SEC 공시에서 저소득층과 금융취약계층 차주에 대한 대출 확대 정책이 고객 채무불이행 위험 증가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연체율 상승과 자산건전성 악화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한금융 역시 정책 대응 과정에서 사업 관행 조정이 필요할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연체율 증가와 자산건전성 악화가 발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우리금융은 한발 더 나아가 생산적 금융 확대 정책에 따라 원래 지원하지 않았을 부문까지 금융 지원이 이뤄질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비용이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국내에서는 혁신금융과 상생금융 확대를 강조하면서도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건전성과 수익성 측면의 부담 요인으로 인정한 셈이다.
◇ 혁신기업 지원 외치지만 돈은 대기업으로
관련 내용이 알려지며 논란이 확산되자 금융지주들은 이례적으로 공동 진화에 나섰다. KB·신한·우리금융은 공동 입장문을 통해 미국 SEC 연차보고서는 미국 증권법상 투자자 보호 원칙에 따라 잠재적 위험요인과 불확실성을 폭넓게 기재하도록 돼 있는 만큼 국내 사업보고서와는 공시 체계 자체가 다르다고 설명했다.
또 생산적 금융 관련 내용 역시 Form 20-F 내 수많은 리스크 요인 가운데 일부에 불과하며, 특정 투자자에게 추가 정보를 제공하거나 국내 투자자를 차별하기 위한 목적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다만 금융권 안팎에서는 이번 논란이 금융사들이 생산적 금융 확대에 따른 건전성 부담을 실제로 의식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 사례라는 평가도 나온다.
실제 최근 은행권 자금 흐름 역시 정책 취지와는 다소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생산적 금융은 은행 자금이 부동산과 가계대출에 머무르지 않고 혁신기업과 첨단산업, 중소기업 등 실물경제 성장 분야로 흘러가도록 유도하는 정책이다.
그러나 고금리 장기화와 내수 부진으로 중소기업과 개인사업자 부실 우려가 커지면서 은행들은 오히려 담보력과 현금흐름이 안정적인 대기업 대출 비중을 확대하고 있다.

은행권 한 관계자는 "생산적 금융이 혁신기업 지원을 의미하지만 실제 현장에서는 반도체와 바이오, 방산 등 대규모 자본과 기술력이 필요한 산업 비중이 높다"며 "결국 자금은 재무 안정성과 투자 여력이 충분한 대기업 중심으로 공급될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정책은 혁신기업과 미래산업으로의 자금 공급을 요구하지만 시장은 위험 조정 수익률이 높은 대기업을 선택하고 있는 셈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생산적 금융은 금융사의 사회적 책임이지만 동시에 건전성 관리와 충돌할 수 있는 영역"이라며 "결국 금융사의 경쟁력은 상생과 건전성 사이에서 얼마나 균형점을 잘 찾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Copyright ⓒ 마이데일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comment--
첫 번째 댓글을 작성해 보세요.
댓글 바로가기